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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에듀 | 캐나다 온타리오주 동남권 여러 학교에서 보결 교사로 근무하는 정은수 객원기자가 기자가 아닌 교사의 입장에서 우리에게는 생소한 캐나다 보결 교사의 하루하루를 생생한 경험담을 통해 소개한다. (연재에 등장하는 학교명, 인명은 모두 번안한 가명을 쓰고 있다.) |
“선생님, 이번 시간 수학 학습지 답안이에요.”
“어, 수학은 2교시였는데요.”
“아, 미안해요. 3교시라고 들어서 지금 가져왔네요.”
“괜찮아요. 다행히 답은 다 풀어줄 수 있었고, 학생들이 필기는 원노트에서 볼 수 있다고 알려줬어요.”
“그래요, 뭐든 필요하면 과학교무실로 와요.”
“네, 감사합니다.”
지난주 상지고에서 과학과 수학을 담당하는 선생님 보결을 하러 갔을 때 일이었다. 과학부장 선생님이 수업 시간을 잘못 알았던 상황이었지만, 출근할 때 과학 교무실에 들렀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일이었다.
긴급 보결 연락을 받다 보면, 수업 시작 5~10분 전에 도착하기 때문에, 아무런 수업 계획이나 학습지가 행정실에 없을 때는 할 수 없이 교과 교무실에 들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교실로 바로 직행할 때도 있는데, 하필 그런 날이었다.
행정실에 도착해서도 수업 시간표, 열쇠, 안내 서류 등 보결 꾸러미를 챙기고, 또 선생님 사서함을 확인해서 당일 근신 통지서를 포함해 담임 교실에 필요한 안내 사항을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과학실과 고학년 실용 수학 교실은 건물 끝에 있어서 가는 데도 한세월이라 더 바로 가게 됐다.
수업 종이 쳤어도 느긋하게 걸어가는 선생님들
그런데, 사실 이런 일이 생긴 건 긴급 보결이라서가 아니라 필자가 일정을 지키는 걸 중요시하고, ‘빨리빨리’가 몸에 밴 우리나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기 선생님들은 수업 시작 시간을 못 맞출까 봐 교실에 서둘러 가는 법이 없다. 잰 걸음을 하는 모습을 본 일이 없다. 정규 선생님들이야 시간 맞춰 출근하는 일도 잘 없지만, 보결이어도 서두르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물론, 사람 사는 곳인데 서두르는 일이 아예 없지는 않다. 교생 실습 때 지도교사였던 손미선 선생님은 당시 시외의 농장 집에서 쌍둥이 아기와 위에 유치원생 하나를 키우고 있어서 머리도 못 말리고 겨우 출근 시간에 맞춰 헐레벌떡 오긴 했지만, 다시 교실에 들어갈 때는 손 선생님도 절대 종종걸음으로 가는 일조차 없었다.
교사로서 학교 건물에서 뛰면 안 된다는 안전 수칙의 모범을 보이는 일이기도 하지만, 여기 문화 자체가 웬만해서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일을 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긴급 보결이면 당연히 교실에 늦게 도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교과 교무실에 들렀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수업을 시작할 때도 수업 종이 쳤는데도 천천히 수업에 필요한 세팅을 하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행정실에서도 수업 종 2분 전에 도착했어도 서둘러 대응하는 모습을 본 일이 없다. 평소대로 할 인사 하고, 서류 줄 것, 안내할 것도 느긋하게 한다.
더 바쁘면 더 일찍 시작할 뿐 서두르지 않는다
물론, 학교급에 따라 차이는 있다. 초등 보결은 아무래도 다양한 활동을 위해 수업 준비할 게 많으니 보통 훨씬 일찍 도착하는 편이다. 그러면 긴급 보결일 때는 어떻게 하느냐? 긴급 보결 교사가 시간이 필요하면 그때까지는 교장이나 교감이 자리를 지키면서 출석 체크를 하고 하루를 시작한다. 관리·감독 없이 어린 아이들을 둘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초·중학교라고 선생님이 서둘러서 뭔가 하는 일은 없다. 그냥 훨씬 일찍 와서 여유를 두고 하지. 초등 보결을 하는 국제 교사 교육 프로그램 동기 선생님은 보통 수업 시작 45분 전에는 출근한다고 했다.
