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에듀 | 공교육은 입시와 경쟁, 시험, 서열 등으로 아이들의 생각과 삶을 단단하게 고정해 놓고, 삶 자체를 좋은 성적,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이라는 정해진 트랙 위에서 움직이게끔 한다. 이 트랙을 성실하게 달리는 사람에겐 모범 학생이라는 훈장을 준다. 그런데, 울산 최초의 공립 대안중학교인 울산고운중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순응적이고 수동적인 삶을 넘어 저항적이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양한 시도들을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철학 수업을 통해 아이들에게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과 삶에 대한 사색의 의미를 알려준다. 이에 <더에듀>는 아이들이 자유롭고 비판적인 사유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꾸려가는 데 도움을 주는 박상욱 철학교사의 수업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는 “교육이 경쟁과 입시로부터 자유로울 때 아이들의 철학적 사유는 더욱 풍요로워지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더욱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
뉴스를 보면 매일 같이 잔혹한 범죄들로 가득 차 있다. 단순 폭행부터 사기와 살인까지 다양하다. 이제는 범죄나 사고가 없는 뉴스를 보는 것이 뭔가 더 어색하고 비일상적인 일이 되어 버린 듯하다.
이런 뉴스들을 보면 인간은 악한 존재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반대로 평생을 어려운 상황에서도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한 사람들도 있다.
과연 인간은 본성은 선할까? 악할까? 둘 다 아니라면 새하얀 백지로 태어나는 걸까? 이러한 질문은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떠올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철학사적 맥락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논쟁은 맹자, 루소로 대변되는 성선설과 순자, 홉스로 대변되는 성악설이 있다. 로크는 백지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인간의 본성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교육의 역할도 달라진다. 성선설에 따르면 교육은 인간의 선한 본성을 잘 보존하고 드러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반면 성악설에 따르면 교육은 악한 본성을 억제하고 사회적 규범과 예를 통해 선한 방향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을 나누는 선과 악이라는 기준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걸까? 이러한 질문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철학 분야가 윤리학이다.
윤리학은 선과 악을 다룬다. 도덕이 선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이야기한다면 윤리학은 선과 악이 무엇인지, 그것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묻는다.
철학적인 사유를 접해보지 않았다면 선과 악은 처음부터 당연하게 주어진 정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그러한 당연함의 사유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다. 대표적으로 현대 철학의 포문을 연 니체는 『선악의 저편』이라는 책을 통해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유에 대해 도전했다.
선과 악은 본래부터 절대적으로 나누어진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타고난 본성에서 온 것인지, 사회적 평가의 결과인지, 생물학적 진화의 결과인지, 신의 명령인지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오늘날의 학교는 이러한 논쟁에 가장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어 있지만, 논쟁 자체를 깊이 다루지는 않는다. 오히려 선과 악이라는 것이 본래부터 정해진 것으로 인식한다.
학교의 역할은 선과 악에 대해 탐구하는 장소가 아니라 선한 인간을 양육하는 사회화의 장소로 바라본다. 학교가 바라는 인간이 과연 선한 인간인지, 성공한 인간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단단하게 굳어진 학교라는 체계 속에서 선과 악에 대한 철학적인 탐구는 굉장히 무모하고 위험한 시도일 수도 있다. 개인과 사회의 신념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는 시험대에 올라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런 시도 자체가 공동체와 사회의 혼란을 조장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러한 시도에 어떠한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선과 악이라는 무겁고 주제를 재미난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며 즐긴다. 물론 그러한 놀이의 공간 속에서 아이들의 탐구는 진전되고 사유는 깊어진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선악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된다.
오늘 우리가 읽은 소설 『마크 Mark』에서는 범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에 대해 소설 속 한 친구가 “사람들은 범죄를 저지르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는 거야!”라고 말했다. “범죄를 저지르려는 성향이라는 것이 뭘까? 그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거야?”라는 질문이 교실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이 질문을 제기한 순간, 내 머릿속에는 20세기 초반에 범죄를 성향이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한 골턴의 우생학이 떠올랐다.
