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 두말할 나위 없이 교육은 미래를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민주)시민교육은 그 미래를 살아갈 주체를 세우는 일이다.
최근 국가교육위원회가 제시한 ‘학교 시민교육 국가기준안 원칙(案)’ 시안은 표면적으로는 교실 내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고, 편향되지 않은 균형 잡힌 시민을 양성하겠다는 원대한 목적을 품고 있다.
하지만 그 매끄러운 수식어를 한 꺼풀만 벗겨보면, 현장 교사들과 학생들의 목을 짓누르는 육중한 ‘지침의 바위’가 얹혀 있음을 보게 된다. 이 거창한 원칙의 본질은 무엇이며, 왜 이것이 우리 교육의 미래를 오히려 가로막을 수 있는 걸림돌이 될 위험을 안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시안의 핵심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정치적 중립성’의 엄격한 준수다. 교실 안에서 교사가 특정 정치적 견해나 사회적 쟁점에 대해 편향된 시각을 주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균형 있는 시각 제공’이다. 찬반이 대립하는 이슈를 다룰 때는 반드시 양측의 주장을 동등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셋째, ‘헌법적 가치의 존중’이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한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와 기본권을 교육의 최우선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언뜻 들으면 나무랄 데 없는 바른 생활 표어 같다.
“중립을 지키고, 양쪽 말을 다 듣고, 법을 지키자.”
이 완벽해 보이는 명제에 누군들 허튼 토를 달 수 있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와 ‘현장성’에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현재 제시된 원칙의 가장 큰 허점은 ‘갈등의 건강한 소화’ 대신 ‘갈등의 완벽한 회피’를 강요한다는 점에 있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비유해 보자. 여러분이 전국 맛집을 호령하는 미슐랭 3스타 셰프라고 가정해 보자. 어느 날 ‘국가요리위원회’에서 내려온 신규 지침서를 받게 된다.
“앞으로 순두부찌개를 끓일 때는 매운맛을 좋아하는 손님과 담백한 맛을 좋아하는 손님의 중립을 지켜야 하므로, 고춧가루 1g과 맹물 500ml의 비율을 정확히 맞춰야 합니다.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완벽한 무맛(No Taste)’을 구현하십시오. 어느 한쪽으로 맛이 기울면 ‘편향 셰프’로 징계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임을 단박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침을 받은 셰프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 맛있는 찌개를 끓이기 위해 고민하는 대신, 아예 순두부찌개 자체를 메뉴판에서 지워버리는 것이다. 괜히 찌개를 끓였다가 “고춧가루가 0.1g 더 들어갔다”며 신고당하느니, 차라리 안전한 맹물만 손님 테이블에 올리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지금 국교위의 시민교육 원칙이 학교 현장에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 ‘맹물 순두부찌개’다. 이런 비판에 누군가는 그럼 국교위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냐, 하고 나름 위원들의 노력에 의해 제출된 시안에 대해 너무 비판적인 것이 아니냐고 탓할지도 모르겠다.
토론하는 교실은 살아있는 사회적 이슈와 학생들의 솔직한 질문이 부딪히는 불꽃 같은 공간이어야 한다.
“선생님, 이번 선거 공약은 왜 그래요?”, “기후 위기 시위 때문에 도로가 막히는데 누구 말이 맞아요?” 등의 질문에, 교사는 “찬성도 있고 반대도 있으니 알아서 생각하렴”이라는 영혼 없는 답변만 남기고 돌아서야 한다면 이는 과연 교육이라 할 수 있을까?
‘정치적 중립’이라는 이름의 가위로 논쟁의 싹을 잘라버리면, 교실에는 건강한 토론의 열기 대신 ‘안전한 침묵’만이 맴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시민교육의 선진국이라 불리는 독일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은 1976년 보이텔스바흐 협약(Beutelsbach Consensus)을 만들었다. 이 협약의 핵심은 단순한 ‘중립’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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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교화(주입) 금지다. 교사는 학생에게 자기 의견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논쟁성 유지다. 학문과 정치 영역에서 논쟁적인 것은 교실에서도 똑같이 논쟁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학생 중심 분석이다. 학생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파악하고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대원칙이 있었다. |
독일의 원칙은 “위험하니 논쟁을 피하라”가 아니라, “사회에서 뜨거운 이슈라면 교실에서도 그 뜨거움을 그대로 느끼며 토론하라”는 적극적 민주주의 원칙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우리 국교위의 시안은 ‘논쟁의 기회’를 제공하기보다, 교사에게 ‘사법적 단죄의 공포’를 먼저 느끼게 한다. 교사가 논쟁적 주제를 꺼내는 순간 ‘편향 교사’라는 프레임이 씌워질까 두려워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시민교육 원칙이 아니라 교사 입틀막 지침에 불과하다.
민주주의는 깨끗하게 정돈된 유리관 속의 식물이 아니다. 비바람을 맞고, 서로 다른 의견이 부딪히며, 때로는 시끄러운 소란을 피우는 과정 속에서 자라는 거친 야생화라 할 수 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염되지 않은 무균실의 정답’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듣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며,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논쟁의 체력’이어야 한다.
학교가 이 체력을 키워주지 않는다면, 학생들은 졸업하자마자 유튜브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극단적 진영 논리의 바다로 아무런 면역력 없이 내던져질 것이다. 교실에서 정답만 배운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 마주할 현실은 정답이 없는 혼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기회에 국가교육위원회에 강력히 촉구하고자 한다.
교사를 ‘감시받는 연기자’로 만들지 말길 바란다. 교실을 ‘정치적 무풍지대’라는 이름의 사막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참된 시민교육 원칙은 교사의 입에 족쇄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마음껏 의문을 품고 질문할 수 있는 안전한 울타리를 만들어 주는 면책 특권을 강력하게 실현하는 것이다.
맹물 순두부찌개는 그 누구의 배도 채워주지 못할 것이다. 이제라도 우리의 교실에서도 진짜 사람 냄새 나는 토론의 불꽃을 지펴야 할 때라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