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에듀 | 한국 교육정책의 최근 화두 가운데 하나가 고교학점제의 ‘최소성취수준 보장지도’(최성보)이다.
언뜻 보기에 이 제도는 학생의 학습권을 보호하고 교육 기회를 넓혀 성취를 보장하는, 그야말로 학생 친화적인 정책처럼 보인다.
그러나 막상 제도의 내용을 뜯어보면, 이는 학력 보장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미이수 학생의 낙제를 은폐하기 위해 고안된 행정적 장치에 불과하다.
겉으로는 낙인찍기로부터 학생을 보호한다는 학생인권친화적 정책으로 보이지만 속은 비어 있는 교육과 학습의 본질을 외면한 또 하나의 행정 편의주의적 정책이 등장한 셈이다.
겉보기와 다른 ‘최소 성취수준 보장 지도’
현행 고교학점제에서 학생이 과목을 이수하기 위해서는 ‘성취율 40% 이상’과 ‘출석률 3분의 2 이상’을 충족해야 한다.
그러나 이 기준에 미달하면 교사는 ‘보충지도’라는 이름으로 추가 수업을 맡아 학생을 억지로 통과시키도록 강요받는다.
해외에서 보편적으로 운영되는 ‘Fail → 재시험·재수강’이라는 단순하고 합리적인 구조와 완전히 다른 방식이다.
고교학점제를 시행하는 해외 주요 국가의 경우, 미이수인 낙제를 인정한 뒤, 재도전의 기회를 보장하는 구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한국의 ‘최성보’는 미이수를 애써 인정하지 않고, 보장이라는 권리 담론을 끌어와 정책을 포장하고 학생의 학습의 의무와 책임을 삭제한 채 교사를 희생양으로 삼아 학생의 ‘권리 과잉–책임 결핍’이라는 왜곡된 구조를 제도화했다.
정부는 고교 유급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을 근거로 낙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최성보’라는 억지 제도를 도입해 문제를 덮으려 한다. 그러나 유급이 일반적이지 않다면 처음부터 학점제를 도입하지 말았어야 한다.
책임 없는 자율, 무너진 학점제의 본질
학점제의 핵심은 학생에게 교과 선택권을 자율적으로 보장하는 대신, 선택한 학습에 대한 책임을 ‘이수 여부’로 분명히 부과하는 데 있다.
그러나 미이수를 제거한 한국식 학점제는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우지 않는 구조로 변질되었고, 그 결과 자율과 책임의 균형이라는 학점제 도입의 본질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이렇게 해서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기형적 형태의 최성보’가 탄생했다.
학생에게 과목 선택권과 자율권을 보장하는 교육 체계에서 미이수 제도를 전면적으로 배제하는 사례는 국제적으로도 극히 드물다. 이는 곧 한국식 최성보라는 제도가 얼마나 비상식적이고 위험한 시도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고교학점제 도입의 핵심 가치는 책임 교육이다.
원래 책임 교육 체제란, 학생에게 자율적 선택을 보장하는 대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학생이 분명히 지도록 설계하는 구조다.
결국 최성보는 학생에게 자율과 교과 선택권은 부여하면서도 그에 따른 책임은 전혀 묻지 않겠다는 제도 설계로, 유급보다도 훨씬 더 위험하고 비교육적인 장치를 제도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교사들의 평가도 혹독하다.
교원 3단체(한국교총, 교사노조, 전교조) 설문조사에 따르면, 교사의 78%가 최성보의 전면 폐지를 요구했다. 또 최성보를 직접 경험한 교사의 97%는 “학생 성장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이는 제도의 억지 운영에 대한 실패를 명확히 증명하는 데이터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누적된 학습 결손을, 고등학교 단계의 최성보 하나로 단숨에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은 유급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현실만큼이나 상식을 벗어난 발상이다.
대학에서 학생이 F를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학생 자신의 책임이다. 재수강이나 재시험을 통해 스스로 만회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한국의 고교학점제에서 시행되는 최성보는 이 책임 구조를 완전히 거꾸로 세웠다. 학습 책임이 학생이 아니라 교사에게 전가된다.
마치 대학에서 F학점을 준 교수가 “추가 수업을 통해 억지로 학생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는 의사가 정상 수치가 나오지 않은 환자에게 억지로 정상 판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과도 같다.
결국 학생 성취 부족의 책임을 교사에게 떠넘기는 구조로, 교육의 본질을 근본에서 왜곡하는 전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해외의 고교학점제 사례
해외의 사례는 분명하다.
‘미국’은 고교 졸업을 위해 C이상의 성취를 요구하며, 실패한 학생은 재수강·보충학습·여름학교를 통해 다시 도전해야 한다.
‘독일’에서는 과목 점수가 0점이면 낙제로 처리되고, 일정 과목 이상 낙제하면 Abitur 자격을 얻을 수 없다.
