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 18년간 기자 생활을 하다 소위 말하는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되어 교육감을 보좌하는 비서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반절 가량을 글쓰기란 업을 갖고 살아왔는데, 새 옷을 입고 여러 가지 이유로 한동안 글쓰기를 멈췄습니다. 그러자 내 마음 한구석에 공허함 그 비슷한 마음이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책 한 권을 읽고 에세이를 써보기로 다짐했습니다. 지난해 2월 호기롭게 시작한 이 다짐은 지금도 꾸역꾸역 이어가고 있습니다. 책을 통해 내 안의 나와 만나는 일은 제 삶을 더욱 반짝이게 한다는 걸 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나는 걸으면서 나의 가장 풍요로운 생각을 얻게 되었다. 걸으면서 쫓아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생각이란 하나도 없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요 며칠 머리가 좀 무거워 대청호반을 무작정 걷기로 했다.
반짝이며 너울거리는 호반의 윤슬은 유난히 눈부셨지만 슬퍼 보였고, 피부에 와닿는 강바람은 아직 찼다. 두 발은 바쁘게, 두 눈은 봄 맞을 채비에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풍경을 바라본다.
둘레길 한 바퀴를 다 돌고 나니 무거웠던 마음도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과 함께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건너편에서 오는 몰티즈를 보고 우리집 강아지 푸딩이가 짖어 대 벤치에 앉아 뉴스와 sns를 기웃거린다.
자연을 눈에 담고 돌아와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를 펼쳤다.
이 책의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는 188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베를린대학교와 빈대학교에서 철학과 문학을 전공하고, 시와 단편 소설을 발표해 명성을 쌓았고 세계 여행을 하면서 여러 나라의 작가, 유명인사와 교류했다. 1938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1940년에는 미국으로, 1942년에는 브라질로 건너가 그해 2월 페트로폴르시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는 그가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남긴 미공개 에세이다.
이 책에 실린 아홉 편의 글 중에서 내게 가장 큰 위로와 지혜를 준 글은 ‘센강의 낚시꾼’이다.
작가가 80여 년 전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 속에는 인생의 진리와 삶의 가치 척도를 판단하는 기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하고 아름답게 담겨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대청호의 반짝거리는 강물이 몇 번이고 스쳐 지나갔다.
최근 몇 달간 가슴이 답답했던 이유는 온 나라가 고통 속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나만 1인칭 시점이 아닌 관찰자적 시점에서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이 점점 짙어져 바쁘다가 좀 한가해지기라도 하면 울적함이 밀려오곤 했는데 이 책을 읽고 마음에 짐이 덜어졌다. 저자는 루이 16세가 처형되는 날의 일화를 예로 들었다.
광장에는 안달하는 군중들 위로 단두대가 우뚝 솟아 있었다. 왕은 팔이 묶인 채 계단 위로 끌려 올라가고, 번쩍이는 칼날이 떨어지고, 기름 부음 받은 프랑스 왕의 피 묻은 머리가 바구니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군중들은 일제히 열광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공화국은 최종 승리를 축하했다. 금세기 최대 사건이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그 책의 저자가 다소 분개하며 적었듯이, 역사적으로 잊을 수 없는 이 순간에 콩코르드광장과 단두대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는 센강에서 수많은 낚시꾼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낚시로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대단한 광경에 등을 돌리고 서서 강물에 떠 있는 코르크 찌만 노려보았다. 국가 최대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음을 알리는 군중의 환호에도 그들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p52-53
작가는 젊은 시절, 이 사소한 일화를 처음 읽었을 때 사실이라고 믿고 싶지 않고, 강한 거부감이 일었다고 한다.
역사적인 순간에 그런 이기적인 무관심이라니, 말도 안 된다며... 하지만 시간이 좀 흐른 후에는 그 시간에 유유자적 센강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을 경멸한 것이 어쩌면 부당했던 게 아닐까? 분명 그 낚시꾼들도 늘 그날처럼 시대에 무관심하진 않았을 터라며 생각을 바로잡았다고 한다.
우리는 적어도 프랑스혁명이나 종교개혁 못지않게 극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 시대에도 매주, 매일이 역사적 사건들로 가득하다. 수백 년 된 제국이 무너지고, 인간의 자유를 빙자한 사상 최대의 전쟁이 진행 주이다. 매일, 매시간 새로운 긴장이 닥치고, 후세 젊은이들은 이 엄청난 세계적 격변을 목격하고 거기에 참여한 우리를 무척이나 부러워할 것이다. -p53-54
그런데 이 시대의 우리는 정말로 세계적 격변을 모두 목격하고 그것에 빈틈없이 참여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렇게 묻는 게 더 낫겠다. 이 시대의 우리는 쏟아지는 이 모든 사건을 매일, 매시간 주의를 기울여 따라갈 여력과 참여의식을 충분히 가졌을까? 솔직하게 자문해 본다면, 우리 중 누구도 이렇게 끊임없이 닥치는 높은 긴장에 대처할 여력이 없고, 우리는 그저 이따금 좌절과 절망의 눈으로 사건을 바라볼 뿐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p54-55
나라가 곧 멸망할 것 같은 극한 갈등과 위기 상황, 역사적 중대한 사건들은 수 백 년 전에도 수천 년 전에도 끊임없이 계속 되어왔다. 그런데도 우리가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이 엄청난 고통의 시대에도 자연은 끊임없이 순환하고, 어떤 중단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수많은 역사적 사건 그 위에는 늘 위대한 자연이 있었다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도층은 극단으로 치닫는 정치 행위에 환멸을 느끼고 적극적인 정치 참여 행위보다는 일상을 이어간다.
어쩌면 한 발짝 떨어져 더 객관적으로, 더 날카로운 매의 눈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늘 선거철이면 캐스팅보트, 선거 바로미터란 수식어가 붙는 충청도, 충북의 중심 청주에 살면서 가끔 마음이 불편한 건 때때로 마음을 숨기는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너져 가는 세계를 건설하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우리는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명령에 순종하게 된다는 작가의 글처럼 순리대로 흘러가리라.
“가장 무의미한 파괴가 벌어지고 있고,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끌려가는 것을 알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숨을 쉬고 자고 먹을 수 있겠습니까? 창작은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가장 악의적인 파괴가 현재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뭔가를 만들 수 있겠어요!”
- 1940년 11월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쿠바의 동료 작가를 위해 <알폰소 에르난데스 카타릴 위한 추도사>에서
그가 강조한 내용은 츠바이크 자신에게도 적용되었다. 그의 호탕한 성품에 모두가 그의 내적 풍요를 공유하고 싶어 했다. -p139-140
내게 많은 깨달음을 준 슈테판 츠바이크, 동시대를 살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바로 곁에서 들려주는 것만 같았던 값진 위로가 이 책 곳곳에 묻어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