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 대한민국 교육 현장은 6.3 교육감 선거를 통해 새로운 얼굴의 교육감들이 등장했고 벌써 3선의 고지를 점령한 친숙한 얼굴들도 있다. 16명의 교육감들은 각자의 소명 의식과 교육 비전을 앞세워 대한민국 지역의 교육행정을 책임지게 될 것이다. 이제 등장할 새 교육정책들도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눈부신 첨단의 옷을 입게 될 것이다.
현재까지 교실에는 AI 디지털 교과서(AIDT)가 보급되고,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단 0.1초 만에 논술·문 초안을 뚝딱 뽑아내고 있다. 고교학점제의 본격적인 궤도 진입과 내신 5등급제라는 거대한 제도적 전환기 속에서, 언뜻 우리 교육은 개인 맞춤형 미래를 향해 탄탄대로를 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화려한 기술의 커튼을 살짝 들춰보면, 그 안에는 기이할 정도로 고요하고 무기력한 ‘사유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자리 잡고 있다.
아이들은 스마트폰과 패드 화면을 끊임없이 스크롤하지만, 3줄 이상의 긴 텍스트를 마주하면 “선생님, 세 줄로 요약해 주세요”라며 뇌의 작동을 멈춰버린다. 인공지능이 정답을 대신 찾아주고 글을 대신 써주는 편리함에 길들여진 나머지, 스스로 의심하고, 질문하고, 맥락을 짚는 ‘생각의 근육’이 통째로 퇴화하고 있다.
글자는 읽되 속뜻을 모르는 문해력 저하가 국가적 재앙으로 부상한 2026년 현재, 우리는 지식의 양은 넘쳐나되 생각하는 힘은 실종된 ‘지적 사유 부재’의 시대를 목격하고 있다.
이 기묘한 초여름의 교실에, 우리는 20세기 역사상 가장 날카로웠던 한 지성의 목소리를 소환할 필요가 있다. 바로 정치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와 그녀의 불멸의 고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수송 작전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기록한 철학적 보고서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괴물이나 악마가 아니라, 가정을 사랑하고 상부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한 아주 “평범하고 근면한 관료”였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녀는 아이히만의 진짜 죄명이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 “사유의 무능성(Inability to think)”이라고 규정했다.
이 고전이 2026년 1학기 대한민국의 교실에 던지는 시사점은 소름 끼치도록 서늘하다.
오늘날 우리 아이들은 ‘입시’와 ‘알고리즘’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명령에 군말 없이 복종하는 현대판 아이히만이 되어가고 있다. 수행평가 점수를 잘 받기 위해 AI가 짜준 모범답안을 그대로 복사해 제출하고, 소셜미디어가 추천해 주는 숏폼 영상의 흐름에 영혼을 맡긴 채 비판 없이 수용하는 모습은 아렌트가 경고한 ‘사유의 상실’과 정확히 궤를 같이한다.
아렌트는 “말하기의 무능성, 사유의 무능성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라고 말했다. 알고리즘이 주는 도파민에 갇혀 교실 옆자리에 앉은 친구의 우울증과 마음 건강 위기에는 철저히 무감각해진 채, 오직 의대 진학과 상위 등급 획득이라는 출세와 성공 지향의 교육 가치에만 올인하는 모습, 그것이 바로 생각하기를 멈춘 교실이 마주한 “악의 평범성”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제 인공지능이 정답을 독점한 시대, 우리 교육이 해야 할 일은 정답 기계를 키워내는 것이 아니다.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아이들의 내면에 강력한 ‘사유의 면역계’를 심어주어야 한다. 이에 필자는 아렌트의 철학을 현대 교실로 적용하기 위한 획기적인 실천 방안을 몇 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AI와 싸우는 소크라테스 교실’ 즉, 질문의 상례화이다.
수업 시간의 주도권을 AI가 아닌 ‘인간의 질문’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말이다. 교사가 정답을 가르치는 대신, 생성형 AI가 내놓은 그럴듯한 답변을 칠판에 띄워놓고 아이들과 함께 “이 답변에 숨은 편견은 무엇인가?”, “AI는 왜 인간의 슬픔을 계산하지 못하는가?” 등을 치열하게 파고드는 토론 수업이 필요하다. 0.1초의 정답을 의심하고 뒤집어보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비로소 지식의 수동적 소비자가 아닌 ‘사유의 주체자’로 거듭날 것이다.
둘째, ‘정적(靜寂)의 방’과 디지털 디톡스의 실행이다.
하루에 딱 20분만이라도 교실의 모든 디지털의 기기 전원을 끄고, 오직 종이책의 질감을 느끼며 생각에 잠기는 ‘의도적 정적의 시간’을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소셜미디어가 유발하는 비교와 불안의 독소를 빼내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같은 묵직한 고전의 문장들을 필사하며 단어의 속뜻을 음미하는 사회정서적(SEL) 문해력 수업이 필요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이들은 느린 사유 속에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셋째, 세대의 역사적 서사를 채집하여 기록하는 ‘격대(隔代) 교육의 실행’이다.
텍스트 데이터로 가공된 얄팍한 진영 논리와 인터넷 괴담을 타파하기 위해, 우리 아이들이 대한민국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체득한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를 직접 인터뷰하는 프로젝트를 운영할 필요가 있다. 이를 간단하게 말하면 “할아버지(할머니)의 삶에서 가장 부당했던 시스템의 명령은 무엇이었고, 그것을 어떻게 인간의 존엄으로 버텨내셨나요?”를 묻고 기록하는 과정이다.
첨단 기술(High-Tech)에 조부모 세대의 아날로그적 지혜와 인간적 따뜻함(High-Touch)을 더하는 이 격대 교육은, 획일화된 입시 경쟁에 매몰된 아이들에게 삶을 바라보는 거시적인 안목과 인간적 품격의 의미를 깨닫게 할 최고의 인성 교육이 될 것이다.
현재 전 세계 미래 교육의 거대한 흐름은 ‘누가 더 많은 지식을 외우는가’에서 벗어나, 급변하는 기술 문명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인간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주도성(主導性)’ 교육으로 진화하고 있다.
따라서 2026학년도 우리 교육이 아렌트의 고전을 읽고 뼈아프게 사유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사유하지 않는 교육은 언제든 아이들을 시스템의 맹목적인 노예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의 품격은 멋진 태블릿 PC의 보급률이 아니라, 교실 안에서 얼마나 깊고 다채로운 질문들이 살아 숨 쉬는가에 달려 있다 할 것이다.
이제는 “공부해라, 좋은 등급(1등급)을 맞아야지”라는 낡은 주문으로 아이의 영혼을 묶어두는 어른이 되기보다, 일상에 지친 아이의 책상머리에 이 오래된 고전 한 권을 슬며시 놓아두며 “얘야,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해도 네 생각의 주인은 오직 너란다” 하고 다정하게 어깨를 다독여주는 진짜 멘토, 참 부모가 되는 건 어떤가?
알고리즘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스스로 사유하며 인생의 돛을 올리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빛 속에, 대한민국 미래 교육의 희망과 기적이 살아서 숨쉬기 시작할 것이라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