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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교사의 눈 - 고교학점제] 선택으로 포장된 불평등

더에듀 | 올해 고1 대상 전면 도입된 고교학점제에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새 정부도 이 같은 문제의 인식 속에 몇몇 대책을 내놨지만, 이 또한 논란에 빠지면서 가야 할 길이 험난한 상황이다. 국회는 국정감사를 맞아 고교학점제에 대한 집중 검증에 나서는 등 대책 마련에 분주한 상황이다. 이에 <더에듀>는 교사노조연맹 소속 교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고교학점제가 현장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 살피면서 교사들의 주장을 확인하고자 한다.

 

 

“선생님, ‘기후변화와 환경생태’랑 ‘기후변화와 지속가능한 세계’는 무슨 차이에요?”

“선생님, 2학년 선택과목이 56개나 돼요. 그중에 10개를 고르라는데... 진로도 아직 모르겠어요.”

 

과목 선택을 앞두고 아이들의 질문은 끝이 없다. 교사들은 하루 일과 전후의 시간을 쪼개 상담하며 학생들과 함께 고민하지만 학기마다 달라지는 과목 편제와 상대평가 속에서 어떤 과목이 아이에게 적합할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고교학점제는 ‘학생 중심 제도’라고 한다. 학생이 적성과 진로에 맞게 과목을 선택하고, 학교·공동·온라인 교육과정 등 다양한 경로로 배움을 이어가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학생’은 매우 이상적인 존재이다. 자기 이해가 높고, 입시에 휘둘리지 않으며, 자신의 학업 수준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그에 맞는 과목을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한 과목을 통해 학력을 향상하려는 의지와 책임감을 지닌 학생이다. 또한 안정된 가정과 주거 환경 속에서 학교 이동 없이 계획한 과정을 그대로 이어갈 수 있는 학생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입시의 유불리 앞에서 ‘하고 싶은 공부’보다 ‘점수가 유리한 과목’을 골라야 하는 현실은 차치하더라도, 많은 아이는 아직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

 

많은 아이는 고1에 자신의 진로를 정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하는지, 무슨 일을 하고자 하는지를 경험하고 탐색할 기회조차 없다.

 

한 학생이 찾아왔다.

 

“선생님, 저는 간호학과를 가고 싶었는데요, 생명과학을 들어보니까 너무 어렵고 의료계열이 저랑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근데 지금 과목을 바꾸면 학생부가 다 꼬인대요. 자퇴해야 하나 고민이에요.”

 

다른 학생의 이야기도 있다.

 

“선생님, 저는 공부를 잘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래도 학교 오는 것이 좋았는데, 자꾸 최성보에 걸려서, 학교를 그만 다녀야 하나 싶어요.”

 

이 아이의 엄마는 오랫동안 편찮으셨고, 아빠는 늘 늦게 귀가했다. 어릴 적부터 동생들 밥을 챙기고, 청소기를 돌리고, 가끔은 부모 대신 동생들 학교의 연락도 받았다. ‘내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던 시간들이 쌓이며 학습 결손도 함께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늘 주눅 들어 있었지만 말을 조리 있게 잘하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아이였는데, 고교학점제 안에서 이런 학생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는다.

 

 

“진로를 정하라”, “과목을 선택하라”, “책임을 져라”라며, 제도는 쉼 없이 선택과 판단을 요구한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라’는 말은 자율이 아니라 폭력이다. 특히 ‘최성보 대상자’라는 낙인으로 아이들은 더 자신감을 잃고 학교 내에서 설 곳을 잃는다. 결국 학교가 품어야 할 아이들이 학교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다.

 

고교학점제는 ‘모든 학생이 자기 주도적으로 진로를 설계할 수 있다’는 가정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그 가정은 현실의 복잡한 삶과 불균등한 여건을 외면한 채, 가장 이상적이고 평탄한 학생만을 중심에 둔다. 다양한 아이들의 상황과 사정은 고려되지 않은 채, 제도는 오직 평균적이고 모범적인 학생상을 기준으로 설계됐다. 그 결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의 어려움과 소외는 제도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정서적 어려움 등으로 그저 학교에 꾸준히 나오는 것만으로도 대견한 학생도 있다. 가정 사정으로 잦은 이사와 전학을 반복해야 하는 학생들도 있다. 이들에게 똑같이 선택과 책임을 요구할 수 있을까?

 

'역학과 에너지, 물질과 에너지, 지구 시스템과학, 역사로 탐구하는 현대세계, 과학의 역사와 문화, 인문학적 감성과 역사 이해, 기후변화와 환경생태, 기후변화와 지속가능한 세계...'

 

이름 조차 외우기 힘든 과목들 속에서 학생들은 또 혼란하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학생들은 무엇을 배우는지, 자신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이해하기 어렵다. 이 복잡한 구조 속에서 ‘이상적인 학생’과 ‘현실의 학생’의 간극은 더 넓어진다.

 

학교 안에서는 담임과 진로교사가 상담을 이어가고, 교육부는 진로·학업 설계 집중 상담 서비스를 마련했다. 그러나 학부모와 학생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불안하다. 이 틈을 타 고액 진로 컨설팅과 과목 선택 전략 서비스가 성행하고, 돈을 주고라도 더 많은 정보를 얻으려는 수요는 오히려 커지고 있다. 결국 제도가 내세운 ‘선택의 자유’는 또 다른 형태의 격차와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고교학점제는 다양하고 복잡한 경로를 학생들에게 제시한다. 그러나 모든 학생이 그 복잡함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선택은 자유가 아니라 불안이며, 기회가 아니라 배제일 수 있다.

 

진정한 ‘학생 중심 교육’은 선택이 아니라 기초에 있다. 특히 교육적 자원이 부족한 아이들에게는 편향된 선택보다 기초기본 소양이 더 절실하다. 읽고 쓰고 말하는 능력, 문제를 해결하고 협업하는 능력,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능력 등이 먼저 길러져야 비로소 진로를 향한 선택도 가능해진다.

 

다양한 선택지만 잔뜩 늘어놓고 그것을 자유라 부르지 말자. 교육의 역할은 아이들이 앞으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진짜 힘을 길러주는 일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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