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에듀 | 며칠 전 한 일간지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실렸다.
“시간표 중심의 학교 수업 운영이 대표적이다. 디지털 대전환 시대를 맞아 학교 수업은 근대적 학교의 모습과는 달라야 한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미리 짜놓은 시간표대로 일방적으로 획일화된 수업을 하고 평가를 한다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고민은 향후 학교가 풀어야 할 숙제다.”
표면적으로는 타당해 보이는 진단이다. 하지만 이 담론이 디지털 기술 중심적 관점에 기댄 비전문가의 주관적 판단일 경우, 공교육의 본질을 해체하는 위험한 도식으로 전락할 수 있다.
실제로 얼마 전, 기획재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학교는 아직도 시간표 짜고 수업하고 있다”며 공교육을 ‘획일적’이라 비판했다.
단순한 개인 의견이 아니라, 교육 전문성 없이도 교육 담론을 주도하는 정부 부처의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난 발언이다. 이는 정책결정권자가 교육에 대한 철학 없이 목소리를 낼 때 발생하는 구조적 위험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오늘날 교육은 사회적 담론의 중심에 놓여 있으며, 누구나 교육에 대한 의견을 낼 수 있다. 그러나 교육정책은 ‘누가’ 말하느냐, 그리고 ‘어떤 철학적 관점에서’ 말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특히 유비쿼터스 기반 지식 소비가 보편화된 지식정보사회에서, ‘지식’이 누구나 다룰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교육 또한 아무나 말할 수 있는 영역처럼 여겨지는 현실이 도래했다.
문제는, 이처럼 누구나 참여 가능한 담론이 사실과 보편타당성에 근거한 비판이 아니라, 감정적 구호나 편의적 주장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시대 변화라는 명분 아래 그럴듯한 언어로 포장된 비판들이 실체 없는 선언으로 유통되며, 교육정책의 철학적 성찰과 구조적 진단은 실종되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교육학도, 교사, 학교가 아닌 이들이 기술과 행정 편의의 시선으로 공교육을 재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육은 누구나 말할 수 있지만, 아무나 결정해서는 안 된다. 획일적 시간표 비판도, 디지털 전환 담론도, 교육 현장에 대한 구조적 이해 없이 던져질 때는 공교육 붕괴의 서막이 된다.
기술은 교육을 지원하는 도구이지, 교육의 주체가 아니다. 교육은 기술로 환원될 수 있는 단순한 프로세스가 아니라, 인간의 성장과 발달을 이끄는 복합적·철학적 구조물이다.
최근에는 디지털 전환 시대에는 계획 없이 유연하게 수업해야 한다는 담론도 등장한다. 학생의 학년과 발달 단계에 따라 성취기준과 학습목표를 사전에 설정하는 것 자체가 낡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묻고 싶다.
급변하는 시대에는 국가도 국정과제를 사전 계획 없이 유연하게 그때그때 대응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유연성이 아니라 무책임이다.
같은 논리라면, 기획재정부는 “예산도 그때그때 유연하게 편성하면 된다”고 주장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무도 국가 예산을 그렇게 다루자고 말하지 않는다.
예산이 국가 운영의 핵심인 것처럼, 교육 역시 국가의 지속가능성과 직결된 전략적 영역이다. 따라서 교육도 치밀한 계획과 철학을 전제로 운영되어야 한다.
교육은 무작위적 경험이 아니다. 교육은 의도와 철학이 깃든 경험, 곧 ‘설계된 배움’이어야 한다. 교사가 성취기준을 분석하고 수업과 평가를 설계하는 일은 단순한 행정 계획이 아니라, 책임성과 전문성을 담보하는 교육적 판단의 핵심이다. 시대가 아무리 빠르게 변하더라도, 교육은 의도성과 철학이 담긴 계획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이는 디지털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교육의 본질이다.
디지털 전환은 기존의 계획을 폐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계획의 정밀도를 높이고, 피드백을 보다 정교하게 제공하자는 요청이다. 따라서 “학습 목표를 미리 세우지 말자”거나 “정해진 시간표는 구시대적이다”라는 주장은 신선하게 들릴 수는 있어도, 실행력 없는 유토피아적 환상에 불과하다.
이와 유사한 오류는 이미 과거 혁신교육 정책에서도 반복되었다.
‘과정 중심 평가’라는 이름으로 총괄평가가 이유 없이 사라지면서 평가 체계의 균형이 무너졌고, 초등교육은 학습력 저하라는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결과 없는 평가, 근거 없는 과정중심 피드백이 남발되면서, 학생의 학습 결과를 진단할 수 있는 평가 체계가 붕괴된 것이다.
교육정책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교육의 방향과 질을 결정하는 구조적 언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정책 현장에서 ‘디지털 대전환’과 ‘AI 시대’라는 용어가 혼용되며 교육적 혼선을 초래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우려스럽다.

AI 시대의 교육은 단순한 디지털화의 연장이 아니다. AI 기술은 교사의 판단, 교육과정 설계, 학생의 표현에 개입하는 새로운 국면이다. 이러한 시대에는 단순히 기술을 수용하는 것을 넘어서, 기술과 인간의 관계, 교육의 본질, 학습 주체성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요구된다. 그럼에도 현재 교육정책은 철학은 실종되고, 기술만 강조되는 기술만능주의 담론에 갇혀 있다.
아무리 정교한 AI 플랫폼이 있어도, 그것을 언제, 누구에게, 어떤 목적으로, 어떤 맥락에서 사용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교사의 판단과 국가의 철학이다. 목표 없는 디지털 교육은 기술에 끌려가는 교육일 뿐이다.
디지털 전환이 교육 시스템의 운영 구조를 바꾼 것이라면, AI 시대는 교육의 목적과 주체 자체를 바꾸려는 흐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AI 시대를 논하는 교육정책 결정자라면, 반드시 이 질문 앞에 서야 한다.
“누가 가르칠 것인가? 무엇을 배울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교육을 설계할 자격이 없다.
공교육의 위기는 교사가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교육 철학을 가진 이들이 정책결정권을 갖지 못하고, 현장을 모르는 이들이 마이크를 쥘 때, 그리고 기술과 행정의 논리가 교육의 본질을 대체하려 할 때, 진짜 위기가 시작된다. 기술만 있고 철학이 없는 시대, 우리는 교육을 잃는다.
이제 교육정책 결정자들이 회복해야 할 것은, 속도가 아닌 방향, 기술이 아닌 철학, 도구가 아닌 목적, 그리고 무엇보다도 “배움은 고귀한 일”이라는 믿음이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교육이 언제나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라는,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이자 약속이다. 그래야만, 기술과 인간의 균형이라는 이상이라도 흉내 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