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에듀 | 올해 고1 대상 전면 도입된 고교학점제에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새 정부도 이 같은 문제의 인식 속에 몇몇 대책을 내놨지만, 이 또한 논란에 빠지면서 가야 할 길이 험난한 상황이다. 국회는 국정감사를 맞아 고교학점제에 대한 집중 검증에 나서는 등 대책 마련에 분주한 상황이다. 이에 <더에듀>는 교사노조연맹 소속 교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고교학점제가 현장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 살피면서 교사들의 주장을 확인하고자 한다. | 
고교학점제 담당 교사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교사의 모니터 속 엑셀 시트에는 학생들의 과목 선택 내역이 빼곡하다. 완벽한 학급 편성 프로그램이 부재한 탓에 수십 번 이상 수작업으로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며 최적의 학급 편성(학생 이동 최소화, 다과목 지도 교사 발생 최소화, 교사 수급 문제 예방)을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오늘 시뮬레이션의 문제는 중국어 과목이다. 동 시간대 중국어 수업을 해야 하는 학급이 두 반인데, 교내 중국어 선생님은 한 명뿐이다. 결국 교사는 행정적 문제 해결의 호소인으로 변신하여 난색을 표하며 몇몇 학생들을 찾아가 “미안하지만 중국어 대신 다른 과목을 선택해 줄 수 있겠니?”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조정 과정은 2015년 교육과정 시행 이후 매년 반복됐다. 그러나 본격적인 학기제를 앞둔 올해의 학급 편성 난이도를 이전과 비교하면, 아이 1명 키우기와 쌍둥이 키우기만큼 차이가 크다.
올해 이러한 고군분투를 한 교사라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학기제는 과연 현장의 여건을 충분히 고려한 제도인가, 학생들의 학습과 성장에 실질적 도움을 주는가?
그동안 고교학점제 논의와 사회적 관심이 출결 관리나 ‘최성보 운영’ 등 제한된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제는 선택 과목 다양화의 실효성과 학기제 운영의 현실을 냉정히 들여다봐야 할 시점이다.
학기제는 과목 선택의 다양화를 보장하는가
교사 수급이라는 현실의 벽
최근 교사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학교 여건과 교사 수급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세트 과목을 만들었다’는 고백(?)이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일명 ‘세트 과목’이란 학교가 연계 과목들을 임의로 묶어 1·2학기 선택을 강제하는 방식이다.
학생들의 일관된 진로 계획에 유용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간혹 특별한 연계성이 없는 과목까지 묶어 학생 선택을 제한하거나 과목군 간 ‘칸막이’를 형성하기도 한다.
많은 교사가 1년 단위 교원 인사와 학교 여건을 고려하면 불가피하다는 현실적 의견을 내놓는다. 결국 이 경우, 학기제는 현실의 벽에서 과목 선택의 다양화를 보장하지 못한다.
입시 제도에 종속된 학기제 운영
학기제의 큰 장점 중 하나가 동일한 과목을 두 학기에 걸쳐 편성함으로써 학생들에게 더 많은 선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이러한 취지는 입시 체계 앞에서 또 한 번 무력화된다. 두 학기에 걸친 과목 개설은 수강생 수 감소로 내신에 불리할 수 있고, 2학기 수강 학생이 1학기 학생보다 평가 준비에서 유리할 수 있어 형평성 논란이 발생한다. 내신의 유불리를 무시하고 오직 선호도에 따라서만 과목을 선택하는 ‘용자(용기있는 학생)’는 찾아보기 힘들다.
평가원이 최근 발간한 『2025 이슈페이퍼: 고교학점제 본격 적용 첫해 학교 교육과정 편제 경향』 분석에 따르면, 학교 현장에서 수능 출제 과목을 학교 지정 과목으로 고정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는 현장이 여전히 수능 중심 교육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계를 드러낸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사회·과학 융합 과목이 3학년 2학기에 편제되어 있다는 사실 또한 학기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대입 준비로 수업 운영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시기에 배치된 융합 과목은 이름뿐인 존재로 전락했다.
미래 사회에 필요한 통합적 사고력과 창의력을 기르기에 가장 적합한 과목들이 대입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작동하지 못하는 모순. 이것이 바로 고교학점제의 학기제가 드러내는 ‘형식적 유연성’의 한계이다.
