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25 (토)

  • 흐림강릉 15.7℃
  • 흐림서울 16.5℃
  • 울릉도 17.5℃
  • 수원 17.3℃
  • 청주 18.2℃
  • 흐림대전 19.4℃
  • 안동 16.9℃
  • 포항 18.9℃
  • 흐림군산 20.4℃
  • 흐림대구 19.1℃
  • 흐림전주 23.2℃
  • 흐림울산 19.5℃
  • 흐림창원 20.9℃
  • 흐림광주 22.1℃
  • 흐림부산 21.7℃
  • 맑음목포 22.9℃
  • 구름많음고창 23.2℃
  • 맑음제주 26.3℃
  • 흐림강화 15.4℃
  • 흐림보은 18.0℃
  • 흐림천안 17.6℃
  • 구름많음금산 19.7℃
  • 흐림김해시 21.3℃
  • 흐림강진군 23.0℃
  • 맑음해남 24.8℃
  • 흐림광양시 20.4℃
  • 흐림경주시 18.6℃
  • 흐림거제 21.8℃
기상청 제공

[주취논객] ⑪아직 논쟁 중인 ‘수학의 과학’

더에듀 | 학문의 세계는 끊임없이 연구 결과를 내놓는다. 평생 배우는 전문직이자 평생학습의 모범이 되어야 할 교육자가 이런 연구를 계속 접하면 좋겠지만, 매일의 업무로 바쁜 일상에서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독자를 위해 미가 문인 원기자, 주취논객이 격주로 흥미롭고, 재미있고, 때로는 도발적인 시사점이 있는 연구를 주관적 칼럼을 통해 소개한다. 

 

 

‘읽기의 과학(Science of Reading)’ 이야기를 했으니 ‘수학의 과학(Science of Math)’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선 회와 마찬가지로 중학교 수학 교사라서 이 얘기를 하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스스로 정체성은 부전공인 역사고, 주전공도 수학이 아닌 미술이다. 수학 교육은 문해 교육보다는 쉽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깊이 관심이 있는 분야는 아니다.

 

그런데도 이번에 또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이 시대 교육 패러다임의 흐름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2020년대는 학생이 맥락 속에서 직접 지식을 구성하는 사회구성주의가 효과적이냐 아니면 직접 교수를 통해 한발 한발 걸음을 알려주는 직접 교수가 효과적이냐 하는 힘겨루기의 한가운데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름의 유사성에서 볼 수 있듯이 ‘수학의 과학’ 역시 읽기의 과학과 유사하게 과학적으로 입증된 교수법을 쓰자는 개념이고, 수학의 기초가 복합적인 인지적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이론도, 직접 교수가 중심이 돼야 한다는 교수법에 대한 관점도 같다.

 

그러면 어차피 또 같은 이야기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확연한 차이가 있다. ‘읽기의 교육’은 지난달 ‘총체적 언어 학습’ 접근의 본산이자 최후의 보루였던 캘리포니아가 백기를 들면서 사실상 대세로 자리 잡은 상황이지만, 수학의 과학은 그렇지 않다.

 

하필이면 바로 그 캘리포니아주에서 교육부가 관련 전공 대학교수와 연구진 1000여명이 서명한 반대 서한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교수 대신 사회적 맥락을 반영한 교육과정 개정을 강행할 수 있었다.

 

문해와 마찬가지로 수학도 기초 교육의 위기가 언급되곤 하지만, 결국 ‘수학의 과학’은 도입되지 않았다.


8가지 ‘오개념’ 지적하는 ‘과학적’ 교수 진영


직접 교수 이야기는 지난 회에서 했으니, 이번에는 수학의 과학에서 하는 접근법과 아직 서구 교육계에서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사회구성주의적인 접근을 대비한 자료를 살펴보겠다.

 

관련 연구도 여럿 발견하기는 했지만, 문해만큼 많이 연구되지 않다 보니 너무 오래되거나 학회 회원 대상으로만 공개한 자료여서 읽을 수가 없었다.

