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교사의 눈 - 고교학점제] “너는 기준 미달이야”

  • 등록 2025.10.20 14: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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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성취수준보장제’의 폭력

더에듀 | 올해 고1 대상 전면 도입된 고교학점제에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새 정부도 이 같은 문제의 인식 속에 몇몇 대책을 내놨지만, 이 또한 논란에 빠지면서 가야 할 길이 험난한 상황이다. 국회는 국정감사를 맞아 고교학점제에 대한 집중 검증에 나서는 등 대책 마련에 분주한 상황이다. 이에 <더에듀>는 교사노맹 소속 교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고교학점제가 현장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 살피면서 교사들의 주장을 확인하고자 한다.

 


따뜻한 이름, 차가운 현실


‘최소성취수준 보장제’(최성보)라는 제도는 이름만 보면 따뜻하다. 학생 한 명이라도 더 책임지고, 학습 결손을 메워주겠다는 약속으로 들린다.

 

그러나 교실에서 제도는 전혀 다른 얼굴로 작동한다. 일단 지도 대상자로 강제 선정된 학생의 자존감은 무너진다. 교사는 낙인에 상처받은 학생을 달래는 대신 이수 여부를 체크하고, 보충학습 클릭 여부를 확인하는 행정노동에 매달려야 한다. 수업의 목표는 배움이 아니라 이수 처리가 된다.

 

학업 수준이 매우 낮은 학생들의 원인은 학업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학업에 대한 의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유로 학습과 학교생활에 대한 의지를 잃은 학생들은 대다수 과목에서 낮은 성취도를 보이고 있다. 등교일도 들쑥날쑥해서 대다수 과목에서 출석률도 부족하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에게 각 과목마다 보충 지도를 받으라며 과제물과 계획표를 내밀고 방과후에 남을 것을 요구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제도는 ‘책임교육’을 말하지만, 실상은 이처럼 학교에 오는 것조차 도전인 학생들을 더욱 학교 밖으로 밀어내는 부작용만 초래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가 강행된다면, 놀랍게도 완벽하게 운영되고 있을 것이다. 매년 교육부는 모든 학생이 최소성취수준을 달성했다며, 졸업학점을 이수했다며 자화자찬하는 성과 보고서를 공개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학업 중단 위기를 겪는 학생들의 등교 거부와 자퇴, 졸업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교사들이 고뇌한 결과일 뿐, 교육부의 통계 한켠을 채우는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 자명하다.

 

완벽한 결과는 교사들이 수업과 일상의 학생 지도에 투자해야 할 시간과 노력을 빼앗겼음을 의미할 것이다.


자격 통제 장치로 전락한 제도의 폭력


최성보의 문제는 단순히 운영상의 난맥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겉으로는 하위권 학생을 챙기고 ‘기초학력 보장’이라는 이름으로 따뜻한 포장지를 입혔지만, 그 속에는 결국 학생들을 오로지 성적만을 기준으로 ‘수준 미달’로 낙인찍는 위선이 자리 잡고 있다. ‘최소성취수준’이라는 말 자체가 폭력이다. 이 말 속에는 ‘너는 기준 미달’이라는 선 긋기가 숨어 있다.

 

‘최소성취수준’은 학력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격을 통제하는 장치이다. 각 교과가 제시한 ‘최소 성취 기준’은 마치 공교육을 마친 사람이라면 반드시 넘어서야 할 문턱처럼 규정된다. 일부 과목의 출결 일수나 교과 성적의 부족함이 청소년기 학생의 졸업을 막는 사유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은 학생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 위협에 가깝다.

 

‘최소성취수준’은 ‘보장제’로 작동하지 않는다. 교사는 서류를 채우고, 학생은 자리만 지키거나 마우스를 클릭하며 이수학점의 숫자만 채우게 된다. 성장을 기록하는 게 아니라, 제도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한 데이터만 쌓인다. 학생 각 개인이 처한 삶의 조건은 철저히 무시된다.