‘핀란드’는 50% 이상 성취를 통과 기준으로 삼으며, Fail시 재시험·개별 보충학습·재이수를 통해 만회한다.
‘홍콩’ 역시 국가시험 HKDSE에서 1 이하 등급은 Fail로 처리되어 해당 과목은 졸업 학점에서 제외되고, 학생은 이듬해 재응시해야 한다.
해외 교육선진국은 하나같이 낙제를 인정한 뒤, 학생이 자신이 선택한 학습에 책임을 지고 재도전할 기회를 보장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러나 한국은 낙제를 인정하지 않은 채, ‘최성보’라는 행정 구호 속에서 억지로 통과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해외에서는 많은 학생이 졸업에 실패할까?’
통계는 그렇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미국 공립 고등학교의 4년 내 졸업률은 2022~23학년도 기준 약 87%로, 10명 중 9명은 정상적으로 졸업한다.
OECD 평균 역시 상급 중등교육 이수율이 80~90% 수준을 유지한다.
핀란드와 일본은 고졸 이수율이 90% 이상에 달하며, 일부 자료에서는 95%를 넘기도 한다. 독일도 25~34세 인구 중 상급 중등교육을 마치지 못한 비율이 13~15%에 불과하다. 즉, 일부 학생은 낙제로 인해 재수강하거나 탈락하지만, 대다수는 자기 책임으로 학업을 이어가며 결국 졸업에 이른다.
따라서 “낙제를 인정하면 낙인찍기는 물론이고 대량 탈락 사태가 벌어진다”는 주장은 사실과 동떨어진 학생인권팔이 공포 담론일 뿐이다.
만약 고교학점제 운영시 40%에도 도달하지 못한 학생이 대거 발생한다면, 이는 최성보로 덮을 문제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한국 교육정책이 잘못되어 왔음을 직시해야 할 강력한 신호다. 그럼에도 데이터가 두려워 이를 회피하고자 만든 것이 최성보라면 우리 교육에 미래는 없다.
책임 구조 왜곡과 교사의 부담 확대
고교학점제의 최성보는 지난 15여년 넘게 책임 없는 학생을 길러온 기존의 교육정책 기조와도 맞닿아 있다.
이 제도는 학습의 주체로서 책임 있는 학생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보호받아야 할 나약한 아동을 대상으로 한 정책 설계에 가깝다는 점이다.
그러나 학생은 단순히 보호받아야 할 아동이 아니라, 교육받을 권리와 학습 의무를 동시에 지닌 법적 주체이다.
교사와 학생은 역할만 다를 뿐, 대등한 교수학습의 주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학생이 학습책임을 지는 것은 교사가 교육과정 운영을 위한 교수와 평가 책임을 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정책은 학생을 끝내 ‘아동’이라는 이름에 묶어 책임은 지우지 않고 권리만 부여했다.
그 결과, 학생은 스스로 배우는 주체가 아니라 ‘보호받기만 하는 아동의 존재’로 격하되었고, 교사는 학생을 가르쳤음에도 학습에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아동의 부담까지 떠안는, 전형적인 희생 구조 속에 내몰리고 말았다.
학교는 민주주의 사회의 축소판이다. 교사와 학생이 대등한 주체로 만나 배우고 가르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적 질서를 체득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정부의 교육정책은 학생인권·아동복지·아동보호라는 이름으로 학생에게 무제한의 방어권을 부여하면서, 교사와 학생을 대등한 주체로 세우는 균형을 입법과 정책을 통해 지속적으로 무너뜨렸다.
‘교사는 강자, 학생은 약자’ 혹은 ‘아동’으로 규정하는 왜곡된 프레임이 교육정책을 지배하면서, 학생에게는 책임과 의무가 사라지고 권리와 보호만 무한정 주어졌다.
그 결과 학생은 스스로의 행위에 책임지지 않는 존재로 길러져 왔고, 교사와 학생, 나아가 사회 전체가 지금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교육’은 사라지고 ‘교육적’이라는 포장만 난무하는 상황, 결국 교사는 학생을 넘어 아동에 대한 책임까지 떠안아야 하는 구조 속에서 소진되고 있다.
부모가 자식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듯, 교사가 학생의 학습을 지원할 수는 있어도 대신 책임질 수는 없다. 그런데도 지금의 제도는 바로 그 불가능을 강요하고 있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은 학습자 주도성과 행위주체성을 핵심 가치로 내세우지만, 실제 최성보 정책은 학생을 책임 있는 주체로 세우기는커녕 면책 특권만 보장했다. 앞에서는 학습주도성과 주체성을 외치고, 뒤에서는 학생의 책임을 지워버리는 최성보를 설계한 것이다. 책임 없는 학습자주도성을 설계하는 이것이야말로 현 정부 교육정책의 모순된 민낯이다.
