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 공교육은 입시와 경쟁, 시험, 서열 등으로 아이들의 생각과 삶을 단단하게 고정해 놓고, 삶 자체를 좋은 성적,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이라는 정해진 트랙 위에서 움직이게끔 한다. 이 트랙을 성실하게 달리는 사람에겐 모범 학생이라는 훈장을 준다. 그런데, 울산 최초의 공립 대안중학교인 울산고운중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순응적이고 수동적인 삶을 넘어 저항적이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양한 시도들을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철학 수업을 통해 아이들에게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과 삶에 대한 사색의 의미를 알려준다. 이에 <더에듀>는 아이들이 자유롭고 비판적인 사유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꾸려가는 데 도움을 주는 박상욱 철학교사의 수업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는 “교육이 경쟁과 입시로부터 자유로울 때 아이들의 철학적 사유는 더욱 풍요로워지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더욱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

‘나를 온전히 안다는 것이 가능할까?’
잘 생각해 보면, 나라는 존재는 생각과 물질로 이루어진 생물학적, 문화적, 철학적, 사회적, 경제적 구조의 집합체에 가깝다. 그렇기에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
미시세계 속에서 내 몸의 세포는 초 단위로 사라지고 생성된다. 하물며 생각은 더 말할 것도 없어 보인다. 이렇게 시시각각 변해가는 나라는 존재 속에 있는 동일하고 변치 않는 자아를 찾아가는 것이 곧 데카르트가 시작한 근대적 기획이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거대한 질문 앞에 서면 대부분의 어른은 생각도 하기 전에 포기하고 회피한다. 그것이 결코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르더라도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
‘오늘날 인공지능이 초래된 인간 존재의 위기, 정체성의 위기는 이러한 질문을 회피해 온 결과가 아닐까?’
내가 사라진 삶의 공간은 무한한 공허만이 자리할 뿐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르다. 아이들은 스스로 답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도 거리낌이 없다. 오히려 놀이처럼 자유롭게 질문을 가지고 노닌다. 틀이 없는 질문에 대해 더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한다.
아이들은 상식과 편견이라는 딱딱한 틀이 아니라 평평한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연결짓고 창조하며 새로운 탈주선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특성이야말로 아이들에게 철학이 필요한 이유이자, 아이들이 철학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일 것이다.

이번 수업에서 민성이는 소설 『마크 Mark』를 읽다가 ‘나를 알려면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까?’라는 질문을 제안했다.
이 질문을 처음 제안했던 민성이는 “타인의 평가 없이 나에 대해 온전히 아는 것은 힘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민성이의 말은 소설 속 마크가 했던 말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유진이는 타인의 이야기는 그들의 생각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타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떠드는 사람들도 많다고 말했다. 대표적으로 인터넷 상의 악플러를 예로 들었다. 타인의 이야기에 너무 집착하면 오히려 나에 대해 더 모르게 될 수도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나는 너무나 멋진 토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미드(George H. Mead)는 우리의 자아가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이미 미드의 자아 이론 속에서 자유롭게 노닐고 있었다.
유진: 왜 나를 알기 위해 타인을 이야기를 들어야 하지? 타인과 나는 다르잖아. 민성: 타인에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지. 부모님도 타인이잖아. 나: 민성이의 말은 우리가 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는 거야? 민성: 맞아요. 타인의 성격이나 모습이 나에게도 영향을 줘요. 나: 다른 사람이 예를 들어볼 수 있을까? 아름: 음.... 주윤: 엄마가 잔소리가 많아요. 그래서 저도 동생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예성: 저는 원래 게임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게임을 좋아하는 친구와 놀다 보니 저도 게임을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민성: 넌 원래 좋아하잖아. 예성: 아니야!! |
자유주의자에 대한 공동체주의자들의 비판 중 하나는 우리의 자아가 진공 속에서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특정한 가족, 사회, 문화적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을 통해 자아는 형성되어 간다. 그렇기에 서로 다른 문화적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들은 당연히 성격이나 취향, 관심사, 가치관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자아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속한 공동체를 떠나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민성이의 주장은 공동체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자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논쟁이 계속 평행선을 그으며 이어지자, 나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겠다고 결심했다.
