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교사 이야기] 체벌이 효과적이라는 자(者)를 만날 때, 어떻게 말해야 할까?

  • 등록 2025.08.26 15:5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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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에듀 | 실천교육교사모임은 현장교사들을 주축으로 현장에서 겪는 다양한 교육 문제들을 던져왔다. 이들의 시선에 현재 교육은 어떠한 한계와 가능성을 품고 있을까? 때론 따뜻하게 때론 차갑게 교육현장을 바라보는 실천교육교사모임의 시선을 연재한다.

 


그때는 옳았지만, 지금은 적절치 않다


지난 주말 학창 시절 친구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한 친구가 “요즘 교육이 진짜 문제야. 나는 맞으면서 자라도 잘 자랐는데 괜히 유난 떠느라고 애들이 이 모양이라니까...난 아이 낳으면 꼭 체벌도 하면서 키울 거다”라고 말했다.

 

필자는 이 말을 듣고 고민이 깊어졌다.

 

교직에 종사하는 많은 이들은 지금의 교육 현장이 너무 방어적이라는 데에 공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 모두 적어도 체벌이 용납될 수는 없다는 데에는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교사가 아닌 이들 중에는 체벌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이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이들 중 많은 이들은 교육이 너무 방어적이라는 문제에 공감하고 있는 자들이다.

 

즉 ‘학교 문제에 대해 교사와 입장을 같이 하는 자들이 체벌 또한 옹호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필자는 ‘현대 우리 사회’에서 체벌이 절대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덕적 의미에서 정당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해로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번 사설에서는 체벌이 분명하게 나쁜 이유 세 가지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단, 체벌 자체가 효과적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겠다. 일단은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점까지 수용하고서 논지를 전개하고자 한다.


첫째, 폭력은 학습된다


필자가 초등학생일 때 누군가는 매일 맞았다. 맞는 것은 대체로 손바닥, 발바닥, 꿀밤이었고 가정이든 학교든 가릴 것 없이 체벌은 일상이었다.

 

‘누가 아이들을 체벌했을까?’

 

당연히 교사와 부모가 주된 체벌자였다. 그러나 그들뿐인 것은 아니다. 의외의 체벌자들이 곳곳에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숨은 체벌자에는 먼저 ‘형’이 있다. 어떤 집에서든 동생의 잘못에 대해 형이 행한 폭력은 대체로 관대했다. 물론 ‘형과 동생의 다툼에서는 “형이 더 잘못한 거야”라며 형이 혼나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떠올려 보자.

 

 

‘동생이 형에게 함부로 대든 것이 큰 잘못이라며 혼나는 경우는 본 적 없는가?’ 또는 ‘형이 동생을 잘 돌봐야지’라며 동생의 행동을 제지하지 못했을 때 오히려 더 혼나는 경우는 없었는가? 이러한 경험들은 형이 행하는 약간의 체벌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다.

 

또 다른 숨은 체벌자로는 ‘또래 친구’도 있었다. 이들은 자신이 부모님과 형에게 받은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잘못한 친구를 벌한다.

 

어깨에 주먹질하기도, 꼬집기도 했다. 대부분은 힘이 센 친구가 더 약한 친구를 괴롭혔다. 그렇지 않으면 혼내는 것이 아닌 대등한 싸움이 시작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형이나 친구가 한 건 그냥 폭력이지 체벌이 아니잖아요.”

 

그렇다. 그게 핵심이다.

 

개인이 각자가 가진 나름의 정당한 기준으로 체벌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합리적인 기준으로 이루어질 수나 있었을까? 국가가 ‘비질란테’ 같은 사적 제재를 금지하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아이의 입장에서 체벌은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휘두를 수 있는 효과적인 문제 해결법에 불과하다. 부모에게서, 형에게서 그리고 친구에게서 학습한 체벌은 수많은 다른 폭력을 낳는다.

 

그 시작이 어떤 좋은 의도이더라도 그 파급효과는 계산할 수도 없다. 결국 부모가 행한 100번의 체벌은 그 의도가 훌륭하더라도 1000개의 무분별한 체벌을 만들 것이다.

 

실제 교육 현장에서 폭력 사건이 많이 줄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매일 하루에 한 번씩은 있었던 아이들 간의 피 터지는 싸움을 가장 최근 목격한 게 언제인가? 필자의 경우 5년쯤 된 것 같다.

 

비록 ‘학교폭력’이라는 명목의 사건 수는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오히려 학교폭력에 대해 얼마나 민감해졌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실제 육체적 폭력 사태는 체벌 금지 조치 이후 분명하게 줄었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둘째, 폭력은 숨는다


앞서 어른에 의해 행해진 폭력이 만드는 파급효과를 만든다는 점을 이야기했지만, 현명한 어른의 체벌이라고 해서 언제나 합리적이고 객관적이었을까?

