더에듀 | 요즘 초중고 학교 현장에서 교사들의 관심 집중과 해법 찾기 요구는 학부모 및 교육부와 갈등의 연장이다.
교육 현장을 바라보면 마치 오래된 수학여행 버스 한 대가 안갯속 도로를 달리는 모습 같다. 운전석에는 교육부가 앉아 있고, 뒤쪽 좌석에는 교사와 학부모, 학생들이 서로 다른 목적지를 외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운전석 옆의 내비게이션은 계속 재탐색 중이다.
최근에는 대통령의 한마디에 부랴부랴 ‘교사 면책 강화’로 방향지시등이 켜지고, 교육부는 급하게 핸들을 꺾는다. 그때마다 버스 안에서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라는 탄식이 저절로 터져 나온다.
최근 체험학습 사고와 관련해 교사의 면책 범위를 둘러싼 논란에서 교육부는 교사들의 부담을 덜어주겠다며 대책을 내놓았지만, 교원단체들은 “현실성이 부족하다”며 그 미진함에 반발하고 있다.
교사 입장에서 볼 때 억울함이 클 수밖에 없다. 수십 명의 학생을 인솔하며 예측 불가능한 상황까지 모두 책임져야 한다면, 누가 선뜻 체험학습을 가려고 하겠는가?
교실 밖 교육은 점점 사라지고, 결국 아이들은 현장학습 대신 유튜브 영상으로 자연을 배우게 될지도 모른다.
“얘들아, 저게 바다란다.”
“선생님, 4K로 보니까 더 선명해요.”
이런 웃지 못할 풍경이 현실 속으로 깊이 들어와서는 안 될 것이다.
교사의 교육활동과 학생의 안전, 둘 다 경시할 수 없어
대통령 발언에 휘둘리는 교육부, 현장 혼란 불러와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잠시 잊지 말아야 할 장면도 있다. 사고로 인해 자녀를 잃거나,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아이를 부양하는 부모의 심정이 그것이다.
부모에게 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다. 하루 중 가장 오랜 시간을 아이를 맡기는 또 하나의 사회적 가정이다. 그런 믿음 속에서 보낸 체험학습에서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발생했다면, 부모의 절망은 법률 조항 몇 줄로 완전히 위로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교사 편이냐, 학부모 편이냐”의 단순한 선택으로 접근할 일이 아니다. 모든 권리에는 의무가 따르고, 모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교사의 교육활동은 보호받아야 하지만, 학생의 안전 역시 결코 가벼이 다룰 수 없는 가치다.
문제는 어느 한쪽만을 위해 저울추를 기울이는 순간 갈등은 더 커진다는 데 있다. 지금 우리 교육 현장이 이런 모습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평가다.
사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완벽한 안전’을 요구하면서도 동시에 ‘무한 책임 면제’를 바라는 이상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비가 오면 소풍 취소했다고 민원이 들어오고, 소풍을 갔다가 다치면 왜 갔냐고 책임을 묻는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모험심과 도전 의식을 길러주라는 주문을 받지만, 작은 위험도 허용하지 말라는 경고도 동시에 듣는다. 마치 “물에는 들어가되 절대 젖지는 말라”는 요구와 하등의 차이가 없다.
교육부 역시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정책은 신뢰를 먹고 자라는데, 너무 잦은 급선회는 현장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관행처럼 충분한 사회적 논의와 현장 의견 수렴 없이 대책이 발표되면, 정책은 처방전이 아니라 임시방편으로 보이기 쉽다. 특히 대통령 발언 이후 서둘러 방향을 바꾸는 모습은 교육정책의 독립성과 전문성에 대한 의문까지 남긴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 했는데, 현실은 종종 “오늘 발표, 내일 수정”의 속보 경쟁처럼 보이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교사·학부모, ‘역지사지’ 통한 공동의 노력 필요
그럼에도 아쉬운 점은 남는다. 아직 결론이 완전하지 않더라도, 서로의 입장을 조금 더 이해하려는 즉, 역지사지하는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교사들은 학부모의 불안을 이해하려 하고, 학부모들은 교사의 현실적 어려움을 들으려 해야 한다. 교육부는 양측의 목소리를 조율하는 책임 있는 중재자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를 보호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모두를 지켜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집중해야 한다.
솔직히 교육은 원래 불편한 과정이다. 아이들은 넘어지며 배우고, 교사는 긴장 속에서 책임을 감당하며 성장한다. 그러나 그 과정이 두려움과 소송 공포만으로 채워진다면 교육은 살아 숨쉬기 어렵다.
체험학습이 “교육활동”이 아니라 “법률 리스크”로만 인식되는 순간, 아이들의 배움은 점점 작아질 것이다. 올해 들어 이런 현장의 목소리가 점차 고조되고 있는 형국은 각종 언론 보도에서 익히 보는 바와 같다.
우리에게는 적당히 만족할 줄 아는 사회가 필요하다. 모든 사고를 완벽히 막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책임을 완전히 지울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서로를 적으로 세우지 않는 일이다. 교사도, 부모도 결국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배우고 성장하길 바란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입장은 자기만을 위한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바뀐다.
어쩌면 지금 필요한 것은 거창한 구호보다도 아주 인간적인 상상력인지 모른다. 만약 내 아이의 담임교사가 체험학습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 그리고 부모가 학교를 믿고 아이를 보낼 수 있는 사회라면 어떨까?
그때 비로소 체험학습 버스는 목적지를 향해 가면서 비포장 시골의 자연 길에서도 흔들리더라도 함께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탑승한 버스의 이름은 아마도 인류의 영원한 고전 『논어』에서 밝히는 ‘무신불립(無信不立)’의 그 ‘믿음(信賴)’일 것이라 사료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