 

이 자료는 수학의 과학 사이트에 게재된 ‘수학에 관한 오개념’ 부분에 있는 내용이다. 수학의 과학 사이트는 미시간주립대, 플로리다주립대 등 미국 주요 대학 교수들이 중심이 돼서 만든 사이트다. 이후 수학계 외에도 학교 심리학계가 대거 참여하면서 회원은 수백 명의 수학과 교육 전문가로 구성돼 있다.

 

사실 필자는 이 부분의 제목이 좋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과학적으로 틀린 것으로 입증되는 개념이니까 오개념이 맞고, 과학적 정당성에 자신이 있다는 것인데, 교육계에 현재 만연한 생각을 ‘오개념’이라고 지적해서 지지를 얻을 수 있을까 싶다.

 

‘읽기의 과학’이 받아들여진 과정을 살펴보면 과학적 논리와 학문적 정당성으로 찍어 누른 게 아니라, 결국 낙오되는 아이들이 적은 방법을 택해야 한다는 교육적 신념에 호소한 결과인데 좀 배워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는 조금 순화해서 ‘오해’라고 하자.


오해 ‘하나’: 개념 학습이 절차적 지식보다 더 우선돼야 한다


수학 학습에서 ‘개념’을 가르쳐야 한다는 이야기는 많이 듣고 많이 한다. 특히, 예를 들어 계산하는 방법이나 문제 풀이 같은 절차적 기능이나 지식 연습이 아직 꽤 강조되는 우리나라에서는 개념이 자리 잡지 못한 상태에서 절차적 연마만 할 경우의 부작용 문제도 종종 언급된다.

 

그런데, 그렇다고 개념부터 확실히 다 이해할 때까지 가르치고 절차적 지식이나 기능을 연마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오해라고 이들은 말한다. 절차적 지식은 단순히 공식을 적용하는 과정이 아니므로 이를 개념의 반대 극단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이고, 절차적 지식의 연마를 통해 개념 이해가 깊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문적 연구 결과는 개념 이후 절차가 아니라 함께 가르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도 8개 제시돼 있다. 사이트는 오해마다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 다수를 제시하고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는 것도 추천한다.

 


오해 ‘둘’: 성장 마인드셋이 수학 성취를 증진


북미 수학 교사들에게 굉장히 만연한 생각이다. 실제로 필자가 수학 자격 연수를 받을 때도 다수의 교사가 이를 자신의 수학 교육 철학 핵심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앞선 회차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장 마인드셋은 그렇게 만능이 아니며 아직도 학문적 의심이 이어지고 있는 개념이다.

 

특히 수학과 관련한 효과성 연구에서 성장 마인드셋을 단독으로 가르칠 경우 성적 향상은 극히 적었으며, 재현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성장 마인드셋보다는 직접 수학 기능을 발달시키도록 직접 가르치는 개입이 훨씬 성취 개선에 도움이 되는 방법으로 검증됐다.


오해 ‘셋’: 탐구 중심 대 직접 교수


아마 지금의 사상적 긴장의 핵심을 건드리는 주제는 이것이 아닐까 싶다.

 

사회구성주의 이론에 따르면 당연히 탐구 중심 접근이 기억에 오래 남아야 하고 이해도 잘 돼야 한다. 그런데, 철저하게 실험적 접근을 한 연구에서 사회구성주의 학습의 이런 효과는 적어도 수학 기초 교육에서는 검증되지 않았다. 탐구 중심 접근으로 성취도, 참여도, 수학에 대한 긍정적 정서도, 스스로 발견한 지식에 대한 기억도, 개념에 대한 더 깊은 이해도, 문제 해결에 대한 흥미나 적극적 태도조차도 더 증진된다고 입증하지 못했다는 얘기이다.

