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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진로] 일찍 진로를 정한 아이가 잃는 것

더에듀 | 인공지능과 입시 경쟁이 한꺼번에 뒤엉킨 시대, 학생과 학부모, 교사는 진로 앞에서 더 많이 흔들리고 있다. 이에 <더에듀>는 '좋은 대학'과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좁은 기준을 넘어 아이가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저자는 당장 꿈이 없어도 괜찮은 이유, 성적과 적성 사이의 간극, 문해력과 진로의 관계, 오래가는 능력과 직업 선택의 현실 등을 차분하게 짚어나간다. 

 

 

“우리 애는 벌써 진로를 정했어요.”

 

부러움이 묻어나는 말이다. 아직 갈피를 못 잡는 옆집 아이와 견주며, 일찍 길을 정한 내 아이를 대견해하는 부모가 많다.

 

나는 그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수의사가 되기로 정했다. 원서를 전부 수의대에 넣었고, 운 좋게 그 길로 들어섰다. 그 뒤로 마흔이 넘도록 오직 그 한 방향만 보고 걸었다. 좋은 수의사가 되는 것, 그 외의 것에 눈을 돌리는 건 사치라 여겼다. 낯선 분야를 기웃거리거나 진료와 무관한 걸 배우는 일은 시간 낭비 같았다. 한눈팔지 않는 내가 조금 자랑스럽기도 했다.

 

돌아보면 나는 잘 자란 나무가 아니라, 곁가지를 죄다 쳐내고 원줄기 하나만 남긴 나무였다.

 

 

그 대가는 마흔에 찾아왔다. 마흔이 넘어 나는 읽고 쓰기 시작했고, 작가라는 두 번째 삶이 열렸다. 그런데 그 길로 발을 딛는 순간 알았다. 뻗어나갈 곁가지가 내겐 하나도 없다는 것을.

 

젊은 날 책 한 권 제대로 안 읽었고 글 한 줄 안 써봤다. 새 삶은 완전한 맨바닥에서 시작해야 했다. 물론 새 길 앞의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다. 다만 곁에 남겨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그 두려움을 몇 배로 키웠다.

 

그렇다면 그 가위질은 누가 했을까. 처음 가지를 자른 건 대개 부모다.

 

“그건 대학 가서 해.”, “지금 그럴 때니?”

 

피아노를 끊고 학원을 늘리고, 만화를 그리는 아이에게 시간이 아깝다고 말한다. 전부 가위질이다. 더 무서운 건, 우리가 그 가위질을 자랑한다는 점이다. “우리 애는 딴 데 눈 안 팔아요”가 칭찬이 되는 순간이 바로 곁가지를 치는 순간이다.

 

그렇게 아이는 배운다. 당장의 진로에 도움이 안 되는 가지는 잘라야 한다고.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어른이 손대지 않아도 아이가 스스로 가위를 든다. 꼭 나처럼.

 

 

오해는 말자. 진로를 일찍, 확고히 정하는 게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좋은 일이다. 문제는 정한 길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 가지를 전부 잘라내는 데 있다. 원줄기는 깊고 굵게 키우되, 곁가지 몇 개는 살려두어야 한다.

 

이건 한 사람의 후회담 만은 아니다. 데이비드 엡스타인은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Range)』에서, 한 분야에 일찍 올인하는 조기 전문화보다 여러 갈래를 두루 맛보는 ‘표본 추출 기간’을 거친 사람이 길게 보면 더 멀리 간다고 말한다.

 

테니스 선수 로저 페더러가 어릴 적 스키·레슬링·농구·축구를 비롯한 여러 종목을 두루 거친 뒤 비교적 늦게 테니스에 정착한 것이 대표적이다. 일찍 하나만 남긴 아이가 잃는 건 바로 그 ‘두루 맛보는 시간’이다.

 

5편에서 말한 교차와 헷갈리지 말자. 그건 여러 강점을 어떻게 엮느냐의 문제였다. 지금 이야기는 그 이전이다. 엮을 재료가 애초에 남아 있느냐의 문제. 곁가지를 다 잘라낸 나무에는 엮을 가지 자체가 없다.

 

경제학자 토머스 소웰은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냥 선택안을 여러 개 제시할 뿐이다.”

 

그러고는 ‘경제학이란 그 선택안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의 하나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인생은 때가 되면 우리 앞에 선택안을 내민다. 그런데 곁가지를 다 잘라낸 사람에겐 그 선택안을 받아 뻗을 자리가 없다. 선택안이 와도 잡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른이 할 일은 분명하다.

 

첫째, 아이가 주력하는 진로 밖의 관심 하나쯤은 ‘시간 낭비’라 부르지 않는 것.

둘째, 일주일에 반나절만이라도 전공과 무관한 걸 해볼 여백을 남겨주는 것.

셋째, 아이가 곁길에 잠깐 빠지더라도 “그거 접고 하나만 제대로 해”라며 서둘러 자르지 않는 것.

 

무엇보다 그 가위를 먼저 내려놓아야 할 사람은 아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고 싶다. 우리는 아이의 곁가지를 걱정한다. 그런데 정작 당신의 곁가지는 지금 몇 개나 남아 있는가. 원줄기 하나만 남긴 채 사는 어른이 아이에게 곁가지를 남기라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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