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언제나 책봄] 제목 없음

  • 등록 2025.05.21 10: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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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좋아하는 마음 없이>를 읽고

더에듀ㅣ18년간 기자 생활을 하다 소위 말하는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되어 교육감을 보좌하는 비서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반절 가량을 글쓰기란 업을 갖고 살아왔는데, 새 옷을 입고 여러 가지 이유로 한동안 글쓰기를 멈췄습니다. 그러자 내 마음 한구석에 공허함 그 비슷한 마음이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책 한 권을 읽고 에세이를 써보기로 다짐했습니다. 지난해 2월 호기롭게 시작한 이 다짐은 지금도 꾸역꾸역 이어가고 있습니다. 책을 통해 내 안의 나와 만나는 일은 제 삶을 더욱 반짝이게 한다는 걸 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기자마다 스타일이 다르긴 하겠지만 방송 리포트는 대개 두괄식과 미괄식을 사용한다. 앵커 멘트에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을 간략히 전달하고 본문에는 취재하는 분야와 내용에 따라 두괄식으로 할지 미괄식으로 할지 정한다. 

 

나의 경우에는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제목과 앵커멘트를 가장 먼저 작성한 뒤 기사를 풀어간다. 그래야 기사가 산으로 가지 않는다. 이젠 기사가 아닌 독서 노트 혹은 에세이 정도로 불릴 수 있는 글을 쓰고 있지만 제목을 먼저 정하고 글을 써 내려가는 습관은 여전하다. 

 

그런데 김지연의 <좋아하는 마음 없이>를 읽고 선 도저히 제목을 먼저 쓸 수 없었다. 글을 읽고 난 후 어렴풋이 떠오른 생각 정리를 하기 위해 늦은 밤 노트북을 켜긴 했지만... 이 마음이 대체 어떤 마음인지 알 길이 없었다. 정신이 흐릿하고 뿌연 해져 대체 이 묘한 마음은 뭘까? 어찌할 바 몰라 물 한 컵을 벌컥벌컥 마셨다.

 

책 속의 주인공 안지의 마음에 동화된 걸까? 

어릴 때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안지는 학창 시절 수학 선생님을 좋아했는데도 친구들이 수학 선생 욕을 하자 친구 따라 마음에도 없는 욕을 함께 한다. 남들처럼 대학 가서 연애하고 졸업한 뒤 취직이 되자 조바심이 나 이른 결혼을 했다. 

 

실은 결혼 전 생긴 아이로 인해 '죽도록 좋아하는 마음 없이'도 결혼을 하긴 했지만 남편의 불륜으로 이혼을 했다. 안지는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알고도 악다구니 한 번 없이 덤덤하다. 자신이 낳은 지 1년이 된 아이를 상간녀가 키우도록 하고, 위자료를 받은 뒤 순수히 이혼에 합의해 줬다.

 

10년 만에 전 남편과 재혼한 그녀가 남편의 죽음 사실을 알려왔을 때도 이상하리만큼 무덤덤했던 이유가...'좋아하는 마음'이 없어서였을까? 전 남편의 생명 보험 수익자가 자신인 걸 알고, 전남편 부인이 양육비를 요구하러 왔을 때도 별다른 감정 동요가 일지 않았던 이유가 그저 '좋아하는 마음'이 없어서? 

 

그러면서도 안지는 죽은 전 남편의 가족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닌다. 그 이유는 뭘까?? 내 상식으론 정말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렇다고 소름 끼칠 정도로 이상하게 여겨지지도 않았다. 소설의 흐름대로 이야기를 따라갈 뿐. 안지의 진짜 마음일까? 좋아하는 마음이 없으면 진짜로 가능한 일일까?

 

열렬하게 사랑하고, 이별할 땐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슬퍼하고, 불같이 일하고, 매사 적극적으로 나서고, 서슴없이 표현하는 MBTI 유형 중 전형적인 ENFP인 나로서는 공감이 안 되는 게 정상인데... 이상하게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다 내린 결론은 '괜히 현대문학상 수상작이 아니구나'에 다 달았다가도 지난 주말 사 온 책을 방구석에 처박혀 읽는 이유가 뭔지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이 소설과 오버랩 된 것일까?

 

극과 극으로 치닫는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피해 나도 모르는 새 전형적으로 튀지 않는 인간, 죽도록 좋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싫지도 않은 안지처럼 무색무취의 인간처럼 보이길 원했던 건 아닌지... 이슈가 있을 때마다 각각의 진영논리에 따라 자기표현을 거침없이 배설하는 군상들. 평소에는 참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는데도 정치 얘기만 나오면 파랑과 빨간 옷을 꺼내 입고 전투태세로 돌변하는 인간들. 이들을 마주할 때마다 난 안지처럼 아무 상관하지 않고 외면할 순 없을까? 이 소용돌이를 벗어나 다른 세계로 이동할 순 없을까? 이런 생각을 종종 했던 것 같다.

 

안지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역시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래도 안지는 여자가 아주 싫지는 않았다. 자신이 뻔뻔하다는 걸 아는 사람이라서? 안지가 낳은 아이를 성심으로 키우고 있는 사람이라서? 무엇보다도 안지는 자신이 이혼하는 과정에서 남들이 말하는 것만큼 충격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떠올렸다. 여자의 말대로 불륜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산후우울증으로 모든 에너지가 바닥나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없었다. 오히려 한편으로는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왜 그런 마음이었는지 여러 이유들을 떠올려봤지만 적확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p27

 

중학교 때 마음을 크게 다쳐 몇 달간 말을 하지 않았던 '선택적 함묵증'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 뒤로 난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음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는 연습을 했다. 그즈음부터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글쓰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나의 마음이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전해지길 바라고, 내 마음에겐 솔직한 게 좋은데...

 

핑계 같지만 요즘 난, 마음을 숨기는데 불필요한 에너지를 쓰고 있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게 분명한데, 마음이 세상 밖으로 나오면 전쟁에 휘말릴 거 같아서 꼭꼭 숨기고 있다. 어쩌면 그래서 안지에게 끌렸는지 모른다.

 

겉으론 덤덤하고 무난하게 살아가는 듯하지만 남모르게 죽은 전 남편의 가족사진을 넣고 다니는 여자. 좋아하는 마음 없이, 평균적이고 전형적인 삶을 살아가는 듯 보여도 어쩌면 안지는 숨 고르기를 하며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흐릿해진 그때의 기억이 어렴풋이 지나간다. 마음을 숨기고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었을 때, 열몇 살의 소녀이던 나. 그 소녀가 단단해져 어른이 됐는데도 세상은 여전히 상처로 얼룩져 있다.

 

# 이 글은 브런치에 실린 것을 재구성했습니다.

 

 

임가영 충북교육청 비서관 te@t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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