 

특히 직접 교수가 뒤떨어진 학생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에게 일반적으로 효과적이라는 연구도 상당수 나오고 있다.

 

물론 경험적으로 교과와 학습의 내용에 따라, 예를 들어 사회 교과의 고학년 내용을 학습에 어려움이 없는 학생에게 가르칠 때 직접 교수가 더 효과적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교육에 한해서는 연구 결과들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오해 ‘넷’: 생산적인 애씀으로 더 깊은 이해와 학습 도달한다


생산적인 애씀(productive struggle)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일반화하지 않은 용어인데, 학생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 애쓰는 상황에서 학습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생산적’이라고 부르는 만큼 그 자체로는 생산적이다. 애초에 생산적 애씀과 비생산적 애씀을 구분할 정도로 애써도 생산적인 학습이 없는 상황은 포함하지 않는 개념이다.

 

문제는 이 생산적인 애씀이 도움이 된다고 해서 이것이 어려움 없이 쉽게 문제를 해결할 때보다 더 큰 성취를 가져올 수 있다는 기대이다. 보람은 더 느낄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의 연구는 이를 통해 더 깊은 이해나 창의적 문제해결력, 심지어는 끈기도 얻지 않는다고 말한다.

 

더 얻는 것은 없는데, 시간은 소모되고 좌절할 가능성과 오개념 생성 가능성은 올라간다. 그러니 일부러 생산적인 애씀을 유도하는 어려운 문제를 붙들고 씨름해 보도록 하기보다는 적절한 수준의 도전과 충분한 지원을 해주는 게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오해 ‘다섯’: 계산 절차 교육은 암기와 피상적 이해를 불러온다


첫째 오해와 다소 겹칠 수 있는데, 첫째가 넓은 의미의 절차적 지식 대 개념 교육의 시각이라면, 이번에는 좀 더 좁혀서 특정한 계산법(algorithm)을 가르치는 문제에 관한 얘기이다.

 

그러나 첫째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는 계산 절차를 완전히 배제하거나 온전한 개념 교육 후에 계산 절차를 가르치거나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흔하지도 않고, 교육과정에서도 절차를 가르치도록 하고 있어 첫째와 마찬가지로 조금 덜 와닿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나라에서도 계산법을 활용해 푸는 방식을 암기식으로 치부하며 개념 교육과 상충하거나 적어도 피상적 이해에 그치고 계산 절차만 기억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있어 보인다.

 

북미에서도 이런 이유로 계산 절차 교육에 앞서 개념 중심으로 먼저 푸는 방법을 다 이해하고 나서 계산법을 가르치는 접근을 취하는 교사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수학교육 연구 결과는 오히려 계산법을 활용한다는 것은 개념적 이해와 절차적 지식을 동시에 갖고 있어야 가능하며, 계산법은 개념적 이해와 절차적 지식을 연결하는 기능을 한다고 설명한다.


오해 ‘여섯’: 실행 기능 훈련이 수학 성과를 증진할 것이다


이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실행 기능(executive function)을 강조하지 않고 있어 학교 교육에서 흔히 보이는 인식은 아닌데, 북미와 유럽에서는 ADHD, 자폐 스펙트럼 장애 등 뇌신경 발달 장애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면서 종류를 막론하고 뇌신경 발달 장애에서 흔히 나타나는 실행 기능 장애에 대한 인식도 함께 제고된 상황이다.

 

실행 기능, 혹은 집행 기능은 목표 달성을 위해 행동을 계획하고, 집중하고, 조절하고, 기억하는 등 실행하는 데 필요한 인지 능력들을 일컫는 말로, 작업 기억, 충동 조절, 인지적 유연성 등을 포괄한다.

 

수학 문제가 복잡해질수록 실제로 실행 기능을 요구하고 실행 기능에 어려움이 많은 학생은 지능이 높아도 복잡한 과제를 수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실행 기능 개선을 위한 개입, 즉 직접적으로 실행 기능을 개선하는 훈련을 하면 수학 성취가 개선될 것이라고 기대하기 쉽다.

