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고교학점제 역시 제도의 취지보다 학교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하느냐가 성패를 가른다. 그러나 현재의 고교학점제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으며, 현장은 이미 고교학점제 붕괴를 우려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최근 교원3단체(교총, 교사노조, 전교조)가 고등학교 1학년 교사 등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최소성취수준 보장지도에 대해 90% 이상이 ‘효과가 없거나 반대한다’고 응답했다. 올 5월 진행된 학생과 학부모 설문에서도 부정적 의견이 70%를 넘었다. 이는 일부 교사의 불만이 아니라, 고교학점제 운영 전반에 대한 교육현장의 분명한 경고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시·도교육청 의견에서도 확인된다. 전국 17개 시·도 가운데 10곳 이상이 최소성취수준 보장지도에 대해 유예 또는 폐지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교육부는 현장의 요구와 달리, 공통과목에 출석률과 학업성취율을 함께 적용하는 이른바 ‘교육부 1안’을 중심으로 정책을 추진해 왔다.
더 큰 문제는 국가교육위원회(국교위)이다. 국교위는 국교위원 내부의 충분한 논의와 합의 과정 없이, 이미 마련된 교육부 1안을 담은 행정예고안을 사실상 그대로 확정·권고하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렸다.
국교위원 가운데 현장 교원을 대표하는 위원들이 행정예고안에 반대하며, 교육부 2안인 ‘출석률만을 이수 기준으로 반영하는 안’에 대한 재논의를 요청했지만, 현재는 보고 받는 단계라며 이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교사뿐만 아니라 학생과 학부모까지 고교학점제의 학업성취율 이수 기준에 반대하는 것일까?
첫째, 개근해도 성적에 따라 유급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고등학교는 의무교육의 연장선에 가깝다. 학업성취율 미도달을 이유로 학년 승급이나 졸업을 제한할 경우, 학생과 학부모의 강한 반발은 물론 학업 중단의 증가를 유발할 가능성이 크다. 그로 인한 갈등과 민원 부담은 결국 학교와 교사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고등학교 졸업 기준은 ‘출석일수’로 명확했다. 고교학점제 연구·시범학교 운영 과정에서도 미이수와 최소성취수준 보장지도 문제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이유는 미이수가 곧 유급(졸업불가)으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교육부 2안은 기존 제도와 가장 유사하며 안정적인 구조이다.
반면 학업성취율을 포함한 현행 행정예고안과 국교위 권고안은 출석 요건을 충족하더라도 졸업이 제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합의와 제도적 준비가 충분하지 않다.
고교학점제를 먼저 시행한 미국, 핀란드, 독일, 호주 등은 대체로 무학년제를 전제로 학사를 운영해 유급이나 월반이 한국에 비해 상당히 유연하다. 교육을 대하는 국민적 합의나 문화적 토대가 다른 것이다.
둘째, 고교학점제의 안착을 위해서라도, 고교학점제는 ‘학생 과목선택권 확대’에 초점을 맞추어 운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교학점제의 핵심은 학생이 다양한 과목을 선택·이수하며 자신의 진로를 탐색하도록 돕는 데 있다.
그러나 학생이 유급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미이수제)과 유급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성취수준 보장지도가 고교학점제의 메인 이슈가 되며 너무 많은 소모전을 유발하고 있다.
미이수제와 최소성취수준 보장지도는 ‘책임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초·중학교 과정에서 누적된 학습 결손을 고등학교 교사가 단기간에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을 주고 있다.
미이수제와 최소성취수준 보장지도 폐지를 요구해 온 교원단체들은 이러한 구조가 결국 책임을 교사 개인에게 전가하는 방식이라고 지적한다. 책임교육은 교사의 개인적 헌신이 아니라, 기초학력 보장을 위한 제도적 시스템으로 접근해야 한다.
셋째, 효과가 입증되지 않은 최소성취수준 보장지도가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기 때문이다.
1% 미만의 미이수자를 만들기 위해 수행평가 비율은 과도하게 늘고, 지필평가는 쉬워지며, 행정업무는 폭증하고 있다.
가장 바쁜 3월부터 교사들은 미이수가 우려되는 학생을 선별해 예방지도를 해야 하고, 학생들은 이 과정에서부터 이미 ‘낙인’을 경험한다. 예방지도는 형식적인 체크리스트로 전락했고, 3시간의 보충지도 역시 실질적인 학습 보장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최소성취수준 보장이라는 제도의 취지와도 맞지 않는다.
만약 졸업 이수 기준에 학업성취율을 도입하려면, 최소 6~7년 이상의 충분한 유예기간을 두고, 기초학력 보장 시스템이 현장에 안정적으로 정착된 이후 단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준비되지 않은 제도의 강행은 혼란만 키울 뿐이다.
결론은 분명하다. 현재의 졸업 이수 기준에서는 학업성취율을 제외하고 출석률만 적용하는 것이 현장의 혼란을 줄이고 고교학점제를 안착시키는 현실적인 해법이다.
이와 더불어 지금 학교 현장은 1% 미만의 미이수자 문제보다, 나머지 99%의 학생에게 영향을 미칠 진로·융합 선택과목과 전문교과의 성취평가제(절대평가) 전환을 더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이는 고교학점제의 취지와도 부합하며, 교육부와 학교 현장 간에도 이견이 거의 없는 핵심 과제이다.
학생 과목 선택권 확대를 위해 고안된 고교학점제가, 선택과목 상대평가로 인해 ‘전교 1등이 듣는 과목은 피하되, 등급을 따기 쉽도록 다수가 몰리는 과목을 신청하는 제도’로 전락한 것은 상당한 아이러니이다.
국교위의 권고안에는 이러한 실제적인 현장 요구가 반드시 반영되어야 한다. 백 번의 토론보다 한 번의 학교 현장 방문이 답이다. 지금 고교학점제에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이상이 아닌, 현장을 중심에 둔 결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