실패를 경험할 권리를 빼앗는 교육은 곧 민주주의를 경험할 권리도 빼앗는 것이다. 실패할 자유, 낙제할 자유조차 봉쇄해버린 교육은 학생이 스스로의 실패와 한계를 성찰하고 관리할 기회를 잃게 만든다.
학습은 본래 도전의 과정이다. 그러나 지금의 정책은 학생에게 언제나 ‘핑크빛 경험’만을 의도적으로 주입한다.
책임을 져본 적도, 갈등이나 실패를 겪어본 적도 없이, 인권이라는 만병통치약 아래에서만 자라난 학생이 사회에 나가 현실의 벽을 마주했을 때 스스로 버텨낼 힘을 기를 수 있겠는 가.
학생의 학령기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며, 그 시기의 교육은 곧 사회의 미래를 결정짓는 바로미터이다. 그런데 지난 15여 년 동안 한국 교육정책은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학생에게 무한한 방어권만 부여했다. 책임과 의무는 지워버리고, 무책임한 학습자를 제도적으로 길러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육정책이 저지른 가장 위험한 실험이다.
교육정책의 본질은 단순하다. 교사는 가르칠 책임을 지고, 학생은 배울 책임을 지며, 정책 당국은 이를 지원할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최성보’는 이 상식적인 원리를 정면으로 뒤집었다. 학생의 책임은 지워지고, 교사만이 모든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그 결과 학교는 책임지지 않는 인간을 길러내는 훈련장으로 전락했다. 책임은 주체만이 질 수 있다.
학생이 학습의 주인이 아닌 순간, 그는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 피동적 존재로 전락하고, 교사와의 관계도 대등한 교육적 관계가 아니라 주종관계로 왜곡된다. 학생이 스스로의 학습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패 경험을 지운 교육의 위험성
정부는 미이수인 낙제를 없애야 학생이 낙인에서 벗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이수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미이수를 낙인으로만 바라보고 제도를 설계한 정책 담당자들의 잘못된 인식이다.
인식의 오류를 바로잡기는커녕, 문제를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문제 그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이라는 발상에 매달린 것이다.
실패와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제도 자체를 없애버리는 방식은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다.
이 장면은 지난 문재인 정부가 과정중심평가를 도입하면서 결과중심평가를 악마화하고, 총괄평가 자체를 없애버린 오류와 똑같다. 실제 문제는 총괄평가와 시험을 바라보는 왜곡된 인식이었지만, 그 인식은 교정하지 않은 채 제도만 통째로 날려버렸다.
‘성취수준 보장을 외치면서도, 그 보장의 핵심 도구인 평가를 악마화하는 이중적 태도는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결국 제도 설계자들의 왜곡된 렌즈는 교정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그 대신 제도만 희생양으로 삼아 없애고, 효과도 검증되지 않은 정책을 ‘혁신’과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마구잡이식으로 도입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학생 인권이라는 포장지로 덮어씌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비교육적인 방식이다.
결국 가장 큰 피해자는 학생이다.
학습의 본질, 즉 교사와 학생이 대등한 주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정책을 설계하고 입법하기 때문이다. 실패를 경험할 권리, 억지 성취수준 보장을 통해 학습의 책임까지도 빼앗아버린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학생 교육이라 부를 수 없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자신의 가장 기본적인 일인 학습조차 책임져 본 적이 없는 학생이 사회인이 되었을 때, 그 책임을 교육정책 입안자가 대신 져줄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학생의 책임을 거세해버린 정책은 결국 미래 사회에 대한 기만일 뿐이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최성보’라는 용어는 한국 교육정책의 왜곡된 상상력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학습의 본질을 행정 관리 대상으로만 재단한 결과 탄생한 기형적 제도이다. ‘학습권 보장’이라는 그럴듯한 구호로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학생을 책임 없는 존재로 길러내는 정책일 뿐이다.
이제는 교육정책 실명제가 필요하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제도를 설계하고 입법한 국회의원과 교육 당국자의 이름을 기록해야 한다.
자신의 실패를 성찰과 관리조차하지 못하는 학생으로 길러내는 교육은, 결국 실패를 책임지지 않도록 만든 정책 입안자의 초상에 다름 아니다.
이제는 물어야 한다.
‘최성보’을 통해 학생에게 학습의 책임까지 면책해주는 교육이 정말로 우리 사회와 정부가 말하는 ‘행복교육’인가. 성취와 실패의 경험을 빼앗기고, 보호막 속에서만 자라난 아이들이 과연 미래 사회에서 자기 삶을 책임질 수 있겠는가.
대한민국 교육이 이 왜곡을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지, 이제는 국민 모두가 따져 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