학기제는 심층적 학습을 보장하는가
16주 학습의 구조적 한계
학기제가 불러올 가장 심각한 우려는 무엇보다 학생들의 학습 심화와 성장에 미칠 수 있는 부정적 영향이다. 16주 내외로 제한된 학습 기간은 진정한 탐구와 성찰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기존 1년 단위 수업에서는 3~4월 교사와 학생이 라포를 형성하고, 이후 핵심 개념을 익히며 지식을 축적한다. 학기 중후반부터는 프로젝트, 토론 활동과 같은 심화 활동으로 확장된다. 학년말에는 한 해 동안의 배움을 정리하며 마무리한다. 이렇게 한해의 수업에는 나름의 리듬과 서사가 있다.
하지만 학기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 이 서사는 무너진다. 짧은 시간 안에 개념을 익히고 결과를 내야 하는 구조 속에서, 수업은 깊이보다 속도를 택한다. 교사와 학생이 충분히 관계를 맺기 전에 수업이 마무리되고, 긴 호흡의 프로젝트 학습은 형식에 그치기 쉽다. 학습 내용을 반복·심화할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 한 학기가 끝나면 과목의 핵심 개념조차 일시적 기억으로 사라질 위험이 있다. 익힐 틈도, 되새길 여유도 없는 위태로운 구조이다.
평가 기록의 파편화
16주 단위의 수업 운영은 평가 체계에도 영향을 준다. 학생의 성장 과정을 일 년 단위로 관찰하던 구조가 무너지고, 기록은 단기적 성취의 나열로 변질될 수 있다. 특히 학습 속도가 느린 학생이나 후반부에 성장하는 학생의 경우, 학기제는 그들의 잠재력을 충분히 드러낼 기회를 제공하지 못한다.
학기제와 학교 행정 체계의 부조화
전통적 담임제와의 충돌, 관계의 해체
학기제는 1년 단위의 전통적 담임제와도 충돌한다. 한 학기 내내 수업을 함께 하지 못하는 담임교사가 늘어나면서, 학생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기록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생활기록부는 여전히 담임이 세밀한 관찰을 요구한다. 이는 학생 간 생기부 기록의 불평등을 낳는다. 일 년 동안 수업하며 관찰한 교사의 기록과, 1주일에 1~2시간 남짓 한 창체 시간과 조종례 시간만으로 작성된 기록이 같을 수는 없다. 또한 학생에 대한 라포 형성 시간이 부족해지면서 담임교사로서 학생과 친밀하고 깊은 상담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동 수업이 늘면서 학급 구성원들끼리의 공동체 의식과 결속력 또한 이미 점점 약화하고 있다. 같은 반이지만 일 년 내내 대화 한마디 못 나눈 학생들이 늘고 있다. 학기제는 더 빈번한 이동 수업으로 이러한 현상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교원 인사 체계와의 불일치
교원 인사 제도는 여전히 1년 단위로 운영되지만, 학기제는 이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학생 구성과 과목 편성이 학기마다 달라지면서 행정적 혼선이 심화하고, 결국 연계 없는 과목들의 ‘세트 과목화’라는 편법으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
이는 선택권의 실질적 제약으로 이어질 뿐 아니라, 학기제가 지향하는 유연성과 다양성을 스스로 약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학기제의 과감한 개편이 필요하다
선택 과목의 재구조화와 유연화
곧 진정한 의미의 학기제 시행으로 드러나게 될 문제점들은 모두 근본적이고 과감한 개편 없이 해결할 수 없다.
무엇보다 먼저 지나치게 세분화된 과목 체계를 통합하고, 연계 과목을 ‘코스화’하여 학교 재량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 지나치게 세분화된 계열의 과목들을 재통합하여 선택 과목의 수를 줄여 나가고, 과목 성격에 따라 학년제와 병행하도록 허용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이를 통해 선택 과목의 실질적 다양성을 회복할 수 있다.
담임교사의 역할 재정립
담임교사에게 전통적으로 부여되어 온 ‘생활 관리자’로서의 역할은 재정립이 필요하다. 그동안 학생의 등하교와 생활 전반 통제가 담임의 주된 업무로 강조되었으나, 학기제 운영 아래에서는 학생 개개인의 일과를 직접 통제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교육적으로도 적절하지 않다.
