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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에듀 | 인공지능과 입시 경쟁이 한꺼번에 뒤엉킨 시대, 학생과 학부모, 교사는 진로 앞에서 더 많이 흔들리고 있다. 이에 <더에듀>는 '좋은 대학'과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좁은 기준을 넘어 아이가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저자는 당장 꿈이 없어도 괜찮은 이유, 성적과 적성 사이의 간극, 문해력과 진로의 관계, 오래가는 능력과 직업 선택의 현실 등을 차분하게 짚어나간다. |
동물병원에 오는 보호자들 중엔 반려동물을 자기 감정의 대리물처럼 대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외로우니 늘 곁에 붙어 있어야 하고, 내가 불안하니 잠시도 눈앞에서 사라지면 안 된다. 정작 그 아이가 무엇을 힘들어하는지는 뒷전으로 밀린다.
언젠가 노견을 떠나보내야 할 때가 온 보호자가 있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치료를 멈추지 못했다.
“얘가 없으면 내가 못 살아요.”
그 말은 분명 사랑이었다. 그런데 문장의 주어가 내내 ‘나’였다. 사랑이 어느새 내 결핍을 채우는 도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 장면이 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학부모들을 만나면 나는 같은 얼굴을 본다.
“제가 어릴 때 정말 하고 싶었는데 못 한 게 있어요. 우리 애가 그걸 해줬으면 좋겠어요.”
사랑이 담긴 말이다. 그런데 나는 매번 궁금해진다. 그 꿈의 주인은 대체 누구인가.
부모의 기대에는 사랑만 담기지 않는다. 내 불안, 내가 이루지 못한 것, 남들 앞에서 느낀 초조함이 슬그머니 함께 실린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라는 문장은 그 진짜 발신지를 자주 가린다.
진로 앞에서 이 마음은 ‘안정’이라는 얼굴로 온다. 공무원, 의사, 대기업...내가 불안하게 살았으니 너는 안전한 자리로 가라는 의미다. 말은 아이의 미래를 향하지만 앞선 것은 내가 겪은 불안이다. 그것이 아이가 정말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덮는 순간 기대는 사랑이 아니라 짐이 된다.
이건 내 짐작만은 아니다. 심리학자 에디 브루멜만 연구팀이 2013년 국제학술지 플로스원에 실은 실험이 있다. 부모가 아이를 자기 자신의 연장으로 여길수록, 자기가 이루지 못한 야망을 아이가 대신 이뤄주기를 더 강하게 바란다는 결과였다. 연구진이 논문에 붙인 제목이 서늘하다.
‘내 아이는 나의 부서진 꿈을 되찾아 준다.’
장면은 사소한 데서 드러난다. 누군가의 “넌 뭐가 되고 싶니”라는 물음에 아이 대신 부모가 답한다.
“얘는 어릴 때부터 이과 체질이었어요.”
집에서는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해놓고, 막상 아이가 밴드가 하고 싶다고 답을 가져오면 표정이 굳는다. 입은 열어두었지만 마음 속엔 이미 정답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이는 제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라 내가 못다 쓴 2막의 무대에 대신 세워진다. 칼릴 지브란은 『예언자』에서 아이는 부모를 거쳐서 왔을 뿐 부모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했다. 아이를 낳았다는 것과 아이를 가졌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다.
억지로 얹은 꿈의 끝을 우리는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부모가 원하는 학과에 떠밀려 들어가 겉도는 대학생. 졸업하면 부모가 안심하리라는 것 말고는 그 전공을 계속할 이유를 그는 하나도 대지 못한다. 한참을 헤맨 끝에 ‘나는 뭘 하고 싶었던 걸까?’ 돌아본다. 남의 꿈을 대신 사느라 정작 중요한 질문을 그제야 해본다.
여기서 고백을 하나 해야겠다. 내게도 어릴 적부터 품고 이루지 못한 꿈이 있다. 가수다. 얼마 전 나는 병원에서 열린 작은 음악회 무대에 섰다. 내 차례는 두 곡, 십 분이 채 되지 않았다. 객석에는 환자들이 있었고 노래가 끝나자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온전히 나로 있었다.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그 꿈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루지 못했기에 그 꿈은 아직도 나를 걷게 한다. 이루지 못한 꿈은 아이에게 떠넘길 짐이 아니라 나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연료다.
아이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말라는 게 아니다. 내려놓을 것은 기대가 아니라 불안해서 튀어나오는 그 말투다. 사랑에서 나온 기대인지 내 결핍에서 나온 기대인지 헷갈릴 때는 내가 하려는 말의 끝을 살펴보면 된다.
“이건 꼭 해야 한다”로 끝나면 대개 내 불안이고, “그걸 자꾸 해보고 싶어 하더라”로 끝나면 아이의 신호다.
그 마음을 한 발 물러서서 보면 그 자리에 여백이 생긴다. 아이가 제 진로를 스스로 발견할 자리다. 그 여백까지 부모가 메우려 들지 말자.
오늘 저녁 아이 책상 위에 놓인 그 문제집을 한번 보라. 그건 아이가 고른 것인가 내가 고른 것인가. 아이의 꿈은 아이가 꾸게 하면 된다. 그리고 내 꿈은 이제부터 내가 다시 꾸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