짧게나마 초등학교 담임을 할 때 경험을 생각해 봐도, 처음이라 한국식 사고로 하루에 나가야 할 진도 챙기기에 바빴는데, 교장선생님이 주신 조언이 다음 수업 활동 준비할 시간에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늘 기분은 어떤지 물어보고 관계를 쌓으면서 교실을 순회하는 데 시간을 갖고 진도에 쫓기지 말라는 것이었다.
집단면접 때 초등 보결 선생님들 이야기를 들어도 하루를 시작하면서 아이들과 관계를 설정하고 하루의 분위기를 잡는 데 시간을 많이 들인다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수업 계획은 다 따르지 못해도 상관이 없었다.'
이번 주 옥토중에 갔을 때도 같은 맥락의 상황이 있었다. 오후에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야외 활동이 계획돼 있었는데 그 때문에 점심시간을 20분 단축한 것이었다. 중학생 아이들이 화장실 가고 옷 챙겨 입는 시간에 20분씩이나 필요할까 싶지만, 이곳 분위기대로 서둘러 하는 것보다 시간을 여유롭게 더 두는 선택을 한 것이었다.
‘대강화’된 교육과정과 교과서의 부재가 바탕
학교 일정에서 항상 이렇게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 선생님들보다 대단히 더 학생 중심이어서는 아니다. 교육과정 운영이 여유를 주니까 여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학교에서 진도를 교과서로 나가는 경우는 여태 본 적이 없다. 검정 교과서도 없고, 인정 교과서가 있기는 하지만, 필요할 때 부분적으로 활동지 대신에 쓰거나 일부분만 발췌해서 이용하는 정도면 많이 이용하는 거고, 아예 쓰지 않는 선생님도 많다.
그렇더라도 문제 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모든 학부모가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며, 대학 진학도 수능이나 SAT 같은 시험을 봐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과정에 대한 요구사항도 상대적으로 훨씬 덜 빡빡하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교육과정을 다 가르치길 기대한다. 사립학교의 경우 교육과정을 다 가르치는지 교육과정 운영계획을 교육부에서 직접 감사하기도 한다.
그런데, 교육과정 자체가 워낙에 포괄적으로 대강화돼 있어서 사실 특정한 내용을 일일이 다 챙겨서 가르쳐야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공립학교의 경우 일부 관리자를 제외하고는 일일이 교육과정을 다 가르치는지 점검하지도 않는다. 수업 계획은 물론이고 교육과정 운영계획조차 따로 요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곳에서 서두르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 된다. 보결 3년차가 돼가지만 아직도 이런 문화에 이숙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가끔은 수업 계획은 잊고 학생들의 상태와 상황에 맞춰 조금 기다려줘도 되는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수업 계획에 맞춰 학생들을 재촉할 때가 있다. 그러면 천천히 하는 데 익숙한 학생들은 당황스러워하고 오히려 더 안 따르게 된다.
자연의 힘 앞에 여유로워진 문화일까?
교육 제도의 영향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곳 문화는 여유롭다. 대도시는 분위기가 다르지만, 다르다고 해봤자 미국이나 우리나라에 비할 바는 아니다. 대부분의 중소 도시나 시골은 특히 더 그렇다.
그런데 이곳에 살다 보니, 여유로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긴 겨울을 나면서 길은 항상 빙판이 돼 있으니 늦었다고 운전이나 걸음을 서두르다가는 대번에 사고가 나는 게 당연한 환경이다. 때로는 눈보라 때문에 출근이나 등교를 못 하기도 한다. 그러니 하루쯤 진도를 안 나가는 건 교사의 선택이 아니라 자연의 요구다.
고등학교에서도 눈이 와서 통학버스도 시내버스도 운행이 중단되면 그런 날은 별수 없다. 출석보다 결석이 많으니, 수업하지 않고 그냥 자습이나 다른 활동을 하거나 교과 관련 영상을 함께 보는 날이 된다.
대자연이 기다리라고 할 때 애써 서두른다고 갑자기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곳에 온 첫 해는 얼어붙은 눈을 치운다고 무리하다가 눈삽이 부러졌다. 내가 서두르고 싶다고 서둘러지는 게 아닌 환경에 살다 보니 여기 사람들은 사람의 계획에 따라 자연을 극복하기보다는 자연의 순리에 맞춰 사람의 계획을 조정하는 데 익숙하다.
그런 익숙함이 자연이 아니어도 시기를 고려해 앞서 여유 있게 계획하고, 상황에 맞춰 계획을 조정하면서 여유롭게 한 발짝씩 나아가는 문화를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