 

그런데 실제로 실행 기능 개선을 위한 별도의 개입을 단독으로 시행할 경우 실행 기능만 나아지고 수학을 비롯한 학업 성취는 크게 개선되지 않는다. 오히려 부족한 수학 기능을 정확히 파악해서 그에 맞는 개입을 시행하는 것이 낫다.

 

경험적으로, 그리고 특수교육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이 부분은 물론 학문적으로 사실이겠지만, 그 의미를 좀 더 되짚어 볼 필요는 있다. 예를 들어, 작업 기억이 좋지 못한 ADHD 학생에게 작업 기억을 증진하는 훈련을 했다고 해서 수학 성취가 단기간에 개선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은 쉽게 이해가 된다. 이미 수학 학습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성취 수준에 맞게 알고 있는데도 작업 기억 때문에 다소 성취가 낮게 나오는 사례에는 어쩌면 효과가 있을 가능성을 이런 연구가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 사례는 보통 소수이기 때문에 양적 연구에서 명확한 경향성을 보이는 데 영향을 끼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접근이 효과적인 학생이 어쩌다 있다고 해도 그런 경우는 소수이기 때문에 실행 기능 훈련이 수학 성취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접근을 써서는 안 되고 수학 기능에 집중하는 것이 맞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오해 ‘일곱’: 실행 기능은 ‘수학’ 성취에 특히 관련성이 있다


이어지는 이야기인데 실행 기능 훈련으로 수학 성취를 단기간에 개선할 수 없다고 해도, 실제로 실행 기능이 수학 성취와 관련이 높은 것은 사실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복잡한 수학 문제는 실제로 상당 수준의 실행 기능 활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실제로 일부 학자와 현장 교사가 인지적 기능을 측정해 맞춤형 개입을 하는 것이 수학 성취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접근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방대한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보면, 실행 기능이 특히 수학과 연관성이 높지도 않으며, 학업 성취에 실행 기능 개선이 크게 기여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들은 인지 기능이나 능력을 중심에 놓기보다 단순하게 수학 지식과 기능에서 부족한 부분을 다루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제안한다.


오해 ‘여덟’: 시간이 제한된 시험이 수학 불안을 낳는다  


수학 불안(math anxiety)은 수학을 포기하는 학생인 ‘수포자’ 현상을 설명하는 데 많이 사용되며, 수포자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렇기에 필자가 연수에서 수학 교과 내용 외에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 중 하나가 성장 마인드셋과 함께 수학 불안을 감소시키기 위한 노력이다.

 

그런데 이 수학 불안이 어디서 오냐고 할 때는 아무래도 시험 때 학생들이 불안이 커지고 불안을 자주 보이기 때문에 시간이 제한된 수학 시험이 원인이 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이 때문에 일부 교사는 난도를 낮추거나 시간이 제한된 시험 등의 활동을 줄일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주요 연구를 살펴볼 때, 시험 때문에 이런 불안이 생긴다는 결과는 없다. 오히려 시험을 통해 수학 성취가 오른다는 연구는 있다.

 

수학 불안에 관한 연구는 수학 불안이 수학 기능 숙련도와 상호 영향을 끼치는 관계가 있는 것으로 봤다. 수학 기능이 덜 숙련될수록 높은 불안이 있고, 높은 불안이 있을수록 수학 기능이 덜 숙련됐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전자의 관계를 기초로 수학 기능을 발달시키되, 직접 교수를 통해 높은 성공률을 가진 학습 경험을 하게 하면 수학 불안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이들은 제안한다. 과제를 너무 쉽게만 하거나 시험을 없앨 경우 수학 기능 숙련이 안 돼서 오히려 수학 불안이 커질 수도 있다는 설명도 붙였다.

