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 공교육은 입시와 경쟁, 시험, 서열 등으로 아이들의 생각과 삶을 단단하게 고정해 놓고, 삶 자체를 좋은 성적,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이라는 정해진 트랙 위에서 움직이게끔 한다. 이 트랙을 성실하게 달리는 사람에겐 모범 학생이라는 훈장을 준다. 그런데, 울산 최초의 공립 대안중학교인 울산고운중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순응적이고 수동적인 삶을 넘어 저항적이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양한 시도들을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철학 수업을 통해 아이들에게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과 삶에 대한 사색의 의미를 알려준다. 이에 <더에듀>는 아이들이 자유롭고 비판적인 사유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꾸려가는 데 도움을 주는 박상욱 철학교사의 수업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는 “교육이 경쟁과 입시로부터 자유로울 때 아이들의 철학적 사유는 더욱 풍요로워지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더욱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

대학 시절에 나를 사로잡았던 철학적 주제는 인식론이었다. 특히 1학년 때 근대철학 강의에서 들었던 버틀러의 질문은 충격적이었다.
“우리가 감각하지 않을 때에도 세상은 존재하는가? 그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듣고 난 뒤 내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아니 세상은 그대로였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세계관은 달라졌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아마 그것이 철학이 주었던 첫 번째 경이감이었던 같다.
다음은 지난주 수업에 들어가서 아이들과 읽었던 소설 ‘마크’의 일부분이다.
“그렇지. 네가 뭘 말하는지 알겠구나. 연구 여행이나 그 비슷한 것 말이지? 그래서 정치과정에 대한 상식을 얻기 위해서 시청을 방문할 계획을 세우고 있단다.” “시청이라고요?”
토니가 신음 소리를 냈다. 윌리암스 선생님이 다시 말했다.
“너희들에게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제도에 대한 직접적 지식을 주려고 한단다.”
마크가 나섰다.
“저희들은 이미 학교에서 살고 있는 걸요. 학교도 하나의 사회 제도잖아요. 사실 어떤 면에서는 학교 자체가 바로 사회 제도라고 생각해요.”
윌리암스 선생님은 마크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제도로서의 경제에 관한 감각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저축 은행과 전기 회사와 도살장에도 갈 계획을 세워 놓았어요.”
아이들이 말했다.
“야아. 도살장도!!” |
위 장면에서 윌리암스 선생님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직접 체험해 보는 것이 좋다는 입장에 서 있다.
‘정치나 제도, 경제라는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시청이나 은행에 직접 가보는 것이 좋다’고 보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고 우리 반 유진이가 질문을 던졌다.
“꼭 경험을 해 봐야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건가요?”
반 아이들은 짧은 논의 끝에 유진이의 질문으로 토론하고 싶다고 했다. 쉽지 않은 질문이었다. 아이들이 이 질문을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했다.
‘이 질문이 아이들의 삶과도 깊이 있게 연결될 수 있을까?’ 하는 약간의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이어질 것 같아 흥분된 마음을 감추기 힘들었다.
우선은 경험으로부터 얻은 지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물었다.
민성: 상한 음식을 먹으면 장염에 걸린다는 것이요.
주윤: 그게 무슨 지식이야?
나: 주윤이는 이건 지식이 아니라고 생각해?
주윤: 네. 그냥 상식 아닌가요?
준이: 저는 상식도 지식이라고 생각해요.
나: 지식이라는 게 뭘까요?
민성: 그냥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요?
유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머릿속에 있는 것이 다 지식이라고 생각해요.
지성: 그건 아니지. 내가 어젯밤에 라면을 먹었다는 사실이 지식은 아니잖아.
지성이의 말에 교실은 한바탕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이렇게 철학적 토론은 놀이의 경계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때때로 단순한 말장난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기막힌 논리와 통찰력이 숨겨져 있다.

장난기 짙은 지성이의 말 때문에 토론은 지식에 대한 엄밀한 정의를 요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지식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단순한 기억과 구별되는 그 무엇이어야 했다.
‘그렇다면 지식이 되기 위한 기준은 무엇일까?’
이에 앞서 의견을 제시했던 민성이가 의견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철학적 토론에서 의견 수정은 가장 흔하게 보이지만, 가장 중요한 사고력의 한 요소이다.
민성: 다른 사람들도 그게 지식이라는 것을 인정해 줘야 해요.
수진: 누구에게나 적용이 가능해야 해요.
나: 예를 들면?
수진: 아까 민성이가 이야기한 것은 누구에게나 적용이 되잖아요. 상한 음식을 먹으면 장염이 걸릴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어젯밤에 라면을 먹었다는 것은 그냥 개인 적 경험이잖아요.
유진: 그럼 누구에게나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사실이 지식인가?
잠시 교실에 정적이 맴돌았다.
