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 현재 우리 공교육의 주요 쟁점은 단연 고교학점제이다.
기존의 단위제는 ‘수업을 들었는가’를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관리해 왔다. 학년 단위로 진급하며, 같은 반의 학생들은 같은 시간표를 따른다.
반면 학점제는 ‘무엇을 얼마나 성취했는가’를 기준으로 한다. 학생은 과목을 선택하고, 과목별 성취를 학점으로 누적해 졸업한다. 교육과정의 관리 단위가 집단에서 개인으로 이동하는 셈이다.
이 차이는 단순한 제도 변경이 아니다. 학점제는 ‘제도 하나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학교 운영 방식 전체를 바꾸는 것’이며, 진로 설계가 유기적으로 맞물려야 작동한다.
그런데 우리의 입시 구조와 사회적 경쟁 환경이 그대로인 상태에서 학점제가 과연 그 취지대로 작동할까?
사회경제적 불평등 및 차별이 교육에 끼치는 영향
편의상 학점제의 조건을 교육적 조건과 사회적 조건으로 나눠볼 때, 교육적 조건에는 지금껏 익히 정책 홍보 및 담론에서 제기된 것과 같이 절대평가, 교내 객관식 정기고사 폐지 및 수능의 전면 논·서술형으로 전환 등이 있다. 예전에는 시간표만 잘 짜면 되었지만, 한국과 같이 과잉경쟁이 지속되는 한 점수경쟁에서 ‘선택, 기록, 관리 경쟁’으로 옮겨갈 뿐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조건의 가장 중대한 문제는 불평등과 차별이다. 구체적으로는 비정규직이 대폭 확대되면서 노동시장이 정규직/비정규직으로 이원화되고 고착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불평등의 핵심은 ‘상위, 안정적 직업’으로의 접근이 봉쇄된 채 가파른 피라미드 구조를 이룬다는 것이다.
관련 논문을 잠시 살핀다. (이준석, 「교육과 노동시장을 중심으로 한 한국사회의 기회불평등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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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의 평등과 이를 위한 교육의 역할만을 강조하는 정책과정 속에서, 문제의 본질에 다가가지 못하고 표면에 표류(drift)하는, 집행을 위한 사회적 비용만 증대시키는 유사 정책들의 중첩 현상(policy layering)”이 확인되며(p. 5), “문제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 중 어떤 한두 가지를 수정하거나 제거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 시스템 전체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논의할 수 없는 문제를 의미한다.”(p. 4). |
교육문제가 바로 그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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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후 변화한 노동시장의 상황, 즉 노동의 불안정성이 커지는 상황 속에서 … 부모의 계급위치를 시발점(Origin)으로 보고 자녀의 계급위치를 도착점(Destination)으로 보았을 때, 교육(Education)은 그 사이에 위치한 매개적 변수로서 O-E-D 삼각형 관계를 이룬다.”(p. 55). |
이 관점에서 보면 교육이 사회개혁의 독립 변수가 아니라는 것, 그래서 이제는 교육과 교육제도만으로는 계층이동성을 증대시키지 못한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는 고교학점제의 제도적 효과가 계층 이동의 유연성은 물론 학점제 자체의 성공도 제한적일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른바 ‘좋은 자리’인 상위 전문직·계급적 세습성이 고착되고 또 이들이 극소수라면 교육은 필연적으로 줄 세우기를 위한 전쟁이 된다.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경향 = 다그침 : 느긋함
한국에도 번역본 ‘기울어진 교육’으로 친숙한 미국 노스웨스턴대 경제학 교수 M. 도프케와 예일대 경제학 교수 F. 질리보티는 워싱턴포스트에 이렇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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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에 대한 성취 압력은 경제적 불평등에 비례한다. 미국의 경우, 경제적 소득의 상위 20%가 하위 20%보다 9배를 더 벌고 있다. 스웨덴에서는 그 차이가 4.3배이다, 중국은 높은 불평등, 높은 성취 압력을 가하는 나라의 전형이다. 중국의 부모들은 이른바 엄격한 성취 압력을 행사하는 의미로서의 ‘타이거 맘(Tiger Mom)’이 많다. 이는 대체로 아시안 아메리칸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데, 중국이 미국보다 훨씬 많아서 중국 내 학부모의 90%가 그러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근본 문제를 타격하는 것이다. 즉, 불평등과 대결하는 것이다.”(2019.2.22. 기사 제목: 「The Parent Trap」) |
고교학점제 국제 비교
미국, 독일, 일본, 핀란드, 국제 바칼로레아 과정(IBDP)을 비교한 논문에 따르면(김대영, 우옥희, 「고교학점제에 대한 국제비교 연구」), 해외는 그동안 단위제와 학점제를 각기 취하는데, 중요한 것은 단위제에서도 학생들의 과목 선택권을 수준별로 허용했다.
