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에듀 | 인공지능과 입시 경쟁이 한꺼번에 뒤엉킨 시대, 학생과 학부모, 교사는 진로 앞에서 더 많이 흔들리고 있다. 이에 <더에듀>는 '좋은 대학'과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좁은 기준을 넘어 아이가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저자는 당장 꿈이 없어도 괜찮은 이유, 성적과 적성 사이의 간극, 문해력과 진로의 관계, 오래가는 능력과 직업 선택의 현실 등을 차분하게 짚어나간다. |
진로 특강을 다니다 보면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까요?" "어떤 직업이 좋아요?”
학부모도 마찬가지다. 당연한 질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간 질문을 떠올린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직업은 답이 아니라 수단이다. 무엇이 될지를 묻기 전에 어떻게 살지를 물어야 순서가 맞다. 진로란 결국 선택이고 모든 선택에는 방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방향은 어디서 오는가. 직업 목록에서 오지 않는다. 삶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 거기서 온다.
문제는 그 방향이 좀처럼 선명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성검사로도, 직업 카드로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방향이 가장 또렷해지는 자리가 하나 있다. 바로 ‘끝’을 생각할 때다.
나는 이 말을 책에서만 배운 게 아니다. 수의사로서 동물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일은 내 직업의 일부다. 오래 봐 온 동물일수록 그 끝은 더 괴롭고, 그 자리에 함께 선 보호자의 얼굴은 오래 남는다. 그렇게 여러 번 끝을 마주하다 보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또렷해지는 건 죽음이 아니라 삶 쪽이다. 어떻게 마무리되는지를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보인다.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 죽음을 앞둔 노교수가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 알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 된다.”
끝을 응시하면 비로소 지금이 보인다는 뜻이다.
오래전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의 한 대사를 메모해 둔 적이 있다.
“두려운 건 죽음이 아니라, 아직 살지 못한 삶이야.”
나는 여기에 한 줄을 보탰다. 죽음에 대한 성찰은 곧 삶에 대한 통찰이라고. 메멘토 모리, 언젠가 반드시 끝이 온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오늘 하루가 농밀해진다.
이 질문을 아이의 진로 앞에 가져와 보자. 삶의 마지막 순간에 명함이나 연봉, 합격증을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구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무엇으로 누구에게 보탬이 되었는지, 자기 기준대로 살았는지를 떠올린다. 직함은 빌린 것이고 끝까지 남는 건 그 직함으로 무엇을 했느냐다.
그러니 진로의 종착점은 직업이 아니다. 삶이다. 좋은 직업을 갖는 것보다 중요한 건, 그 직업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다.
내 답은 이렇다.
‘읽고 쓰고 말하며, 그렇게 길어 올린 것을 남에게 건네는 삶. 남이 정해준 기준이 아니라 내 기준으로 고르는 삶. 그리고 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농밀하게 사는 삶.’
수의사라는 직업도, 작가라는 두 번째 직업도, 따져보면 이 방향 위에서 고른 결과였다.
이제 아이에게 묻는 질문을 바꿔보면 어떨까. “커서 뭐가 될래”가 아니라 “어떻게 살고 싶어”라고. 전자는 직업 하나를 답하게 하지만, 후자는 평생 들고 갈 나침반을 쥐여준다. 직업은 살면서 몇 번이고 바뀌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끝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어른들은 한 번 뜨끔해야 한다. 정작 우리는 어떤가. 스스로에게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진지하게 물어본 적 없으면서, 아이에게는 ‘커서 뭐가 될 거냐’며 또렷한 답을 다그친다. 자기 인생의 방향조차 정하지 못한 어른이, 열 몇 살 아이에게 인생의 방향을 내놓으라 요구하는 셈이다. 진로를 못 정해 불안한 건 어쩌면 아이가 아니라 그 모습을 견디지 못하는 우리 자신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질문은 아이에게만 던질 게 아니다. 우리 자신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 답을 스스로 살아내고 있는 어른만이 아이에게 진짜 진로를 이야기해 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