 

또한, 수학 불안이 시간제한 조건보다는 과제가 복잡하거나 학습적 필요에 적합하지 않은 교수를 받았을 때 불안이 커진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하면서 직접 교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시간제한이 있는 활동이 숙련도 증진에 도움이 된다는 점도 강조한다.

 


오해 ‘아홉’: 모둠 학습이 수학에도 도움이 된다  


이 부분은 ‘수학의 과학’ 사이트에 게재되지는 않았지만, 수학의 과학을 주장하는 집단의 상당수가 동조하는 부분이며 두 가지 관점의 대립에서 종종 거론되는 사안이다.

 

사회구성주의 접근을 선호하는 쪽은 모둠 학습의 확대를 교육과정에 적극적으로 명시하고 있고 직접 교수를 강조하는 측은 아무래도 학생 주도 학습이 주류인 모둠 학습의 효과에 비판적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 기업 연구소(American Enterprise Institute)에서 2024년 6월 발표한 ‘팀워크가 꿈을 실현하는가(Does Team Work Make the Dream Work)’라는 제목의 연구 보고서를 소개할까 한다.

 

이 제목 자체가 도발적인데, 북미 학교에서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협동 또는 협력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주 하는 표현을 그대로 가져와 의문으로 바꾼 것이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PISA 2012 학생 성적과 수학 교수 방식에 관한 설문 결과를 분석했는데, 학생 중심 학습이 교사가 이끄는 교수보다 낮은 수학 성취를 가져온다고 분석했다. 그뿐만 아니라, 효과의 크기도 학생의 사회경제적 배경만큼이나 컸다.


그렇게 과학적인 증거가 확실하다면 왜 안 받아들여지나?


이쯤 되면 의문이 들 만도 하다. 정말 과학적 증거가 그렇게 확실하다면 ‘읽기의 과학’처럼 받아들여져야 했지 않나? 왜 비과학적이라는, 오개념이라는 주장이 세계 각국 교육부 정책의 주류일까?

 

이런 의심은 마지막에 별도로 소개한 보고서의 기관을 보면 가중될 수 있겠다. 미국 기업 연구소는 보수 성향이라는데 혹시 특정 정치 성향의 주장일 뿐인 것은 아닌가?

 

먼저, 첫째 의문에 답하자면 - 이 부분은 필자의 매우 주관적 이해와 해석이니 유의해야겠지만 - ‘엄밀히 학문적’으로 말하자면 읽기의 과학’만큼’ ‘과학적’이지가 않다.

 

아니, ‘수학의 과학’이 근거로 제시하는 연구가 덜 과학적이거나 그 해석이 비과학적으로 왜곡된 것은 아니다. 다만, 양적 메타 연구로써 과학과 증거 기반을 주장한 만큼, 그 ‘양’이 부족하다.

 

각국 교육과정에서 수학 교육의 비중을 고려할 때 놀라운 일이지만 기초 수학 교육은 문해 교육만큼 큰 학문적 관심을 받지 못해 그 증거의 양이 ‘읽기의 과학’만큼 설득력을 가지기에는 취약하다.


결국 학문 연구도 수요와 공급이 있다


그 이유는 국가 공교육 정책 목표와 연구의 관심 때문일 텐데, 언어 교육 정책 연구에서 문해 교육 비중이 클 수밖에 없다. 공교육의 일차적 목표는 사회에서 제 몫을 하는 시민 양성(국가마다 사람마다 달리 표현하겠지만, 필자가 이렇게 요약하더라도 대충 다 이해하리라 생각한다)이다. 거기에 문해력은 필수 중의 필수이다.

 

문해 외에 더 고차원적인 언어 교육 연구 중 해당 언어교육학계의 큰 관심의 대상이 되는 외부 분야가 적다. 그나마 요즘 우리나라에서 관심 있는 독서교육 정도일 텐데, 이는 효과성 검증이 어렵다.

