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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에듀 | 공교육은 입시와 경쟁, 시험, 서열 등으로 아이들의 생각과 삶을 단단하게 고정해 놓고, 삶 자체를 좋은 성적,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이라는 정해진 트랙 위에서 움직이게끔 한다. 이 트랙을 성실하게 달리는 사람에겐 모범 학생이라는 훈장을 준다. 그런데, 울산 최초의 공립 대안중학교인 울산고운중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순응적이고 수동적인 삶을 넘어 저항적이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양한 시도들을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철학 수업을 통해 아이들에게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과 삶에 대한 사색의 의미를 알려준다. 이에 <더에듀>는 아이들이 자유롭고 비판적인 사유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꾸려가는 데 도움을 주는 박상욱 철학교사의 수업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는 “교육이 경쟁과 입시로부터 자유로울 때 아이들의 철학적 사유는 더욱 풍요로워지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더욱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
우리가 학교에 들어와 처음 배우는 것 중에 하나는 ‘맞고 틀림’,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떤 문제에 대해 정답과 오답을 구분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곧 수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수업에서 무엇이든 틀리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다. 왜냐하면 정답을 많이 선택할수록 더 우수한 학생, 더 뛰어난 인간으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서 오답은 멀리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태도는 타인을 대하는 태도로도 이어진다. 상대방의 말을 ‘맞고 틀림’, ‘옳고 그름’으로 규정하고 평가하려 드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신의 말이 맞는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이는 곧 내가 상대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모든 문제에 대한 응답을 ‘맞다’, ‘틀리다’로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A는 좋은 사람일까?’, ‘한국은 정의로운 사회일까?’ 등과 같은 질문들만 보더라도 명확한 정답이 존재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자신의 의견이 곧 정답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옳고 상대방이 틀리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우월한 존재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며 갈등과 폭력, 극심한 분열로 이어진다. 지금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분열, 전쟁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관점에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철학적으로 볼 때, ‘옳고 그름, 맞고 틀림’의 문제는 간단하게 정리되기 어렵다.
대표적으로 게티어(E.Gettier)라는 학자는 진리의 조건이 ‘정당화된 참된 믿음’이라고 말한다. 옳음, 참, 정답이라는 것은 특정한 조건 속에서 정당화된 믿음일 뿐, 절대적 근거나 기반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윤리적 문제나 예술적 문제뿐만 아니라 과학적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근의 신유물론이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 등에 의하면 과학적 지식 역시 그 시대의 수많은 행위자 간 상호작용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맞고 틀림, 옳고 그름’의 문제가 절대적이지도 않고, 변화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면 이러한 구분에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이 기준에 집착하기보다는 내 눈에 서 있는 동료, 친구, 타인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파머(P.Palmer)는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진리는 옳고 그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오늘 수업에서는 내가 쓴 철학 소설을 읽고 토론을 시작했다. 소설은 우정에 관한 내용이었다.
소설 내용 중에 주인공 훈이의 친구인 바름이가 수업에서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있었다. 훈이는 다른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그건 틀린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바름이는 내심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이 장면을 함께 읽고 아름이가 토론 질문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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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 맞으면 맞다, 틀리면 틀렸다고 하는 것이 나쁜 것일까요? 그런 경우도 있어요? 교사: 왜 그런 질문을 생각했니? 아름: 상대방의 말이 틀렸다고 하면 종종 기분 나빠 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저도 그래요. 아무리 내가 틀리게 말했어도, 그걸 막 지적하면 기분 나빠요. 실제로 틀린 게 맞는데도 불구하고 기분이 나쁘거든요. 그럼 제가 잘못한 걸까요? |
아이들은 아름이의 질문에 호기심을 보였다. 그 외에도 많은 질문이 제안되었지만, 오늘은 아름의 질문으로 토론해 보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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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윤: 맞고 틀리다는 것은 개인의 의견이니깐. 기분 나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교사: 그게 개인의 의견이라고 생각하니? 주윤: 그죠. ‘두쫀쿠가 맛있다’는 것은 개인의 의견이잖아요. 그런데 내가 맛이 없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틀렸다고 하면 기분 나쁠 것 같아요. 지성: 맞아요. 내가 A라는 연예인이 잘 생겼다고 했는데, 다른 아이들이 그건 아니라고 하면 짜증나요. 유진: 그냥 각자 생각이나 취향이 있는 거죠. 맞고 틀리는 것은 없어요. 아름: 아냐. 1+1=3이라고 말했다고 해봐. 당연히 틀린 거지. 교사: 이 세상에는 맞고 틀리는 것도 분명히 있다는 거지? 아름: 맞아요. 당연히 있죠.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
토론을 시작하면서 아이들은 개인의 취향이나 의견에 대해서 맞고 틀림을 따지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맞는 말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영역에 대해 객관적 평가를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하지만 아름이는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한 영역도 있다고 반례를 제시했다. 철학적 토론에서 반례는 너무나 중요한 사고 기술이다. 반례는 사유의 방향을 전혀 새롭게 전개시켜 주기 때문이다.
