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대신 민원 방어, 교사는 ‘하수종말처리장’인가”...베테랑 교사들의 소리 없는 절규

  • 등록 2026.03.03 11: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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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교육연구, ‘고경력 초등교사의 역할 정체성 변화와 어려움’ 실어

 

더에듀 지성배 기자 | “교직 경력 20년을 넘긴 베테랑 초등교사 A씨는 3월 개학이 두렵다.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기쁨으로 버텨온 세월이었지만, 이제 교실은 교육의 장이 아닌 ‘민원과 행정의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수업 준비를 위해 펼쳐야 할 교과서 대신 교육청 공문과 행정 계획서가 책상을 점령한 지 오래다. 무엇이 아이들에게 옳은지 고민보다 생활지도고시를 살펴보며 문제가 생겼을 때 절차적으로 면책이 가능한지를 먼저 따지게 되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그는 깊은 자괴감에 빠진다.”

 

지난 1월 초등교육연구 제39권 제1호에 게재된 정유리 한국교육개발원 박사가 김성아 광주서초등학교 교사, 송경오 조선대 교수 함께 연구한 ‘고경력 초등교사의 역할 정체성 변화와 어려움’은 A씨와 같은 고경력 교사들이 겪는 존재론적 위기를 적나라하게 담았다.

 

연구에 따르면, 20년 이상 경력을 쌓은 숙련된 교사들은 여전히 수업과 학생 지도를 교사의 본질적 역할로 인식했지만, 이들의 숙련된 식견은 학교 현장에서 더 이상 신뢰받지 못한다. 수업 준비보다 교육청 공문이나 행정 계획서 처리가 우선시되는 구조적 모순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유능한 교사의 기준은 교육과정 설계가 아닌 공문 처리의 완결성으로 치환됐다”며 “수십 년간 쌓아온 수업 전문성은 행정적 효율성 뒤편으로 주변화되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교사의 권위가 학부모에게 자신의 전문성을 사안마다 증명해 내야만 제한적으로 인정받는 ‘조건부 권위’로 전락했다”고 평가했다.

 

학부모가 학생 편에 녹음기를 넣어 보내거나 수업 장면을 수시로 사진 찍어 보내달라고 요구하는 등 불신이 지배하는 환경 속에서, 교사들 역시 스스로를 ‘자율적 전문직’이 아닌 규정과 절차에 종속된 ‘행정 실무자’로 정의하기 시작한 것으로 봤다.

 

결국 교사들은 민원 발생을 막기 위해 지도 행동을 스스로 최소화하고 모든 소통을 증거로 남기는 방어적 태도를 취하게 됐다. 이는 교육적 자율성이 스스로 위축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교사들이 스스로를 학교 내 모든 사안의 최종 책임을 떠안는 ‘하수종말처리장’과 같은 존재로 느낀다는 점이다.

 

연구진은 “수업과 생활지도라는 전통적 업무를 넘어 돌봄, 행정 처리, 민원 대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적 요구가 학교로 쏟아지고 있다”며 “정작 교사의 책임 범위를 보호해 줄 제도적 가이드라인은 여전히 미흡해 교사들에게 상시적 불안감과 압박을 내면화하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교사는 교육적 지도자에서 민원과 분쟁을 차단하는 ‘위험 관리자(Risk Manager)’로 근본적인 정체성 변질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체성의 전이는 결국 ‘존재론적 소진(Ontological Burnout)’으로 이어진다. 과거에는 동료들과 수업을 고민하며 어려움을 나누던 공동체 기반의 정체성이 존재했지만, 이제는 각자 닥친 민원과 행정 폭탄을 알아서 견뎌야 하는 ‘방어적 고립’의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수십 년간 쌓아온 영혼의 노동이 성찰과 발달의 자양분이 되는 대신, 자기 검열과 무력감으로 축적되면서 교직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고경력 교사들이 ‘버티는 직업’이 아닌 ‘성장하는 전문가’로 돌아가기 위해 면책 제도 법제화와 전문교사 직무 트랙 신설 등을 촉구했다.

 

이들은 “정당한 교육 활동에 대한 사법적·행정적 면책 제도 법제화로 교사가 교육적 판단을 내릴 때 주저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며 “교육청 단위에서는 이들이 행정 업무에서 벗어나 수업 코칭과 멘토링에 전념할 수 있는 전문교사(Master Teacher) 직무 트랙을 신설하고, 장기적인 정서적 내상을 치유하기 위한 안식월 제도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성배 기자 te@t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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