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윤철순 기자 | 학교에서 대통령의 정책이나 선거, 노동·젠더·환경처럼 사회적으로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는 문제를 수업에서 다뤄도 될까.
국가교육위원회가 내놓은 답은 ‘피하지 말고 가르치되, 하나의 답을 주입하지 말라’는 쪽에 가깝다. 정치적 중립성을 이유로 논쟁적 현안을 교실 밖으로 밀어내기보다 다양한 자료와 관점을 제시하고, 학생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논쟁 자체를 교육의 기회로 삼자는 것이다.
국교위가 전날 최종 확정한 ‘학교시민교육 기본원칙’의 핵심이다. 다만 원칙대로 수업한 교원이 정치적 편향 등의 민원이나 분쟁에 휘말렸을 때 실제로 어디까지 보호받을 수 있는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국교위도 구체적인 판단기준과 보호장치는 교육부·교육청과 후속 제도화해야 할 과제로 보고 있다.
50년 전 독일의 질문…“논쟁적인 것은 논쟁적으로”
이번 기본원칙을 이해하는 열쇳말 중 하나는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합의(Beutelsbacher Konsens)’다. 1976년 당시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정치교육 전문가들이 독일 보이텔스바흐에 모여 정치교육의 공통 기준을 논의했다.
이후 정리된 원칙은 크게 세 가지다. ▲교사가 학생에게 특정 견해를 주입해 자율적 판단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강압·교화 금지’, ▲정치와 학문에서 논쟁적인 사안은 수업에서도 논쟁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논쟁성 원칙’, ▲학생이 정치적 상황과 자신의 이해관계를 스스로 분석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중요한 건 보이텔스바흐 합의가 법률이나 정부의 행정명령으로 출발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당시 서로 다른 정치교육 진영이 공교육에서 적어도 ‘이것만은 지키자’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최소한의 교육원칙에 가까웠다. 국교위도 이번 기본원칙을 만드는 과정에서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참고했다. 다만 그대로 가져오지는 않았다.
국교위 관계자는 18일 <더에듀>와의 통화에서 “보이텔스바흐는 주로 원칙인데, 독일의 50년 전 상황과 지금 우리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며 “방법론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이번 기본원칙에는 시민교육에서 가르쳐야 할 내용적인 요소를 명시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기본원칙에는 헌법의 가치와 원리뿐 아니라 △민주사회의 덕목 △자유의 한계와 책임 △진실 추구와 디지털 시민성 △혐오·차별과 극단주의 배격 등이 담겼다.
국교위는 특히 한국 현실을 고려해 “교원 보호나 교사와 학생이 교실에서 안전하게 시민교육을 할 수 있는 부분에 중점을 뒀다”고 강조했다.
정치적 중립=침묵?…국교위 “그런 의미 아니다”
이번 기본원칙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정치적 중립성’과 ‘논쟁적 교육’을 대립하는 개념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교육기본법 제6조는 교육이 정치적·파당적 또는 개인적 편견을 전파하는 방편으로 이용돼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다.
이번 원칙도 이를 바꾸지 않는다. 대신 사회적으로 견해가 나뉘는 사안은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면서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고, 논쟁성 자체를 학습의 기회로 활용하도록 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에서 발생하는 시의성 있는 공적 사안도 교육활동 주제로 적극 다루도록 했다.
그렇다면 이번 기본원칙은 정치적 중립성을 이유로 논쟁적 사안을 피하는 게 아니라, 중립성을 지키면서 적극적으로 다루라는 방향으로 이해해도 될까. 국교위 관계자는 <더에듀>의 이 질문에 “맞다”고 답했다.
이 관계자는 “정치적 중립은 교육기본법에서 정하고 있는 대원칙이기 때문에 그것을 깨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그 원칙 아래 교실에서는 다양한 자료와 관점을 제시하면서 시의성 있는 주제와 견해가 갈리는 주제를 많이 다뤄 시민교육을 활발하게 하라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왜 이런 원칙이 필요했는지도 덧붙였다. 국교위는 “선생님들이 민원 때문에 이런 부분들을 회피해 오고 그냥 안 해버리고 마는 문제의식을 많이 이야기 했다”고 덧붙였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방법을 ‘논쟁하지 않는 것’에서 찾는 대신, 서로 다른 관점을 제대로 보여주고 학생의 판단을 보장하는 방식에서 찾겠다는 것이다.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합의가 정치교육에 던졌던 질문과 맞닿는 대목이다.
