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ㅣ18년간 기자 생활을 하다 소위 말하는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되어 교육감을 보좌하는 비서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반절 가량을 글쓰기란 업을 갖고 살아왔는데, 새 옷을 입고 여러 가지 이유로 한동안 글쓰기를 멈췄습니다. 그러자 내 마음 한구석에 공허함 그 비슷한 마음이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책 한 권을 읽고 에세이를 써보기로 다짐했습니다. 지난해 2월 호기롭게 시작한 이 다짐은 지금도 꾸역꾸역 이어가고 있습니다. 책을 통해 내 안의 나와 만나는 일은 제 삶을 더욱 반짝이게 한다는 걸 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

좀 무던하면 좋으련만 매사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혹시 모를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는 소심하기 짝이 없는 A형의 기질 탓일까?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경우) 조금만 신경 쓰는 일이 있으면 소화가 잘 안되는 편이어서 어릴 때부터 가스활명수를 종종 먹곤 했다. 좀 심하다 싶으면 엄마에게 달려가 손을 따달라고 했었다. 내 배를 문지르는 엄마의 따뜻한 손이 좋았고, 하얀 실로 꽁꽁 묶은 엄지손가락을 바늘로 콕 찌르고 나면 손가락 위로 검붉게 올라오는 피를 보며 엄마가 하는 말은 꿀같이 달콤했다.
"많이 아팠겠네. 체했네 체했어. 이제 손 땄으니까 곧 괜찮아질 거야" 하며 내 등에 큰 원을 그리며 날 포근하게 안아주던 그 느낌. 최근 한 3주 넘게 아들이 소화가 잘 안된다고 해 지지난 주말 아침 내과에 데려갔었다.
"크게 이상은 없는데 이번 주도 약 먹어보고 증상이 비슷하면 수면 내시경 한 번 해 보죠"
"엄마 나 약 먹어도 별 효과가 없는 거 같은데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수면 내시경 한 번 해볼까?"
이른 아침 병원에 가면서도 몹쓸 유전자 탓이라며 속으로 되뇌며 미안한 마음이었다. 내시경을 받기 위해 가운으로 갈아입은 아들을 보니 기분이 이상하다. 수면내시경 보호자 동의서에 사인을 하고 기다리는 동안 엄마가 권해준 한정원의 <시와 산책>을 읽었다. 병원 대기실 티브이에는 꽤 오랜 기간 지속되고 있는 여야 정쟁과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번지고 있는 화재 소식이 연이어 보도되고 있었다. 뉴스 화면을 바라보다 가슴이 갑갑해져 병원 구석 의자에 기대에 책을 읽기 시작한다. 출근길 집을 나서는데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책에 보면 겨울에 말을 타고 언 강 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듬해 봄에 강이 풀리자 그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데. 강이 얼 때 소리도 같이 봉인되었다가, 강이 풀릴 때 되살아난 것이란 내용이 있는데 이 글을 읽다가 갑자기 우리 엄마 목소리가 생각이 안 나는 거야. 외할머니 살아계실 때 요양원에서 얘기하고 사진 찍었던 그 얼굴은 또렷이 기억이 나는데 엄마 목소리가 아무리 떠올려도 생각이 안 나. 어쩜 그럴 수 있지? 소리를 녹음해 둘걸 그랬어"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생각이 안 나서 슬프다는 우리 엄마.
매일 화장대 위에 놓인 할머니와 엄마가 찍은 사진을 보며 스킨을 바르고 머리를 말리면서도 단 한 번도 목소리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메마르고 건조한 병원 대기실에서 한정원 작가의 에세이를 읽다가 엄마의 그 시리고 애달픈 마음이 느껴져서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난 나중에 엄마의 목소리를 오롯이 기억할 수 있을까?
운이 좋다면 언 강에서 겨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나와 그녀는 한참 강 앞에 머물다가 문득 심장을 내려 앉히는 큰 울림을 들었다. 먼 산속에서부터 오는 짐승의 울음 같기도 했지만, 사실 그건 눈앞의 강 깊은 한 곳에서 얼음이 녹아 부서지는 소리였다.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두렵고도 아름다웠다. 눈에 보이지 않아 더 그랬을 것이다. 방금 들었던 소리가 환청으로 느껴질 만큼, 언 강은 견고한 모습 그대로였다.
