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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연의 초점] 광욕(狂慾)의 바벨탑을 쌓은 후과(後果)

 

더에듀 | 인간의 정신적·물질적 성취욕구는 자신의 발전은 물론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되어 왔다. 성경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바벨탑 사건은 인간의 발전 자체를 꾸짖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보다 인간의 욕망을 더 높이 쌓으려 했던 교만을 경고하는 영원한 교훈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흩어지기를 거부하고 한곳에 모여 “우리 이름을 내자”며 하늘에 닿는 탑을 쌓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적은 건축이 아니라 자기 영광이었다. 순종보다 명예를, 사명보다 성공을, 하나님보다 인간의 능력을 신뢰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계획을 멈추게 하셨다.

 

오늘의 시대에도 바벨탑은 형태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곳곳에서 세워지고 있다. 거대한 사업, 대규모 인수합병, 화려한 비전과 원대한 청사진은 결코 잘못이 아니다. 핵심은 그것을 받치고 있는 ‘기초 체력’과 ‘절차적 정당성’에 있다.

 

사업의 성패를 가르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은 정교한 자금 조달 구조와 엄밀한 설계 명세다. 이는 재무적 가시성과 실행 가능성을 담보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라 할 수 있다. 엄정한 자기 책임성, 견고한 재정적 자립도, 투명한 행정 절차, 그리고 냉철한 현실 인식이 부재한 목표 추구는 신앙이나 신의의 기념비가 아닌, 단순한 사적 탐욕의 구조물로 전락할 뿐이다.

 

자기자본 투입이 전무한 상태에서, 단지 자기자본비율 0%의 극단적인 레버리지(Leverage)에만 의존하여 대규모의 대형 자산을 인수하려는 시도는 경제학적으로 도덕적 해이이자, 실체 없는 사상누각(砂上樓閣)이자 신기루에 불과하다. 이는 최소한의 리스크 관리조차 부재한 상태에서, 명분만을 내세워 막대한 제3자 자본을 동원하려는 비대칭적 위험 추구 행위다.

 

성경 누가복음 14장 28절부터 30절에는 다음과 같은 경고가 나온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완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정확한 재무적 설계 없이 거창한 과업을 벌이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만용이며 도덕적 해이일 뿐이다.


선한 명분으로 포장된 무한한 탐욕


노인 빈곤층을 돕고, 미자립교회와 해외 선교사를 구제하겠다는 명분은 그럴듯하고 숭고해 보인다. 그러나 목적이 아무리 화려할지라도 과정의 실체와 수단이 정당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선행이 아니라 탐욕을 위장하기 위한 가면일 뿐이다.

 

불경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서는 마음속의 헛된 욕망과 착각에 대해 이렇게 설한다.

 

“모든 중생이 갖가지 그릇된 집착으로 인하여 헛된 환상을 짓고, 그것을 진실이라 믿으며 스스로 얽매여 괴로움을 자초한다.”

 

자기자본 없이 남의 돈과 거대한 부채에 의존해 대형 자산을 취득하려는 행위는 불교에서 말하는 ‘아귀욕(餓鬼慾)’의 또 다른 단면이다. 아무리 먹어도 배고픔을 면하지 못하는 아귀처럼, 거룩한 명분을 핑계 삼아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거대한 욕망을 채우려 하는 것은 종교적 자비나 사랑의 정신에 정면으로 반한다.


수단이 정당하지 않은 목적은 유죄다


원래 자본 시장에서는 돈이 벌리면 지옥이라도 찾아가는 게 기업이다. 침착하고 냉혹한 수익 계산 없이는 단 1원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자본의 생리다. 하물며 금융에 대한 전문적 식견이나 최소한의 자기자본조차 갖추지 못한 채, 원로 성직자라는 고유의 지위와 권위에 의존하여 대형 자산 인수를 추진하는 것은 자본 시장의 기본 질서를 무시한 무모한 도박에 지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8절에서 “선(善)을 이루기 위하여 악(惡)을 행하자”고 말하는 자들의 부당함을 강하게 지적하며, 그들이 받을 심판이 정당하다고 짚었다. 좋은 목적이 과정의 무책임함이나 기만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인생 팔십(산수(傘壽, 80세)의 연배는 치기 어린 객기를 부릴 시기가 결코 아니다. 내실 없는 욕망으로 무모한 사업을 벌이는 것은 미완의 집착인 노욕(老慾)이자 노추(老醜)일 뿐이다.

 

탄자니아 응고롱고로(Ngorongoro) 분지의 사자들은 고립된 생태계에서 근친교배를 거듭하다 결국 유전적 열성화와 면역력 결핍으로 집단적 위기를 맞이했다. 마찬가지로 비판적 검증과 건전한 견제가 부재한 조직 역시 폐쇄성과 자만 속에 자멸의 길을 걷게 된다.

 

이처럼 생물학적으로 예견된 자멸의 과정에서, 직언을 포기하고 침묵으로 일관한 참모들의 ‘한선(寒蟬, 추운 가을의 매미처럼 입을 다무는) 현상’ 역시 리더의 독주와 파멸을 방조한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는 직언을 통한 리더십 견제라는 참모 본연의 책무를 저버린 ‘직언 없는 공범’으로 형사법상 ‘부작위(不作爲)에 의한 공범 행위’이다.


진정한 선행은 스스로를 비우는 것에서 시작된다


진정한 구제와 선교는 거대한 건물이나 외형적인 세력 확장에서 나오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을 행할 때 스스로를 낮추셨고, 과부의 두 엽전을 가장 큰 헌금이라 칭찬하셨다. 외형의 거대함이 아니라 진실한 희생과 책임감이 핵심이라는 뜻이다.

 

부처님 역시 《금강경(金剛經)》을 통해 “상(相)에 사로잡혀 보시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내가 선한 일을 한다’는 자랑과 거창한 명분에 사로잡힌 순간, 그 보시는 공덕이 아니라 사사로운 집착으로 변질된다. 이는 법정 스님이 강조한 무소유(無所有)의 가르침과도 궤를 같이한다.

 

자기자본 1원도 없이 천문학적 자산을 탐내는 것은 신앙의 이름으로 행하는 거대한 착각이자 위험한 과욕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거창한 인수 계획이 아니라, 자신의 무모함을 직시하고 스스로를 비워내는 참회와 솔직함이다.

 

바벨탑은 지금도 우리에게 묻고 있다.

 

“네가 쌓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면 자신의 이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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