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에듀 | 최근 정을호 더불어민주당 의원(국회 교육위원회)이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냈다. AI 디지털교과서를 포함한 모든 교과서 선정 과정에서 학부모의 의견 수렴을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명백한 교육적 판단 구조의 변형이며, 학교 자율성과 교사의 전문성을 제도적으로 훼손하는 시도이다.
교과서는 단순한 학습자료가 아니다. 그것은 교육과정을 현실의 교실로 옮겨오는 도구이며, 수업 설계의 출발점이다. 특히 AI 디지털교과서는 기술과 교육이 융합된 형태로, 학생의 학습 데이터를 분석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실시간 맞춤형 학습을 제공하도록 설계되었다.
‘내용이 좋다’, ‘디자인이 좋다’ 같은 피상적 비교로 판단할 수 없다. 같은 과목, 같은 문제라 하더라도 AI 디지털교과서 업체마다 피드백을 제공할 때 주안점이 다르기에, 지역·학년·학생들의 전반적인 성향으로 고려한 신중한 선택이 필요하다. 따라서 판단의 중심에는 반드시 교육과정 운영 주체인 교사와 학교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의견 수렴 아닌 권한 박탈일 뿐, 설득해야 하는 교사
이번 개정안은 교과서 선정에 있어 학부모 의견을 ‘의무적으로 수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현장 경험을 가진 교사들은 이 문장이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결정을 미루는 구조로 작동하게 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의견 수렴이 ‘참조’나 ‘권고’의 성격을 넘어 법적 의무로 규정되는 순간, 교사의 결정은 언제든 외부 절차로 재검토되어야 하는 대상이 되어 버린다. 결과적으로 교사는 학생들을 가르칠 교과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교과서를 선정하게 해달라며 학부모를 ‘설득’해야 하는 상황으로 밀려난다.
교과서 선정조차 정치화·여론화될 가능성이 높아지며, 그로 인한 갈등은 교사가 책임져야 할 것이다.

이미 있는 구조 위에 불신을 덧씌우는 입법
물론, 학부모의 의견은 중요하다. 교사와 학부모는 아이의 성장을 위해 협력해야 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협력만큼 중요한 것이 전문성이다. 현행 학교운영위원회 제도, 학부모 설명회, 공개수업 등 이미 존재하는 구조만으로도 학부모의 의견은 충분히 전달될 수 있다.
지금도 교과서 선정 과정에는 각 학년별 협의회, 교육과정 분과, 학교운영위원회 보고 및 검토 등 다단계 검토 절차가 존재하며, 이 과정에서 이미 학부모 및 지역사회의 의견은 충분히 반영되고 있다.
기존의 구조를 무시한 채, 학부모의 동의를 법적 의무 절차로 끌어들이는 방식은 신뢰 기반의 교육 협력과정을 절차 기반의 갈등 구조로 전환하는 역효과를 낳는다.
결정은 학부모가, 책임은 교사가
이 법안이 특히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교사의 책임’을 유지한 채 ‘교사의 권한’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교사는 여전히 수업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학습 성과, 수업 만족도, 학생과의 관계 모두 교사의 몫이다.
교과서 선택의 결정권이 외부 절차에 의해 제한된다면, 그 결과 역시 외부에서 책임져야 한다. 그럴 수 있는가?
수업에서의 오류나 부적절한 반응, 학생과의 정서적 마찰이 발생했을 때, 그 책임은 교사가 진다. 책임과 권한의 비대칭은 곧 교사의 판단을 소극적으로 만들고, 교육 전체를 방어적으로 재구조화하게 만든다. 교사가 책임지는 구조에서 권한을 박탈하는 것은, 결국 ‘무난함’으로의 퇴보를 유도한다.

복지부동의 강요, 도전과 상상력을 잃은 수업
또한 이 법안은 교사를 행정절차의 중간관리자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다.
교과서 선정 과정이 외부 의견 수렴 중심으로 재편되면, 교사는 교육과정 설계자이기보다는 절차의 설명자 역할에 머무르게 된다. 논쟁의 가능성이 있는 교과서는 피하고, 의견 충돌을 최소화할 수 있는 선택지를 찾게 될 것이다.
교육의 다양성과 실험 정신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매뉴얼화된 교육과 표준화된 책상 배열뿐이다. 아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교육적 상상력은 구조적으로 차단된다.
도입 초기부터 현장을 흔드는 입법
더욱이 본 개정안은 시기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렵다. AI 디지털교과서의 도입 초기 단계에서, 현장의 혼란을 줄이고 안정된 이행을 지원하는 것이 정부와 국회의 역할이어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이 시기에 교사의 판단을 제약하는 법안을 발의한다는 것은, 교육정책의 일관성과 진정성 모두를 의심케 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 기반 교육 환경에서는 현장의 유연성과 판단력이 가장 중요시된다. 이를 의심하고 통제하려는 입법 시도는, 정책적 역행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즉각적인 법안 철회, 정치로부터의 교육 자유화를 요구한다!
이 같은 이유로 정을호 의원은 교과서 선정 시 학부모 의견 수렴을 의무화하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즉각 철회해야 한다.
정치권은 교육정책을 여론과 정쟁의 수단으로 삼지 말고, 교육의 본질과 책임 구조를 존중하는 입법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교육부도 교과서 선정과 관련한 행정 지침에서 교사의 자율성과 학교의 결정권을 명확히 보장해야 하며, 학부모 의견은 충분한 정보 제공과 상호신뢰 속에서 유연하게 반영되어야 한다.
교육은 행정이 아니다. 수업은 설명이 아니라 만남이며, 교과서는 단순한 책이 아니라 교사의 손에서 다시 구성되는 교육의 구조다.
교과서를 고를 수 없는 교사는 수업의 주인이 아니며, 수업의 주인이 없는 교실에서 아이는 방향을 잃는다.
이 법안이 만들어 내려는 ‘절차 중심 교육’에 반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