어쩌면 강도 영영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있어, 소리를 얼려두나 보다. 어느 때 산과 땅을 울리도록 그리운 소리가 터져 나오기를 기다리며, 얼음 모자를 쓰고 있는지도.
우리는 그 소리를 한 번 더 듣기를 바라면서 말없이 서 있었다. 더 없는 겨울의 마음으로.
한정원 <시와 산책> 中 <추운 계절의 시간을 믿어보자> p20
다음 주 부모님께서 튀르키예로 여행을 떠나신다. 여행 기간 생일을 맞이하는 엄마를 위해 동생네 가족과 함께 엄마 생신 파티를 했다. 친구네서 우아하고 잔잔한 톤의 꽃바구니를 맞추고 오랜만에 엄마에게 손 편지를 썼다.
“카톡이 생기면서 손 편지 쓰는 일이 참 드문데 매년 손 편지를 받고 소녀처럼 좋아하는 엄마 얼굴이 떠올라 이맘때면 엄마에게 손 편지를 쓰게 되네. 엄마와 함께 보낸 지나온 세월과 함께한 오늘, 그리고 함께할 우리의 내일을 자꾸만 생각하게 돼. 내가 기자를 그만두고 글쓰기를 멈춘 뒤 마음 한구석에 조그마한 구멍 같은 게 생겨 어디선가 찬 공기가 기어들어오는 것 같았는데, 작가로 등단한 엄마와 같은 책을 읽고 바쁜 일상 속 틈틈이 나눈 우리의 대화는 하루의 비타민이 되기도 해.
엄마가 추천해 준 한정원의 <시와 산책>은 모처럼 글 다운 글을 마음으로 읽은 느낌이야. 참 좋았어. 병실 구석에서 읽다가 가끔 지친 사람들을 얼굴을 쳐다보고 생각에 잠겼다가 또다시 책으로 빠져드는데 신기하게 엄마 목소리가 들렸어. 외할머니 목소리가 생각이 안 나 슬프다는 그 말. 평생을 함께한 엄마 목소리가 아무리 떠올려도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공기처럼 말이야. 그 말을 하는 엄마의 표정은 두려움에 찬 아기 같았어. 엄마가 그 말을 할 때. 엄마도 할머니의 딸이었는데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었을까? 그래서 난 오늘 저녁에 있을 엄마 생일 파티에 가족들의 목소리를 영상으로 담을 예정이야. 함께 웃고 노래하는 그 모습을. 사랑해! 엄마.”
자신을 산책자이면서 수집가라고 말하는 저자는 눈을 기울이고 귀를 기울이며 걷는 동안 세상을 이해하고 깨달은 나름의 사유를 섬세하고 수려한 문체로 표현한다. 덤으로 중간중간 나오는 세계의 시인들의 시를 음미하는 기쁨은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이다.
방 안에 있을 때 세계는 내 이해를 넘어선다. 그러나 걸을 때 세계는 서너 개와 구름 한 점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한정원 <시와 산책> 中 <사물의 표현에 대하여> 월러스 스티븐즈
뭐 그리 대단하지 않더라도 피곤함을 뒤로하고 강아지와 함께 걷는 산책길에서 마주한 목련. 지난해 봤던 아파트 가로등 아래 벚꽃이 만개하기 전 팝콘 같은 꽃망울을 본 것만으로도, 친구와 함께 극장을 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 만이라도... 고된 일을 마치고 잠깐씩 마주하는 가족과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는 요즘.
화마가 휩쓸고 간 처참한 현장을 뉴스에서 볼 때마다 나의 이런 일상의 평온함마저 미안해지는 요즘.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라서 더 먹먹해지는 오늘. 그래서 오늘 엄마의 생일은 더욱 특별했다.
# 이 글은 브런치에 실린 것을 재구성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