 

게다가 고학년에서 비중을 차지하는 논술과 문학은 이미 공교육계 외의 저변이 넓어 그쪽에서 담론이 형성된다. 논술 사교육이 많지 않은 서구 국가에서도 이는 학문적 글쓰기의 영역으로 언어교육 밖에서도 많이 다뤄진다.

 

반면 수학은 기초 수학보다 오히려 국가 정책적 관심이 산업 인력 양성에 직결되는 고교 수학 교육에 이슈도 논란도 담론도 집중된다. 사실은 그 길에 먼저 해결되지 않아서 문제를 제공하는 원인이 기초 수학이지만, 당장 관심은 고교 수학에 집중된다.

 

앞서 말한 ‘수학의 과학’ 역시 기초 수학 교육 이론이지만, 이들이 진짜 주목받게 된 계기인 캘리포니아주의 논쟁 역시 고교 수학 교육과정의 담론 비중이 더 크다. 그러니 효과적인 기초 수학 교육 방법에 대한 논쟁과 심도 있고 광범위한 연구의 필요성이 덜 제기된다.

 

게다가 기초 수학은 초중등 교육 중에 최소한의 사칙연산을 습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렇지 못하더라도 계산기와 휴대전화로 대체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시민으로 혹은 인력으로 기능하는 데 결정적 정책이라는 관심을 받지 못한다.

 

특수교육의 관점에서도 그렇다. 특정 학습장애가 있는 학생이 문해를 못 배우는 경우에 비해 기초 수리를 못 배우는 경우는 더 적다. 애초에 난독증이 난수증보다 많고, 기초 수학이 습득해야 하는 기호와 개념의 양이 적어 극복이 상대적으로 더 쉽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 말했듯 개념만 알고 나면 계산기로 지원할 수 있으니 특성이 덜 눈에 띄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수학 교육의 다른 영역의 기초 연구를 수학 교육계 외에서 가져올 수 있는 영역도 넓지 않다. 수학계가 있지만, 수학계의 연구는 교육과정 바깥의 범주가 대부분이다. 그리고는 그게 다다. 그러니 그 모든 연구를 수학 교육계에서 하다 보니 기초 수학 교육에만 할애할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어진다.

 

결과적으로 ‘읽기의 과학’에 비해 정책적 동기도, 이슈성도, 학문적 동력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설득의 기술’마저 부족하다


거기에 한술 더해 ‘수학의 과학’ 사이트에서 쓰는 수사나 접근법을 보면 알겠지만, 사실 ‘읽기의 과학’에 비해 대중 친화적이지도 정책 친화적이지도 않다. 집단의 특성과 접근법에서도 덜 효율적이라는 얘기이다.

 

아마도 ‘읽기의 과학’도 “이게 과학적으로 맞으니까, 해야 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면 지금도 논쟁만 이어졌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문맹으로 사회에 진입하는 아이들에게 필요하다는 동력이 설득을 성공시킨 것이다.

 

교직사회의 특성이 그렇다. 교사라는 직업 자체가 아이들에 대한 사명감을 기초로 설계된 – 특히 직업 조건으로도 괜찮은 극소수 국가를 제외하면 더 그렇다 - 현대의 교직 사회에서 아이들을 위한다는 수사가 정답이라는 수사보다 설득력이 강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기초 수리력이 기본권이라는 얘기를 들어본 적 있는가? 온타리오주를 포함해 여러 곳에서 문해는 기본권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설득력이 다를 수밖에.

 

이 정도면 첫 번째 의문, ‘과학적이라면 왜 받아들여지지 않았나’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두 번째 의문, 혹시 이건 보수 집단이 만들어낸 주장이 아닌가. 이 이야기에 쉽게 즉답할 수도 있다. ‘수학의 과학’에 1차로 참여한 학자 다수가 진보 성향이며, 2차로 참여한 미국 학교 심리학계 역시 보수보다는 진보 성향이 강하다는 정도로.

