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 현직을 떠난 지 벌써 3년이 되었다. 필자는 더 이상 교장실에 앉아 있지 않다. 몇 해 전과 같이 매일 아침 교문 앞에서 아이들의 얼굴을 확인하지도 않고, 생활기록부와 회의 자료에 둘러싸여 하루를 시작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교육계를 떠났다고 해서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걱정까지 내려놓을 수는 없다. 오히려 학교를 떠난 지금, 우리 교육의 현실이 더 또렷이 보인다.
아이들은 여전히 바쁘고, 여전히 외롭다. 성취를 요구받기만 하지 실패할 권리는 허락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지만 깊이 고립되어 있다.
수십 년간 학교에서 아이들의 웃음과 눈물과 고통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오늘의 교육이 너무 오래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만을 가르쳐 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돌이켜보면, 정작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충분히 응답하지 못했던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늦었지만 이제는 꼭 말하고 싶다. 청소년에게 삶(well-being)을 가르치려면, 죽음(well-dying)에 대해서도 함께 말해야 한다고 말이다.
죽음을 교육의 영역으로 들여오는 일은 여전히 불편하게 여겨진다. 아직 어리다고 아이들을 평가절하하기 전에, 아이들은 이미 죽음을 알고 있다. 뉴스에서, 온라인에서, 때로는 가까운 사람과의 이별을 통해 예고 없이 마주하고 있다. 다만 그 경험을 정리하고 의미화할 어른과 언어가 없을 뿐이다. 학교마저 죽음에 대해 침묵할 때, 아이들은 이를 혼자 견뎌야 할 것이다.
현직 교장, 교감, 평교사 시절, 위기 상황에 놓인 아이들을 수없이 만났다. 그 아이들이 공통적으로 했던 말이 있다.
“선생님,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어요.”
그 말속에는 성적도, 진로도 아닌 삶 자체에 대한 질문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질문에 얼마나 정직하게 응답했는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삶과 죽음을 함께 다루는 교육은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한함을 인식하게 하고 사고의 폭을 넓혀 보다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이다.
해외 연구와 실제 교육 사례는 죽음에 관한 교육이 청소년의 생명 존중 의식과 정서적 회복력을 높인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는 그것을 연구 보고서가 아니라, 아이들의 변화된 눈빛에서 직접 보았다고 고백하고자 한다.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학교는 곧 삶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말할 수 있는 학교다. 그런 학교에서 아이들은 실패를 끝으로 여기지 않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생명 존중 교육과 죽음 교육은 자살 예방을 넘어,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붙잡을 힘과 인간 존엄 사상을 기르는 과정이다.
원로 교육자로서 더 이상 정책을 집행할 권한도, 학교를 운영할 직책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책임만큼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믿는다. 말해야 할 때 말하는 것, 그리고 아이들의 삶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
교육은 제도 이전에 태도이며, 지식 이전에 사랑이다. 아이들의 삶을 진심으로 아끼고 존중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불편함 뒤에 숨지 말아야 한다. 삶의 기쁨만을 이야기하고 죽음을 침묵하는 교육은 결국 아이들을 홀로 두는 일이다.
때로는 교실에서, 수업에서 버킷리스트 작성 교육을 병용해 보라. 과거 독일 대학은 철학 시간에 이를 입증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적어보라 했더니 한참이나 망설이던 학생들이 내일이면 생을 마감한다고 가정하고 하고 싶은 일을 적어보라고 하자 종이 위를 까맣게 채웠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교육계의 서사이다.
필자는 이제 교육의 현장 한 발짝 밖에서 부탁하고자 한다. 학교가 보다 아이들의 삶 한가운데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삶을 온전히 가르치기 위해, 죽음도 함께 이야기하는 용기를 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이들은 마냥 보호받아야 할 사랑스러운 존재이지만, 삶을 스스로 살아갈 준비가 필요한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