특별한 반례가 없어 보였다. 수진이는 미숙하게나마 지식을 구분하기 위해 노력했다. 수진이 덕분에 앞서 아이들이 제시한 지식에 대한 사례가 좀 더 명료하게 정리되는 것 같았다.
이 정적 속에서 나는 ‘지식은 반드시 참이어야 하는가?’, ‘지식도 시간이 지나면 변할까?’와 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좀 더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결정했다. 아이들의 질문은 경험과 지식의 관계를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잠깐의 정적 후에 수진이는 유진이의 생각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다른 친구들도 동의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리고 우리는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나: 그럼 지식은 언제나 경험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을까요?
예성: 1+1=2라는 것은 경험 없이 배운 거 아니예요?
승우: 오! 예성이 예리한데..
수진: 그것도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거잖아.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경험 아니야?
준이: 그것도 경험이지.
아름: 그럼 불이 뜨겁다는 사실을 듣는 것과 불을 만져서 뜨겁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어떻게 다른 거야?
아름이의 질문은 매우 날카로웠다. 은연 중에 간접적 경험과 직접적 경험을 구분하고 있었다. 아름이의 말이 나오기 전까지 나조차 이렇게 구분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름이의 질문에 대해 반 아이들은 당황하는 듯 보였다.
결국 준이가 둘 다 경험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나는 만약 다음 토론에서 이 논점이 또다시 제기된다면 듀이가 말한 1차적 경험과 2차적 경험을 좀 더 구조화해서 연습문제로 제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만약 듀이가 아름이의 질문을 실제로 들었다면 어떠한 반응을 보였을까? 하는 장난스러운 상상도 해보았다.
준이의 간단한 정리 이후에 예성이가 탄식을 하며 말했다.
예성: 그렇다면 경험 없는 지식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겠는데...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경험이잖아.
수진: 맞아. 경험 없이 지식을 얻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아.
아름: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있는 것은 없어? 눈 뜨는 거, 우는 거, 웃는 거, 기어다니 는 거....이런 거 말이야.
주윤: 그런 게 지식이야?
아름: 일단 누구에게나 적용은 되지 않나?
승우: 그건 본능이지. 지식이 아니야.
수진: 본능은 왜 지식이 아니야?
수진이의 말에 교실이 잠시 소란스러워졌다.
앞서 제시한 지식의 정의에 의하면 본능도 지식에 포함되어야 했지만, 아이들은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결국 지식의 정의를 좀 더 수정해야 한다는 의견에 도달했다.
준이: 지식은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고 전달도 가능해야 한다는 거네.
수진: 맞아. 근데 본능은 알고 있다기보다는 그냥 하는 거지.
예성: 그런데 아기들이 웃는 법, 우는 법을 모른다고 할 수 있나?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지.
승우: 하지만 아기들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지는 못하잖아.
예성: 그건 말을 못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없는 지식도 있어.
나: 예성이는 전달하지 못하는 지식도 있다는 거구나. 어떤 게 있을까?
예성: 음.... 손흥민이 와서 드리블하는 법을 아무리 알려줘도 우리는 모르지 않을까요?
이후 종이 치면서 수업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각자 이번 토론에서 흥미로웠던 쟁점을 잡아 글을 쓰도록 과제를 냈다. 그런데 여전히 교실에서는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렸다. 할 수 있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손흥민이 드리블하는 법을 알려주면 알 수는 있다’는 의견과 ‘그것은 정말로 아는 것은 아니다’라는 의견으로 갈리는 것 같았다.
웃음이 나왔다. 나조차 아이들이 지식과 경험의 관계를 다루는 토론에서 앎과 행함의 관계로까지 확장시켜 나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정말로 안다면 그것은 행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일까?’
앎과 실천은 일치되어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명제가 떠올랐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프라타고라스’에서 한 말은 덕에 대해 한 말이었다. 그는 ‘덕에 대해 제대로 안다면 그것을 행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아이들이 막바지에 한 토론은 이러한 ‘소크라테스적 아이디어’의 새로운 변형 같이 보였다.
(*본 원고에서 나오는 이름은 가명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박상욱 = 17년간 중학교에서 도덕을 가르치다가 2년 전부터 공립 대안중학교인 울산고운중학교에서 철학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부산교육대학교, 부산대학교,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으며, 한국철학적탐구공동체연구회 연수국장, 서울교육대학교 어린이철학교육센터 학술이사, 한국어린이철학교육학회 총무이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바이러스 철학을 만나다』가 있고 공저로는 『문해력과 사고력을 길러주는 교실 속 철학 토론』, 『도덕적 시민의 눈으로 세상 읽기』, 『생각하는 교실, 철학하는 아이들』이 있다. 공역으로 『아이들과 철학하는 삶』, 『더 나은 사고를 위한 교육』이 있다. 최근에는 어린이 존재가 가진 철학적 가능성과 그 의미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