 

게다가 ‘과학적 교육’의 다른 축인 ‘읽기의 과학’은 미국 기업 연구소처럼 보수 성향의 연구소가 목소리를 높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문화적 보수 성향은 반발하기까지 하는 접근이다. 직접 교수라는 방법 자체가 전통적인 강의식 교육이 아닌 개별화 교육에 가깝고, 전통적인 방식의 언어, 문학 교육을 거스르는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사실 수학의 과학도 공교육계의 주류가 되는 날이 온다면 마찬가지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직접 교수’가 개별화 교육을 기반으로 하니까.


100년 전 역사 속 ‘과학적 교육’ 논쟁


하지만, 단순히 지금 상황만 놓고 말하는 것으로는 의문이 해소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럴 때는 역사를 좀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수 있다. 역사교사의 ‘썰’이지만, 교과서에서는 안 가르쳐주는 역사니까 한 번 들어보자.

 

과거 세계 교육사에 이름도 비슷하고 사실은 겉으로는 달라 보여도 본질적으로 유사성이 있는 거대한 논쟁이 과거에도 있었다. 바로 소련에서 있었던 스탈린과 안톤 마카렌코 사이의 ‘과학적 교육’과 ‘인간화 교육’ 논쟁이다. 결국 스탈린이 마카렌코를 권력으로 찍어 눌러 귀양 보내는 걸로 일단락이 된 논쟁이다.

 

그런데 이후 소련은 마카렌코의 교육론을 일부 수용했으며, 전세계 공산주의 진영 확산에는 ‘과학적 교육’론보다 ‘인간화 교육’론이 더 큰 역할을 했다. 이후 냉전은 종식됐지만, 집단의 역학을 강조한 관점은 세계 각국의 교육관, 특히 진보 진영 교육관의 주류로 자리잡게 됐다. 

 

이런 역사적 흐름을 본다면 ‘과학적 교육’은 오히려 진보 진영의 극단이었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패러다임의 주도권이 바뀐 것이지, 보수 진영의 이론이 아니다.

 

물론 스탈린의 ‘과학적 교육’과 현대의 읽기나 수학의 ‘과학’과 결이 다른, 상반되는 부분까지 있다. 스탈린의 과학적 교육은 국가의 투입과 산출의 결과물로 교육을 본 만큼 학생을 하나의 부품 취급하고 비인간화한 반면, 현재의 ‘과학적 교육’은 오히려 낙오된 약자인 학생을 위한 인간적인 관점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본질적 공통점도 있다. 과학적으로, 실험적으로, 양적으로 증명된 증거에 기반해 교육의 방법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패러다임이 진영을 오가면서 부침을 겪고 있는 것이니 어느 진영의 주장이냐는 접근은 유용하지 않다. 이런 담론은 보통 힘을 얻기 위해 정치의 탈을 쓰더라도 단순히 정치적 담론이기보다 교육 패러다임의 담론이다.


‘직접 교수’의 부상은 통합 교육의 결과물


‘과학적 교육’이 특정 정치 진영의 전유물이 아닌 이유가 또 있다. 과학적 교육의 핵심은 체계적인 직접 교수이며, 이런 교육 방법이 강조된 것은 낙오하는 학생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정신과 통합 교실이 가져오는 어려움 때문이다. 수월성과 효율적 분리 교육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은 보수 정치계와는 결을 달리하는 뿌리가 있는 셈이다. 

 

통합교육이 강조되고 교실 내 학습 장애 등 어려움을 가진 학생이 많지 않았다면, 애초에 직접 교수의 필요성도 지금만큼 크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통합 교육의 결과로 개별화 교육이 표준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의 공교육 교실 규모로 직접 교수를 하자는 얘기 자체가 이상론으로 치부되거나 과중한 업무 부담으로 역풍을 맞았을 수 있다.(지금도 사실 개별화 교육의 부담은 종종 과중한 부담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시스템의 조정이 아닌 개인의 노력에 가치를 부여하는 보수적 가치관에서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을 위해 교수의 속도를 늦추고 난이도를 잘게 쪼개는 직접 교수는 비효율과 역차별로 인식될 수 있는 만큼 보수적 사상이 사회구성주의를 반대하는 부분이 있을 수는 있어도 직접 교수를 강하게 지지하는 기조와 일치하기는 어렵다.