더하여 아름이는 맞다, 틀리다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학교나 공부도 필요 없을 거라고 주장했다. 아름이에게 학교는 객관적 지식을 전달하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것이다. 그럼 그러한 객관성은 어떻게 증명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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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그럼 맞고 틀리다는 것이 주관적인 것도 있고, 객관적인 것도 있다는 거네. 준이: 음....예성이는 2010년생이다. 이것도 객관적인 거지. 맞지? 승우: 명백한 사실도 분명히 있는 거지. 교사: 그럼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승우: 실제로 눈으로 보면 돼요. 내 눈 앞에 선생님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에요. 준이: 그런데 1+1=2 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잖아. 승우: 아니야. 봐봐. 여기 연필 한 개와 또 한 개를 합하면 2개가 되잖아. 눈에 보여. 아름: 하지만 그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거야. 수진: 어떻게? 준이: 그냥 머릿속에서 판단하는 거지. 그걸 일일이 어떻게 증명하니? 민성: 그럼 우리 생각이 사실과 사실 아닌 것을 자동적으로 판단한다는 거야? |
아이들은 맞고 틀림을 객관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명백한 사실도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사실과 가치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이 질문은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도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이 교과서에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철학적 토론의 맥락 속에서 제기되었을 때, 질문에 대한 아이들의 몰입도는 전혀 달라진다.
준이는 사실과 가치의 구분은 우리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언어로 규정하지 않아도, 혹은 배우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준이의 말을 들으면서 칸트가 말한 선험적 이성을 떠올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판단이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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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윤: 하지만 맞고 틀리다는 문제에 대해 의견이 다를 수도 있잖아. 자동적으로 판단하면 그럴 필요가 없지. 준이: 의견이 다르면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냥 모든 사람들이 만장일치를 하면 그게 사실인 거지. 교사: ‘맞다’와 ‘틀리다’를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판단할 수 있으면 그건 사실이라는 거니? 준이: 맞아요. 주윤: 하지만 사람마다 사실에 대한 생각도 다를 수 있어요. 예를 들면, 달이 지구보다 작다는 의견에 대해서 사람들은 다르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우리 동생은 달이 지구보다 클 거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아름: 아~ 그렇네. 어려운 문제는 사실이라도 판단이 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지식의 차이가 있잖아요. 교사: 어렵네... 그럼 전문가의 판단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예성: 그리고 지금은 사실이라도 언젠가는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은 1+1=2라고 하지만 미래에는 3이라고 밝혀질 수도 있잖아요. 주윤: 그게 말이 되나? |
전문적인 지식의 영역에 들어서면, 맞고 틀림을 규정하는 것은 주로 전문가들이다. 우리는 천문학, 수학, 공학, 법학 등과 같은 전문적인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지식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맞고 틀림을 규정하는 것은 그 영역에 정통한 전문가의 영역인 듯 하다.
그런데 곧이어 예성이가 어려운 철학적 질문을 던졌다. 전문적인 지식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1+1=2라는 사실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은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처럼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인류의 지성사를 조금이라도 살펴보면 이러한 경우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천동설과 지동설의 논쟁,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논쟁을 살펴보라. 현재 우리가 당연하게 믿고 있던 사실도 언젠가는 분명 변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사실 이 쟁점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성이가 토론의 방향으로 처음으로 되돌렸다. 조금 아쉬웠지만 지성이 덕분에 나 역시 토론의 중심점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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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 그런데 저는 아무리 상대방의 말이 맞거나 틀리더라도 딱 잘라서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것 같아요. 교사: 왜? 지성: 누구나 틀릴 수 있잖아요. 우리가 신도 아니고요. 아름: 갑자기 틀렸다고 하면 무안하고 부끄러울 수도 있어요. 주윤: 그래도 틀린 것은 틀리다고 해줘야 상대방도 제대로 알 수 있지 않을까? 민성: 모든 것을 꼭 제대로 알아야만 해? 사는 데 큰 지장이 없을 수도 있잖아. 그냥 그렇게 지적질 하는 것도 좋은 것 아니라고 생각해. 교사: 너희 생각은 맞음, 옳음이 꼭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구나. 유진: 맞고 틀림이나 옳고 그름을 알긴 알아야죠. 하지만 표현 방법의 문제도 있을 것 같아요. 남몰래 알려주는 것도 있잖아요. 아름: 저는 맞고 틀림보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살면서 어떻게 맨날 옳고 맞는 것만 선택하며 살아요? 갑갑하잖아요. 준이: 틀린 게 때때로 세상을 더 좋게 만들 수도 있어요. 지성: 그런가? 예성이는 맨날 틀리지만, 반 분위기는 좋게 만들잖아요. 주윤: 그게 무슨...! |
어린이 철학의 선구자인 립맨과 샤프는 비판적 사고와 함께 배려적 사고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무엇인가를 판단할 때는 기준에 대한 검토도 중요하지만, 타인의 감정이나 윤리적 가치 역시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성이의 의견은 매우 중요했다. 우리는 누구나 틀릴 수 있다. 우리는 추상적인 진리, 옳음, 기준과 함께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것은 내 앞에 존재하는 친구, 부모, 교사, 동료이다. 지성이는 틀린 것이 때때로 세상을 더 좋게 만들 수도 있다고 말했다. 너무나 기막힌 표현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정의, 옳음에 빠져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사는 것은 아닐지 반성이 들었다.
마침, 이 글을 쓰는 와중에 미국과 이란의 전쟁 소식이 뉴스를 통해 들려온다. 이들도 각자의 정의와 옳음 때문에 피 흘리는 전쟁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 맞음과 옳음은 과연 어떤 가치가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