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교사의 눈 - 고교학점제] '선택할 자유, 선택할 수 없는 현실'...고교학점제의 구조적 불균형

  • 등록 2025.10.27 14:4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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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에듀 | 올해 고1 대상 전면 도입된 고교학점제에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새 정부도 이 같은 문제의 인식 속에 몇몇 대책을 내놨지만, 이 또한 논란에 빠지면서 가야 할 길이 험난한 상황이다. 국회는 국정감사를 맞아 고교학점제에 대한 집중 검증에 나서는 등 대책 마련에 분주한 상황이다. 이에 <더에듀>는 교사노조연맹 소속 교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고교학점제가 현장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 살피면서 교사들의 주장을 확인하고자 한다.

 


선택이 늘어나면 꼭 좋은 걸까


KTX로 전국이 일일생활권화되며 예상치 못했던 부작용 중 하나는 바로 ‘지방의료붕괴’이다.

 

지방 환자들이 새벽 첫차를 타고 상경해 수도권 빅5 병원을 ‘선택’할 권리가 주어지게 되었고, 이것이 당연한 문화처럼 자리 잡으며 지방병원의 고사(枯死)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도시 간 접근성 향상, 문화와 의료 보편화라는 장점 뒤에는 이와 같은 어두운 면이 있다.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생활상의 기본 전제를 바꾸는 일에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학생이 자신의 진로와 적성에 맞게 과목을 ‘선택’하여, 이수한 과목의 학점을 기준으로 졸업하는 ‘고교학점제’는 어떤 면에서 KTX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출석 일수만 충족하면 졸업할 수 있었던 기존 고등학교 시스템에서 ‘적성에 맞게 진로를 설계’하고 ‘과목을 선택’해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하는 시스템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교학점제, 과연 모두에게 같은 기회인가


고등학생의 입장에서는 KTX의 출현 그 이상의 획기적인 변화라 할 만하다. 하지만 KTX나 SRT와 같은 고속철도는 전국을 몇 개 노선으로 연결하며 전국민의 수요를 어느 정도 흡수할 수 있는데 반해, 2024년 교육부 교육기본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 고등학교는 총 2380개에 이른다.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는 고속철도와 달리, 2380개의 제각기 다른 환경에 처한 고등학교가 과연 분산된 수요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뿐만 아니라 저출생·고령화 현상은 신도시 인구 밀집과 구도심 소멸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우리는 과밀학급과 소규모 학교가 동시에 증가하는 ‘학교 규모의 양극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학생의 과목 선택권 존중’을 위해 필연적으로 전제되어야 할 조건은 ‘학교 규모의 경제’이다.

 

20명의 교사를 보유한 소규모 학교와 100명의 교사를 보유한 대규모 학교가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에서, 학생에게 과목 선택권을 부여하는 자체가 또 다른 격차를 불러오는 시도라는 것은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어떤 이는 편의점에서만, 어떤 이는 백화점에서만 물건을 구매할 수 있는 형편에서, ‘구매 품목을 고를 자유’만 주어진 것을 과연 ‘공정한 선택권 존중’이라 부를 수 있을까.

 

물론 현행 고교학점제에는 이를 위한 대안도 존재한다. 인근 학교와 연계하여 과목을 개설할 수 있도록 하는 ‘공동 교육과정’, 인터넷 기반 원격수업 과목 선택이 가능한 ‘온라인 공동교육과정’, 교사가 부족한 학교에 외부 강사나 순회교사를 투입하는 ‘순회교사/강사 제도’ 등이다.

 

거꾸로 말하면 소규모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원적교에 정주하며 라포가 있는 교사를 선택해 원하는 과목 수업을 들을 수 없고, 인근 학교까지 직접 이동하거나 인터넷 강의를 듣거나 라포를 쌓지 못한 순회 교·강사에게 수업을 들어야 한다.

 


선택의 자유 뒤에 남은 문제들


온라인 수업의 질이 대면수업을 대체할 수 없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입시와 직결되는 학생생활기록부 기록이나 평가 역시 큰 문제이다.

 

예컨대, 지방 소도시 중고등학교의 순회 교사들은 지금도 낮은 출장여비 탓에 기름값조차 보전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하루 1-2시간 가량을 학교 이동에 소모하고 있다.

 

근무시간을 오롯이 학생수업과 평가기록에 투자할 수 있는 교사와 그렇지 않은 교사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고교학점제 추진에 무엇보다도 선행되었어야 할 조건은 소규모 고등학교에 대한 전국단위 통계이다. 그러나 소규모 초등학교(면·도서벽지 60명, 읍 120명, 도시 240명 이하) 통계는 해마다 공개되는 것에 반해, 소규모 고등학교 통계는 공식적으로 공개되지 않고 있다.

 

공동교육과정과 순회교강사 제도를 적용해야 하는 학교가 전체의 몇 퍼센트나 되는지, 학교 규모별 과목선택권의 격차가 얼마나 되는지, 교육부를 비롯한 정책 설계자들이 과연 데이터를 파악하고 있는지조차 의문인 상황이다.

 

대한민국은 맹모삼천지교의 정주 여건을 중시하는 전통을 가진 나라이다. 정주여건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이 일자리와 교육인 나라에서, 고교학점제로 인해 ‘대규모 고등학교 진학 러쉬’ 현상, 이로 말미암아 지방소멸 가속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는가.

 

이미 현장에서는 규모가 큰 고등학교로의 쏠림현상이 하나둘 제보되고 있다.

 

배정받은 고등학교가 소규모 학교인 경우 인근 대도시·대규모 학교로 전학을 가 버리는 사례나, 개교 예정인 학교가 예상보다 학생 수가 적은 상태로 개교할 경우 학부모들이 개교 취소를 요구하며 집단행동에 돌입하는 상황이 이미 발생한 바 있다.

 

KTX로 인한 지방의료붕괴 현상을 이미 경험하고 있는 나라에서, ‘선택권 존중’이라는 미명하에 사회적 격차를 고려하지 않고 ‘선택 중심/진로 중심 교육과정’을 밀어넣고 있지는 않은지 철저한 성찰이 필요한 때다.

장세린 교사노조연맹 사무총장 te@t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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