이후 질문 만들기와 분석 시간을 거쳐 최종적으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가 최종 토론 질문으로 선택되었다. 이에 대해 처음부터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어 하던 민성이부터 의견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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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성: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본능이나 욕망 같은 것도 이기적인 거 아닌가요? 인간의 욕망 안에 악이라는 것도 존재하는 것 같아요. 주윤: 맞아요. 아기를 보면 자기만 생각하잖아요. 유진: 아기가 왜? 아기는 귀엽잖아! 주윤: 귀여운 것과 이기적인 것은 달라. 자기만 생각하잖아. 울고 싶을 때 울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말이야. 그리고 배고프면 주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고 마구 울어. 유진: 그건 몰라서 그런 거지. 민성: 그러니깐 말이야. 사람은 모르면 이기적이 되는 거야. 그러니깐 타고난 본성은 악한 거지. 지성: 오! 민성이 오늘따라 논리적인데!! |
민성이는 인간이 본래 가지고 태어나는 욕망이 악한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물론 철학적으로 엄밀히 말하면 욕망과 욕구는 구분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이 말하는 것은 욕구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에 대해 엄밀한 개념 규정은 하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아이들의 토론 진행을 방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론에서 욕망과 욕구의 개념 규정이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미 교실의 언어 놀이 속에서 충분히 의미가 규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민성이에게 욕망은 부정적인 본능이자 암묵적으로 통제되어야 할 대상으로 느껴졌다. 이러한 암묵적인 의미 규정을 명시적으로 드러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토론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질문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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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도대체 욕망이 무엇을 의미할까? 준이: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요. 자기가 원하는 것이 욕망하는 거 아닌가요? 주윤: 생존본능 것도 일종의 욕망일 것 같아요. 지성: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성격 같은 건가? 나: 그럼 욕망을 가지는 것이 악한 거라고 생각해? 아름: 그건 아니예요. 그건 그냥 가지고 있는 거예요. 주윤: 잘 생각해 보세요. 배가 고프다고 해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악한 거잖아요. 유진: 배가 고프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기는 해. 민성: 생각이 갑자기 바뀌었어요. 배가 고파서 음식을 먹고 싶어하는 것은 욕망이지만,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 같아요. 나: 그게 왜 다르다고 생각해? 혹시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해? 지성: 음...그렇네. 배가 고프다고 무조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것은 개인의 판단이에요. 민성: 그게 제 생각이에요. 본능과 판단은 구분해야 할 것 같아요. |
이 지점에서 아이들은 생각을 급격히 방향을 바꾸었다. 특히 민성이의 발언이 인상적이었다. 처음의 강력하게 주장했던 본인의 의견을 과감하게 수정한 것이다. 처음 민성이는 본능과 욕망은 악한 것이며 통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후에는 본능과 판단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탐구공동체에서 자기 수정이 가지는 교육적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개개인이 가지는 오류가능성과 불완전성은 탐구공동체 속에서의 자기 수정을 통해 더 나은 의견으로 나아간다. 자기수정은 탐구공동체에서 지식, 판단, 평가의 정당성을 보증해주는 인식론적 장치이다.
이 대화에서 아이들이 구분하기 시작한 개인의 본능과 판단의 구분은 근대의 이분법 즉, 욕망과 이성, 사실과 가치, 신체와 정신, 자연과 인간 구분의 연장선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이 말한 본능과 판단의 구분 이면에는 의도라는 개념을 담고 있는 듯했다. 즉 의도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나누는 것이다. 이렇게 암묵적으로 들어있던 개념은 이어지는 대화에서 서서히 표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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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악한 것은 개인의 욕망이 아니라 판단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나: 왜 그렇게 생각해? 유진: (머뭇거리며) 음... 준이: 의도가 있으니까요. 의도가 없으면 악한 것이라고 볼 수 없어요. 유진: 맞아요. 그러니깐. 아기도 악하다고 볼 수 없어요. 지성: 당연하지. 아기는 의도를 가지고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니니깐. 나: 도대체 악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승우: 선과 악이라는 것도 인간이 만들어 낸 것 아닐까요? 유진: 그게 무슨 말이야? 승우: 태어날 때부터 선과 악이라는 것이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 그럼 악은 어떻게 생겨나는 건데? 주윤: 사회적 평가인 것 같아요. 나: 인간의 사회적 평가 없이는 선과 악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구나. 지성: 아기는 생각이나 의도가 없잖아요. 그런데 두뇌가 발달하면서 생각을 하게 되고, 악한 마음도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
토론은 선과 악이 개인의 의도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지점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아이들은 개인의 의도를 선과 악으로 나누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관심을 두지 않는 듯 했다. 선과 악이라는 것을 나누는 궁극적 기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리다 질문을 던졌다.