모든 걸 ‘찬반 토론’하라는 뜻도 아니다
논쟁성 원칙에는 또 하나의 경계가 있다. 헌법·법령과 국가교육과정 등에 따라 명확하게 교육해야 할 사안과 사회적으로 견해가 나뉘는 사안을 같은 방식으로 다루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기본원칙은 혐오와 차별, 폭력이나 극단적인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극단주의 등을 배격하도록 가르칠 것을 명시했다.
보이텔스바흐 합의 역시 모든 주장을 똑같은 가치로 취급하라는 ‘무조건적 중립’ 원칙으로 해석되지는 않는다. 독일에서도 민주주의와 인권, 헌정질서라는 가치적 기반과 논쟁성 원칙을 어떻게 함께 구현할 것인지가 정치교육의 중요한 문제로 다뤄져 왔다.
문제는 실제 교실에서 경계가 언제나 명확하지 않다는 데 있다. 어떤 사안까지 다양한 견해가 정당하게 존재하는 ‘논쟁적 사안’이고, 어떤 사안부터 명확하게 교육해야 할 문제인지 판단이 엇갈릴 수 있다.
‘누가 그 경계를 판단하느냐’는 <더에듀>의 질문에 관계자는 “이번 기본원칙은 큰 차원에서의 방향이자 최소한 지키자는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구체적인 학교 적용 기준은 앞으로 교육부·교육청과 협의해 가이드라인 등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원 보호” 넣었지만…실제 면책은 아직
더 큰 문제는 교원 보호다. 기본원칙은 교원의 정당한 학교시민교육 활동을 관련 법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민사·형사·행정상 책임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보호한다는 원칙을 담았다. 그러나 기본원칙 한 문장만으로 새로운 면책권이 생기는 건 아니다.
국교위 관계자도 이 한계를 인정했다. 그는 “면책이 되려면 법률에 근거해야 한다”며 “원칙이 고시가 될지 훈령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교육부가 어떤 형태로 제도화할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밝혔다.
국교위가 해당 보호원칙을 넣는 과정에서 법제처의 법적 자문도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법률의 훈령이나 고시에서도 이런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자문을 받아 상징적으로라도 넣었다”며 “실질적으로 작동하려면 법률에 상향 입법돼야 한다”고 했다.
현행 교원지위법에는 교육활동 침해를 당한 교원에 대한 보호조치와 교육활동 관련 분쟁 조정 등의 제도가 이미 존재한다.
그러나 학교시민교육 기본원칙에 따라 정치·사회적 논쟁을 수업한 교원이 정치적 편향 등을 이유로 민원을 받았을 때 무엇을 ‘정당한 학교시민교육’으로 볼 것인지, 기본원칙 확정 전과 비교해 어떤 보호절차가 새롭게 작동하는지는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다.
국교위는 교원단체에서도 실제 작동을 위해 교육청 차원의 보호기구나 기존 민원제도와 연계한 추가 장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다며 “현장 적용에 필요한 조치는 교육부와 교육청이 협의해서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7개월 논의 끝 ‘최소 합의’…이제 교실에서 작동할 차례
이번 기본원칙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국교위 민주시민교육 특별위원회가 약 7개월간 논의했고, 온라인 국민의견수렴과 국민참여위원회 토의, 부산 현장토론 등을 거쳤다.
지난 8월 제8차 회의에서 기본원칙안을 심의·의결한 뒤에도 교원단체와 현장 의견 등을 반영해 일부 표현을 손질했다. 국교위에 따르면 학생의 자치활동과 안전한 참여에 관한 의견, 편향성 논란을 줄이기 위한 표현 수정 등이 반영됐다.
전날 제10차 회의에서는 이 같은 문구 조정을 거친 최종안이 보고되면서 기본원칙이 확정됐다. 국교위 관계자는 국교위 내부에서도 서로 다른 성향의 위원들이 함께 논의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여야가 모두 ‘이런 정도는 시민교육을 할 때 지켜야 한다’고 합의한 것에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며 “각자가 주장하는 것을 다 반영하면 합의가 안 되기 때문에 같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끌어내 한 발짝이라도 간 다음 발전시키자는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50년 전 보이텔스바흐에서 나온 합의 역시 모든 정치교육 논쟁을 끝낸 완성된 규칙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입장 속에서도 공교육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원칙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한국도 이제 비슷한 질문 앞에 섰다. 논쟁을 피하는 것으로 중립을 지키는 교실에서, 논쟁을 논쟁답게 가르치면서 중립을 지키는 교실로 갈 수 있을까.
국교위가 원칙은 세웠다. 이제 그 원칙대로 가르친 교원을 누가, 어떤 기준과 제도로 보호할 것인지가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