이제 담임교사는 학생의 진로 탐색과 학업 설계를 지원하는 멘토이자 성장 설계자로서 역할 수행에 주력해야 하며, 이를 위해 행정 업무를 최소화해 학생의 개별 성장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담임교사의 관찰 기록에 전적으로 의존해 온 생기부 작성 방식도 근본적으로 개편할 필요가 있다.
학기제에서는 몇 가지 단편적 관찰과 ‘풍부한 상상력’, 혹은 ‘유료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생기부를 작성해야 할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며, 이러한 방식으로는 생기부가 대입 자료로서의 신뢰를 유지하기 어렵다. 따라서 생기부는 양적 기록보다는 학생의 핵심 성장 정보를 간결하게 담는 간소화된 양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교원 인사 체계의 유연한 조정이 수반된다면 학기제 운영 효율이 높아지겠지만, 인사 주기가 잦으면 학교 조직은 불안정해지고 행정 부담이 가중될 수 있다. 따라서 인사 체계는 전면 세분화보다는 부분적·단계적 유연화를 신중히 추진하는 것이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
입시의 절대평가 전환
애초 고교학점제 설계는 절대평가를 전제로 하여 이루어졌음에도, 상대 평가를 그대로 유지하게 되면서 이미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학기제의 유연성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수능과 내신 체제 전환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특히 수능에서는 국어, 수학, 탐구 영역까지 절대평가로 전환하고 중장기적으로 수능의 문항 형식을 논서술형으로 개편해야 한다. 이는 16주 학기제의 한계를 보완하고, 학생들이 단편적 지식 암기가 아닌 깊이 있는 학습을 추구하도록 만드는 동력이 될 것이다.
내신의 단계적 절대평가화 또한 소수 선택 과목 수강에 대한 내신 불리함의 부담을 제거하여, 학생이 진로와 적성에 따른 과목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교육 환경을 조성하는 방안이 될 것이다.
교원 확보 및 교육 환경의 혁신적 개편
앞서 제시된 모든 개혁 방향이 성공하기 위한 필수 전제는 교원을 비롯한 교육 자원의 획기적 확충이다.
최근 교육부는 교사 정원 확보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2026학년도 중등교원 신규 채용 규모(7147명, 전년 대비 1643명 증가)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발표에 대해 전국중등교사노동조합은 해당 증가분이 학교당 0.28명 교원 증가에 불과함을 지적하면서, “실제 학교 현장에서 전혀 체감할 수 없는 생색내기”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고교학점제가 학교라는 공간과 그 안의 인적 구성을 미래 사회에 맞게 재편하는 거대한 구조 개혁임을 감안한다면 보다 근본적인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현재 고교학점제 운영 구조는 교사가 수업 교사인 동시에 행정 관리자, 평가자, 상담자의 역할을 동시에 해내도록 강요하고 있다. 무엇보다 학교별 행정 인력 및 진로 상담 전문 인력을 안정적으로 배치하고 고도의 행정 처리가 요구되는 업무를 전문 인력에게 분담할 수 있도록 정책적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또한 고교학점제는 학생의 이동과 선택을 기본으로 하므로, 고정된 교실 중심이 아닌 유연한 교실 환경 구축을 위한 예산 확보와 구체적 설계가 필요하다. 이러한 인프라 확충 없이는 학기제와 다양한 선택 과목이 지향하는 다양한 방식의 심층적 수업이 교실 내 강의식 주입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형식적 다양성이 허상에서 실질적 개혁으로
앞서 제시한 개편안들은 새로운 제안이 아니다. 논의는 이어지고 있지만, 과감한 실행이 뒤따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교육 당국은 현장의 목소리에 더 깊이 귀 기울이고, 실질적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개성과 자율이 교육의 새로운 가치로 자리 잡은 지금, 고교학점제가 ‘개인의 시대’에 걸맞은 개혁으로 평가받기를 바란다면, 막대한 행정력만 낭비하고 교육 혼란을 초래한 ‘역대 최악의 교육 정책’으로 남지 않길 바란다면, 더 이상 형식적 제도 운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