나: 도대체 나를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내가 나를 모를 수도 있을까? 주윤: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거요. 준이: 감정이나 습관, 성격 같은 것 아닐까요? 유진: 욕망도 있어요.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이요. 민성: 겉모습도 있죠. 성별이나 외모 같은 거요. 나: 외면과 내면을 모두 알아야 한다는 거구나. 지성: 그런데 객관적으로 알 수는 없어요. 그냥 내가 생각하는 나... 민성: 그러니깐. 타인이 필요한 거예요. 나를 평가하는 기준은 타인에서 오는 거예요. 그래야 객관적이죠. 주윤: 성격이나 감정 같은 것은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생기는 것 같아요. 나: 후천적으로? 주윤: 교육을 통해서요. 유진: 저는 다르게 생각해요. 타인과 관계없이 고유하게 가지고 태어나는 것도 있다고 생각해요. 민성: 그런 게 있다고? 유진: 내 욕망이나 감정은 가지고 태어나는 거라고 생각해요. 후천적인 배움이나 경험 은 단지 영향은 줄 수 있지만, 그게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아요. 나: 좀 더 근거나 예시를 들어봐 줄 수 있을까? 유진: 잘 생각해 봐요. 아기들도 다 다르잖아요. 어떤 아기는 조용하지만 어떤 아기는 활발해요. 그거예요. 지성: 아기들은 뭘 배우는 전이니깐. 분명 서로 다른 것을 가지고 태어날 수도 있겠네. 유진: 맞아. 그게 고유한 나를 형성하는 거예요. 승우: 그게 나라고? 그건 그냥 태어난 성격(?) 같은 거지. 그건 나의 1%도 안 되다고 생각해요. 민성: 맞아. 지금 우리에게 아기 때의 감정이나 습관이 거의 남아있지 않잖아. 유진: 잘 생각해 봐. 고유한 나가 처음부터 없었다면 타인의 영향을 받는 나는 어떻게 생기는 건데? 민성: 응? 그게 무슨 말이지? 지성: 타인의 영향을 받아서 나라는 것이 생기는 거라고 했잖아. 근데 그 타인의 영향을 받는 나라는 것은 처음부터 있어야 하는거 아닐까? 나: 유진이는 말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엇인가가 생기지는 않는다는 거지? 유진: 맞아요. 최소한의 고유한 나라는 것은 있어야 한다고 봐요. |
꽤 긴 공방이 이어졌다. 이런 방향으로 논의가 이어질 줄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민성이는 자아란 타인의 영향을 받아서 구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해 유진이와 지성이는 그렇지 않았다. 타인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고유한 나라는 것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진이는 타인의 영향을 받을 수는 있지만, 처음부터 ‘고유한 나’라는 존재가 없다면 ‘나’라는 자아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태어날 때부터 어떠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면에서 플라톤에서 데카르트로 이어지는 본질주의의 흐름 위에 서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고유한 본질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이다. 이는 경험주의자들이 근대 합리주의자들에게 하는 중요한 반론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본질, 이성의 원천은 무엇인가? 아이들 역시 이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나: 타인과 독립된 고유한 나는 존재한다는 거구나. 준이: 그러면 그 고유한 나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건데요? 유진: 그건 모르지. 승우: 아무도 몰라. 지성: 유전자 같은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민성: 그럼 그 유전자도 부모에게서 오는 거잖아. 주윤: 그럼 타인의 영향을 받는 거지. 아름: 하지만 부모와 전혀 다른 성격을 아이도 있어요. 예성: 우연 같은 것일까? 나: 고유한 나는 우연의 결과라는 말이니? 예성: 그럴 수도 있어요. |
고유한 나의 본질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참 쉽지 않은 질문이다.
플라톤은 이에 대해 이데아라는 단순한 답변으로 무마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아무도 모른다’라는 답변부터 유전자와 우연이라는 대답까지 나아간다.
나는 특히 이 ‘우연’이라는 답변에서 굉장히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나라는 것이 결국 우연의 산물이란 말인가? 아마 다윈이라면 그렇게 답변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인간의 진화는 돌연변이와 우연의 산물이니 말이다.
아이들도 이 우연이라는 말이 재미있었는지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준이: 우연이 나를 만들고 타인을 통해 변화되어 간다는 것인가? 민성: 신이 나를 만들 수도 있지. 아름: 신까지 가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없어. 예성: 신이 우연을 만들고 우연이 나를 만들고 나는 타인에게 영향을 주고...그렇게 타인은 바뀌고... 지성: 그 바뀐 타인은 다시 나에게 영향을 주고? 유진: 그게 뭐야?! 승우: 몰라. 머리 아파. 나 몰라! |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아이들은 지금까지의 내용을 종합하기 시작했다.
우연과 본질 사이의 개념적 절벽에 다가서면서도 아이들은 사유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는 일은 아이들에게 일종의 놀이이다.
‘인간에서 고유한 본질이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아포리아 즉 해결 불가능한 철학적 난제에 이르러 대화는 새로운 전환을 맞는다.
논리 구조들이 더 이상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지 못한다. 단지 다양한 개념들과의 순환 속에서 유쾌한 농담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불합리로의 귀결’은 잘못된 토론의 결론일까? 아동기 철학자 케네디(David Kennedy)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그는 이러한 종합과 요약이 변증법적 사유가 지향하는 미적 균형과 조화라고 말한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새로운 대화의 리듬, 유희, 만족, 균형, 순환을 꿈꾼다. 그것이 비록 불완전하게 좌절할지라도 말이다.
준이에서 지성으로 이어지는 대화의 흐름은 리듬이 점점 더해져 새로운 음악으로 만들어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렇듯 철학적 대화는 단순한 논리적 전개 그 이상이다. 그것은 리듬감 있고, 극적이며, 모방적이고, 시적이며, 유희적인 것들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교실을 철학적 탐구공동체로 전환한다는 것은 새로운 예술의 형식, 공연의 무대를 만들어 낸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