 

이 제도는 학습을 돕지 않는다. 교사와 학생 모두를 소모시키는 가짜 노동의 굴레로 빠뜨리고 있을 뿐이다.

 


차별을 제도화하는 시스템


‘최성보’는 스스로 차별을 제도화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철학적 빈곤을 드러낸다.

 

특수교육 대상 학생은 현실적으로 동일한 기준을 적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최성보 운영이 강제되지 않는다. 해당 학생들은 어차피 ‘최소성취수준’을 달성할 수 없고, 그래도 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 학생은 도달할 수 없는 존재로, 비장애 학생은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존재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인간 가치의 다양성과 평등을 부정한다.

 

비장애 학생이 가정환경이나 정서적 문제, 생계나 돌봄 등 현실적 이유로 수업 참여가 어려운 경우에는 ‘성취수준 미달’로 규정되지만, 특수학생은 “그럴 수 있다”고 간주된다.

 

이 차이는 지원의 기준이 ‘상황’이 아니라 ‘신체적 구분’에 따라 정해진다. 제도는 학생의 어려움을 삶의 조건에 따른 맥락 속에서 이해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특수학생에게도 최성보를 다시 적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학생에게 적용이 불가능한 제도라면, 그 제도 자체가 교육의 철학과 인간 존엄의 평등을 포용하지 못하는 폭력적 장치임을 증명하는 셈이다.

 

‘최성보’는 어떤 학생에게는 무의미하고, 어떤 학생에게는 상처가 되며, 결국 모두에게 불평등하게 작용한다. ‘보장’이라는 이름으로 구분을 강화하는 제도는, 누구도 온전히 포함하지 못한다.


진짜 책임교육의 출발점


책임교육은 ‘최소 기준’이 아니라 ‘최대의 존중’에서 시작된다. 각자의 속도와 조건을 인정하는 것, 실패를 배움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게 교육의 본질이다.

 

시험 점수 0점을 받은 학생이라도 친구들에게 선한 영향을 주고, 사회와 가정에서 자기 몫을 다하며 살아간다면, 그는 이미 충분히 성취한 사람이다.

 

반대로 수많은 ‘최고 성취자’ 엘리트들이 온갖 범죄와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정의를 훼손하는 소식을 매일 접한다.

 

‘대체 누가 ‘최소성취수준’을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점수의 높낮이가 인간의 가치를 재단할 수 없다면, ‘최소’라는 이름의 기준 또한 교육의 언어로 존재해선 안 된다. 최성보는 사회로 나가 충분히 제 몫을 하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학생들에게 너는 졸업할 자격도, 사회에 나갈 자격도 없다며 가혹하게 다그치라고 말하고 있다.

 

교육부는 보충지도시 학생들이 낙인찍히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했다. 하지만 제도 그 자체가 가장 확실하게 학생들에게 낙인을 찍는 악법으로 기능하고 있다. ‘최성보’는 결국 교육의 다양성과 자율을 말하는 설계자들과 교육부조차 기존의 성적 중심 사고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일 뿐이다. 이 제도의 실패는 준비 부족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와 존중의 결여에서 초래된 현실이자 정해진 미래이다.

 

공교육은 높은 문턱을 세우고 까다롭게 심사하는 감시자가 아니라, 다양한 학생이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공적 시스템으로 기능해야 한다.

 

성장은 일률적 기준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출발선에서 조금씩 나아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공교육이 다시 살아나려면 기준선을 그어 학생을 줄 세우는 대신, 각자 처한 삶의 조건 그리고 나아가는 길의 속도와 방향을 존중하는 문화부터 회복해야 한다.

 

교육은 ‘최소성취수준’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보장해야 한다. 제도는 인간을 나누지만, 교육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기준이 아니라 관계이다.

이정열 부산교사노조 중등부위원장 te@t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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