‘대체 악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질문을 하며 일부러 좀 더 과장된 억양과 제스처를 보였다. 정말 이 질문이 중요하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전달하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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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럼 태어날 때부터 악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는다고 생각해도 될까? 승우: 맞아요. 선과 악의 기준은 사회적 평가에서 나오는 거구요. 그걸 배우기 전까지 선과 악은 판단할 수 없어요. 주윤: 그럼 사회나 타인이 없으면 악도 없는 거야? 수진: 그렇지 않을까? 혼자서는 사회적 평가를 내릴 수 없으니깐. 예성: 저는 동의하지 않아요.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는 태어날 때부터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잖아요. 주윤: 외부적인 영향 없이도 악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거야? 예성: 맞아. 타인에게 공감도 못하고, 폭력도 자연스럽게 쓸 수 있으니깐 말이야. 나: 타인에게 공감을 못하는 것은 악이라는 건가? 지성: 그건 하나의 사실이에요. 악한 의도로 타인을 해치거나 공동체에 피해를 주면 당연히 악이죠. 그걸 가르쳐야 해요. 수진: 공감을 못해도 악한 행동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 주윤: 앞에서 악한 의도라는 것도 사회적 평가 때문에 나온다고 했어요. 나: 그럼 그 사회적 평가를 알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지성: 그래서 제가 말했잖아요. 아기는 악하거나 선하다고 할 수 없어요. 사회적 평가를 배우기 전이니깐. 의도가 없기 때문이에요. 나: 지성이 말은 선하거나 악한 마음도 배워야 가질 수 있다는 거네. 그런데 선과 악이 사실이라고 생각해? 평가의 결과라고 생각해? 지성: 그게 다른 건가요? 나: 사실은 사람들의 평가와 무관하게 있는 거니깐. 예를 들면... 아름: 내가 아름이라는 사실은 친구들의 평가와 무관해요. 예성: 맞네!! 저는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승우: 전 평가의 결과라고 생각해요. 태어나면서 악하거나 선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예성: 그럼 사회적 평가가 달라지면 선과 악도 달라지는 건가? 사회가 달라지면? 승우: 그럴 수 있지. 국가마다 선과 악의 기준은 다를 수 있어. 예성: 그래도 보편적인 기준도 있잖아. 살인이 악이라는 것은 보편적이야. |
굉장히 복잡한 토론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근대 이후 니체는 선악의 절대적 기준을 거부했다. 또한 현대 철학자인 듀이는 선악의 구분이 사회적 가치 판단의 결과라는 입장을 주장하기도 했다. 위 토론에서 아이들은 선악의 기준이 절대적이지 않고 사회적 평가에 의존한다는 입장을 주장했다. 하지만 모든 철학적 토론이 그렇듯 여백의 틈새 사이로 새로운 주장이 뚫고 나왔다.
예성이는 사이코패스를 예로 들며 타인과 무관하게 악한 것도 존재한다는 주장을 했다. 그 순간 지성이는 악한 것이 하나의 사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어 지성이는 악한 것이 사회적 평가라는 모순된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의 이에 대해 특별한 문제 제기는 없었다. 아이들은 사실과 평가를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는 듯했다.
나는 이에 대해 질문을 제기했고 토론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악한 것은 사람들의 의견과 무관한 보편적 사실인지, 아니면 사회적 평가의 결과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토론의 쟁점이 흐릿해질 경우, 그 쟁점을 명확하게 해주는 것은 교사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이다.
토론의 막바지에 이르러 승우는 국가마다 선악의 기준이 다를 수 있음을 주장했지만, 예성이는 살인은 보편적으로 악으로 규정된다는 반증 사례를 제시했다. 토론이 점점 더 흥미를 더해가는 와중에 종이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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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울린다>
예성: 아~ 쌤, 조금 더 하면 안 돼요? 지성: 그래요. 시간 좀 있어요. 나: 그건 힘들 것 같네. 다음 수업 교실로 이동하려면 시간 걸리잖아. 다른 수업에 피해를 줄 수는 없지. 승우: 그건 악이야. 예성: 뭔 소리야. (아이들이 다 함께 웃는다)
<아이들이 철학노트를 꺼내며 농담을 주고 받는다> |
보통 수업 종이 울리기 10분 전에는 토론을 마치고 철학노트를 쓰도록 하지만, 오늘은 종이 울리기까지 직전까지 토론이 이어졌다. 종이 울리고도 아이들에게 토론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 듯했다.
내가 다음 수업에 피해를 주면 안된다고 하자 승우가 그건 악이라는 말을 던졌다. 그 순간 묵직해졌던 교실은 분위기가 한순간에 풀렸다. 아이러니한 순간이었다. 토론에서 진지하게 다루어졌던 악이라는 개념이 하나의 말장난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건 승우의 탁월한 재치 덕분이기도 했지만, 철학적 토론의 특징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탐구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다. 대부분 그건 교사의 착각이다. 대부분의 교사는 어떠한 명확한 결론이 내려져야만 수업이 마무리될 수 있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의 철학적 탐구는 정답 없는 지평 속에서 끊임없이 해체와 재구성을 반복하는 놀이처럼 이어진다. 그 놀이의 규칙이 상황마다 새롭게 합의되고 재창조되듯 말이다.
들뢰즈와 과타리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것은 수목형 사유가 아니라 리좀적 사유에 가깝다. 오늘 아이들의 사유는 정확한 논리적 구조가 아니라 인간의 본능, 본성, 사실, 판단, 평가, 선, 악, 공감 등의 개념들 사이를 자유롭게 노니면서 단절과 해체, 반복과 순환, 창조와 재구성으로 이어졌다.
매 순간의 철학적 토론은 이렇게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정과 순환의 장면일 뿐이다. 오늘 아이들은 이렇게 이어지는 순환의 한 장면을 멋지게 기록하고 채색했다. 그것은 듀이가 말한 ‘하나의 경험’이자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철학적 토론의 시공간은 수량적, 통계적, 계산적, 논리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가 스며 있는 질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이라고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