 

학교 교육에 부정적인 수많은 어른이 지금도 어릴 적 당한 교사에 의한 폭력의 불합리함을 기억하는 것처럼 훈육이 개개인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 이루어질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다. 그런데 체벌은 올바른 판단에서 이루어질 때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앞서 아이가 체벌을 학습하는 것처럼 어른도 체벌을 학습한다. 역치가 높아진 아이에게 더 이상 전과 같은 체벌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때 어른은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처음 손바닥을 한 대 때리기는 어렵지만 이후 열 대 때리기는 어렵지 않다.

 

대부분은 체벌의 수위를 높이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강도가 높아진 체벌에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체벌을 생각해 보자.

 

어른들은 자신의 아이를 사랑한다. 이성적인 부모도 감정적인 부모도 아이를 사랑한다. 그리고 체벌을 행하는 부모도 분명 아이를 사랑한다. 우리는 문제가 있는 부모를 바라볼 때 “그건 사랑이 아니야”라는 말하곤 하지만 필자가 느끼기에 어떤 사랑이든 괴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좋은 훈육 방법은 아이와 깊은 유대를 가진 어른이 인내심을 갖고 행하지 않는다면 그 효과를 발휘하기 힘들다. 실패를 경험한 부모는 가장 쉬운 행동 교정 방법인 체벌로 기울 수밖에 없다.

 

2024년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2023년 아동학대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에 신고 접수된 4만 8522건의 아동학대 가운데 가정에서의 학대 사례의 비중은 85.9%였다. 그리고 기준이 없는 체벌은 괴물과 같다.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체벌은 특히 기준을 잃기가 쉽다. 내밀한 공간과 내밀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나의 아이’에게 더 강한 책임감을 느끼는 부모와 자식 간의 특수한 관계 때문일 것이다.

 

기준을 잃은 체벌도 분명 사랑이란 이름으로 행해지고, 부모만을 바라보는 아이도 그것을 사랑이라 생각할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기준을 잃은 체벌조차 사랑이란 이름으로 인지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셋째, 같은 체벌이 아니다


누군가는 “나 때는 누구나 맞고 자랐지만, 충분히 잘 자랐고 지금은 감사한 마음도 갖고 있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 하나만 이야기 꺼내보겠다.

 

필자는 학교에서 많이 맞았다. 적어도 한 달에 한두 번은 피멍이 들 때까지 매질을 당했고 간혹 얼굴에 손찌검을 당하기도 했다.

 

문득 생각해 볼 때 폭력의 세기로만 따지면 그때의 폭력은 종종 들려오는 아동학대 수준과 맞먹는다. 그러나 필자와 옛 친구들이 모였을 때 이 경험까지도 추억으로 소비된다.

 

군대 이야기를 풀듯 맞은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한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어릴 적 체벌이 필자에게는 전혀 상처가 되지 않은 것 같다.

 

‘사람은 언제 상처를 받을까?’, ‘왜 똑같은 체벌도 어떤 것은 상처가 되고 어떤 것은 추억이 되는 걸까?’

 

부유한 가정에서 상대적으로 부족함 없이 자라난 둘째도 부모가 첫째에게만 챙겨준 우유는 상처가 된다.

 

끔찍한 전쟁통에 가족을 잃은 사람보다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의 상처가 더 깊을 수 있다. 어떤 고통의 크기가 같더라도 각자 고통의 깊이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필자는 많은 경우, 상처는 상대적 비교에 의해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맞고 자란 아이가 언젠가 학교에서 자신만이 맞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과연 그때에도 체벌을 여전히 사랑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자신만이 경험한 사랑의 경험(체벌)을 상식(체벌은 나쁘다)과 조율하는 과정은 아이 속에 상처를 만들 것이다.

 

결국 지금의 체벌은 우리가 어릴 적 경험한 그 체벌과 절대로 같지 않다. 그럼에도 ‘교육이 너무나 방어적이다’라는 측면에서는 현실적으로 공감하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 현장에서는 벌의 필요성에 대해 적절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록 긍정적인 훈육이 더 바람직한 방향이라 할 수 있겠지만 잘못된 행동을 정확히 지적하여 반복하지 않도록 마음먹게 하는 벌 역시도 교육의 중요한 두 날개 중 하나일 것이다.

 

정당한 기준에 따라 어떤 처벌이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해서도 발전이 있었으면 한다. 그러나 그 어떤 기준으로도 체벌은 절대 허용할 수 없다. 

 

* 이 글은 실천교사 홈페이지에 게재된 것을 일부 재가공했습니다.

김동환 한송초 교사/ 실천교육교사모임 te@t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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