 

결국 이런 복합적인 요인이 얽히고설켜 나타난 결과물이 교수법에 관한 패러다임의 변화지, 특정한 성향의 집단에서 나온 주장은 아닌 것이다.


일상생활뿐 아니라 학문도 변화시키는 기술의 진보


무엇보다 현대의 ‘과학적 교육’ 패러다임의 부상 과정을 살펴보면 좌우 사상의 변화보다는 다른 시대적 변화의 파도에 올라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학적 교육 담론의 발달에는 인터넷의 확산과 컴퓨터 기술의 발전이 기여한 부분이 크다. 유행이다 싶을 정도로 대규모 메타 연구가 많이 이뤄지고 있는 것은 인터넷으로 수백에서 수천의 연구를 쉽게 수합할 수 있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수합만 쉬운 게 아니라 이를 비교하고 분석하는 데 컴퓨터의 검색 기능이나 요즘은 AI까지 활용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가.

 

통계 처리도 훨씬 편해졌다. 복잡한 분석을 빨리 마칠 수 있을 뿐 아니라, 통계 처리 작업도 손쉬운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져 대단한 통계적 전문 기술의 영역이 아니게 됐다.

 

이런 변화가 모두 기여해 지금 ‘과학적 교육’ 담론의 ‘과학적 증거 기반’이라는 주장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애초에 여러 교육 방법의 효과성에 대한 의문과 재검토가 이뤄진 데도 같은 배경이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2000년대 들어 PISA를 비롯한 데이터 기반 국제비교 연구가 훨씬 수월해졌기 때문이다. TIMS도 이미 이메일과 검색이 보편화된 90년대 중반에서야 시작됐다. 이전에도 국제 비교 연구가 있었지만, 과거로 갈수록 내용도 피상적이고 참여국은 제한되고, 주기도 길 수밖에 없다.

 

이렇게 연구의 방법과 질이 기술 덕에 발전하면서 기존에 막연한 신념으로 갖고 있던 생각에 의문을 품고 검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현대의 ‘과학적 교육’ 논쟁은 어느 정치적 진영 간 찬반 논쟁이 아니라 그야말로 ‘과학’이 발전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논쟁일 수 있겠다.


그래도 교육에 만병통치약은 없다


필자는 언젠가 ‘수학의 과학’이 ‘읽기의 과학’처럼 대세가 되는 날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통합교육 기조에도 의문이 제기되는 요즘이라 아닐 수도 있지만, 통합교육이 지속된다면 언젠가 그리되리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도 모든 교과, 모든 학년에 직접 교수가 탐구 학습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주장이 제기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앞서 말했듯, 기초 기능 학습을 벗어나고 나면, 그리고 특히 교과의 내용에 따라서, 여전히 탐구 학습도 큰 빛을 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사라면 학생의 배움을 지원하기 위해 마음을 열어놓고 학생의 필요와 가르치는 상황과 내용에 맞는 효과적인 방법을 쓰는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느 날 결국 어느 쪽이든 필자의 두 예상 중 어느 하나가 무너진다면 이를 겸허히 수용할 준비는 언제든 돼 있다. 그게 교육자로서 밝혀진 사실과 자신의 오판을 놓고 학생에게 보일 수 있는 겸허한 배움의 모범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수학의 과학’에 관해 더 자세히 읽어보고 싶거나 관련 연구 문헌을 확인하고 싶은 독자를 위한 링크는 아래와 같다.

https://www.thescienceofmath.com/

배너
배너
좋아요 싫어요
좋아요
0명
0%
싫어요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