미국은 영어를 제외한 모든 과목이 무학년제이면서 동시에 3단계 수준별로 제시된다.
핀란드는 1990년 중반부터 무학년제로 운영되며, 교과목별로 필수, 심화, 응용으로 구분하여 개설한다.
독일은 학기제이지만 핵심과목은 4학기 동안 계속 편성한다. 그리고 필수과목과 선택과목, 이어서 기초과목과 심화과목을 구분해 개설한다.
일본은 우리와 유사한 학년제이지만 단위제 고교는 무학년제로 운영한다. 그리고 난이도별로 A, B, C, 혹은 기초과목과 일반과목으로 구분해 개설한다.
IBDP도 학년제이지만 교과군별로 표준수준과 고급수준으로 구분해 편성한다. 이를 표로 만들면 아래와 같다.
외국은 단위제를 취하더라도 그 속에서 능력별로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단위제와 학점제의 경계선은 사실상 분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은 과도하게 단위제로 획일화되어 과목 선택권에 대한 배려가 없었음이 분명해진다. 이제라도 학생들로 하여금 과목 선택권을 온전히 돌려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에서 학점제는 정당성을 얻는다.
그러나 관건은, ‘학점제가 입시에 포획된 교육환경, 다시 이것을 제어하는 경제적 불평등에 의해 원격 조종되는 상황을 어찌 넘어설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왜 한국에서는 학점제가 더 어려운가?
사회적 조건의 탐색은 “학점제가 어떻게 사회적 불평등과 맞닿아 있는 것일까”를 질문하고 이에 답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국내외 연구와 정책 자료를 종합하여 고교학점제가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조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교육적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학점제는 운영되지 않는다. 반면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적 조건이 바뀌지 않으면 학점제는 왜곡될 수 있다. 그래서 학점제의 성패는 학교 안의 평가기술이 아니라, 학교 밖의 경쟁구조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 있다.
정부가 할 일: 노동시장 이중구조 속에 학점제 방안을 찾는 것
사회구조가 그대로인 상태에서는 ‘학점제가 미래교육의 대안이다’라는 말이 무책임한 말로 들린다. 과도한 지위경쟁의 구도가 먹구름처럼 우리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이런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교육적으로는 학점제 하에서 난이도나 학교여건에 따른 과목 선택의 유불리가 간접 서열화의 계기가 되지 않게 대학에 협조를 요청할 수 있다. 대학이 학생의 잠재력보다는 여전히 다 만들어진 성적우수자만을 선발하려고 하면, 학점제는 전략 게임으로 변질될 수 있다.
고교학점제의 필수조건으로 성취기준 절대평가를 정착시킴으로써 상대평가가 우회적으로 작동하지 않도록 한다. 교사들의 논·서술형 평가, 프로젝트, 소논문 지도를 업무로 인정한다. 학점제의 성패는 교사의 의지보다 노동조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수업 시수 및 행정업무 축소가 전제되는 것이 당연하다. 교사가 버티지 못하면 학점제는 형식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또한 학교간 격차, 최소 개설과목 기준 설정이 잘못되면 그것은 국가 책임으로 한다.
사회적으로는 교육이 불평등을 해결하는 수단에도 해당하지만, 그보다는 불평등의 영향을 받는 제도라고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 모순에 눈을 돌리게 된다. 사회구조가 원인으로 지목되면 노동시장 이중구조(정규직/비정규직)의 문제를 ‘교육정책의 외부조건’으로 공식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신자유주의 이래로 정규직/비정규직의 심화된 격차가 입시경쟁을 한층 과열시켜 오지 않았는가?
게다가 지금까지, 사회경제적 엘리트와 전문직에 대한 집중적 보상이 늘 중등교육을 왜곡시켜 왔다. 그 연장선에 학점제가 자리할 수 있다. 특정 전문직에 보상이 과도하게 집중되는 사회에서는, 교육경쟁 역시 필연적으로 몇 개의 출구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2023년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2025년 OECD 통계로 의사의 임금을 보면, 대부분의 국가에서 일반의는 평균 임금의 약 1.5~2.5배, 전문의는 2~4배로 높다. 한국 의사의 연 총소득은 전체 노동자 평균보다 최소 2.1배에서 많게는 6.8배에 이른다. 미국 의사의 명목 연봉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알려져있지만, 한국의 경우 OECD의 구매력평가(PPP) 기준으로 보더라도 전문의의 보상 수준은 자국 평균 노동자 대비 기준에서 매우 높은 편에 속한다(OECD, Health at a Glance 2025).
따라서 교육당국은 학점제의 교육적 조건과 함께, 범정부적으로 사회적 조건을 정책적으로 고민하고 이를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학점제가 간접적으로, 그러나 강력한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학점제는 또 하나의 스펙 경쟁의 정교한 도구로 전락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