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 교사의 말이 자주 멈춘다. “그건 인권 침해 아니에요?”, “왜 저만 지적하세요?”, “제 자유예요.” 아이의 말은 틀리지 않지만 반만 맞는다. 자유는 권리이지만, 책임 없는 자유는 교실을 무너뜨린다. 학생은 배울 권리가 있다. 동시에 배움을 방해하지 않을 책임도 있다. 자기 생각을 말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 말이 교실의 공기를 어떻게 바꾸는지 돌아볼 의무 역시 따른다. 권리는 언제나 책임과 함께 온다. 이 질서를 놓치면 교실은 토론장이 아니라 각자의 주장만 울리는 공간이 된다. 요즘 교사는 자주 설명해야 한다. 왜 지도했는지, 왜 멈춰 세웠는지, 왜 그냥 두지 않았는지 말이다. 그 과정에서 교사의 말은 점점 짧아지고, 표정은 조심스러워진다. 지도는 간섭으로 오해받고, 훈육은 억압으로 포장된다. 그 사이에서 아이는 배운다. 선을 넘어도 누군가는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교사는 통제자가 아니다. 그러나 방관자도 아니다. 교사의 역할은 ‘함께 살아가는 기준’을 제시하는 일이다. 그 기준이 사라진 교실에서는 가장 목소리 큰 아이가 규칙이 되고, 침묵하는 아이가 가장 먼저 다친다. 책임은 보이지 않지만, 늘 약한 쪽으로 떨어진다. 학교는 권리를 가르치
더에듀 | 아이는 친구를 때렸다. 교사는 아이를 불러 조용히 지도했다. 그런데 그날, 교실보다 먼저 달려온 것은 부모의 항의였다. 사건은 아이의 손에서 시작됐지만, 문제는 어른의 말에서 커졌다. “우리 애가 왜 그랬겠어요?”라는 질문은 이미 결론을 품고 있다. “먼저 시비 건 건 상대방이잖아요”라는 말에는 아이의 행동을 돌아볼 여지가 없다. 부모는 아이의 편에 섰지만, 그 순간 교육의 자리는 사라졌다. 교사는 그때 깨달았다. 이 잘못은 아이의 것만이 아니었다. 요즘 교실에서 더 어려운 것은 아이의 행동이 아니다. 아이의 행동 뒤에 붙는 어른의 태도이다. 사실보다 감정이 앞서고, 지도보다 변명이 먼저 나온다. 아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이 사랑이라 여기는 문화가 교실을 흔든다. 교육의 본질은 잘못이 없도록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잘못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 아이는 실수할 수 있고, 화낼 수 있으며, 때로는 억울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감정 위에 무엇을 얹어 주느냐가 아이의 다음을 만든다. 사랑은 아이의 잘못을 덮어주는 일이 아니다. 사랑은 아이가 자신의 행동을 마주할 수 있도록 곁에 서는 일이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은 순간 편할 수
더에듀 | 지금 이 순간에도 한 교사는 교실 앞에서 망설인다. 지도를 해야 할지, 아니면 참아야 할지. 아이의 거친 말투, 친구를 향한 무례한 행동을 보며 ‘바로잡아야 한다’는 직업적 양심이 먼저 떠오르지만, 곧 다른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괜히 지적했다가 학부모 민원이 들어오면 어쩌지.’ ‘혹시 아동학대로 오해받지는 않을까.’ 이 망설임 끝에 지도는 멈추고 교실의 질서는 조용히 무너진다. 교사는 아이를 가르치기 전 민원을 먼저 계산하는 사람이 된다. 기본 예절을 말해도, 질서를 세우려 해도 “왜 우리 아이만 지적하느냐”는 항의와 “아이의 기를 죽였다”는 민원 앞에서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 결과, 오늘날의 교실에는 ‘지도받지 않는 아이’와 ‘가르칠 수 없는 교사’가 같은 공간에 공존하는 기묘한 풍경이 자리잡았다. 물론 민원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정당한 문제 제기는 교육을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통로이다. 그러나 지금의 민원은 점점 ‘개선 요청’이 아닌 ‘통제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 교사의 전문성과 판단은 존중받지 못한 채, 지도 과정 전체가 ‘감정의 잣대’로 재단된다. 학생은 보호받고 있지만, 교육은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더에듀 | 학교는 왜 가야 하는가. 이 짧은 질문은 늘 우리 교육의 뿌리를 건드린다. 아이들은 주저 없이 “공부하려고요”라고 말하지만, 그 대답은 언제나 절반만 빛난다. 학교는 성적을 쌓는 곳이기 전에 ‘사람을 빚는 곳’이다. 꽃이 피기 위해 뿌리가 먼저 자리 잡아야 하듯, 배움도 태도가 먼저 자라야 한다. 오늘의 문제는 지식이 과도해지고 태도가 가벼워졌다는 데 있다. 점수는 높아지는데 말투는 거칠고, 성적은 오르는데 책임감은 낮다.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결함이 용서되는 분위기 속에서 “얘는 성적이 좋으니까”라는 말이 어느새 면죄부처럼 쓰인다. 이는 가정과 학교가 함께 만들어 낸 왜곡된 신호이며, 아이들에게는 위험한 착시이다. 실태는 더 선명하다. 수학을 잘 풀어도 수업 중에 상대 말을 끊는 아이가 있고, 글짓기를 잘해도 친구 의견을 비웃는 아이가 있다. 지식만 자라면 언어는 칼이 되기도 하고, 논리는 타인을 꺾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세상은 그런 아이에게 “스펙은 뛰어나나 함께 일하기 어렵다”는 냉정한 평가를 내린다. 문제집은 해결했지만 사람 문제에서는 오답을 낸 셈이다. 통계도 이 현상을 뒷받침한다. 교육부 조사에 따르면 교사 10명 중 7명은 “학업 능력
더에듀 | “몇 번을 말해도 똑같아.”, “안 되는 애는 진짜 안 돼.”, “내가 너무 기대했나 봐요.” 교실과 가정에서 흔히 들리는 말이다. 기대는 금세 실망으로 바뀌고, 실망은 어느 순간 포기로 이어진다. 그러나 아이를 가르치는 일은 단 한 번의 말, 한 번의 훈계로 끝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훈육은 기다림이다. 오늘 깨닫지 않아도, 내일 변화하지 않아도, 아이 곁을 지키며 같은 말을 반복해 주는 과정이다. 바르게 말하고, 올바른 행동을 보이며, 아이가 스스로 성찰할 시간을 천천히 건네는 일이다. 그 시간이 쌓일 때 아이 안에는 변화의 싹이 자란다. 아이들은 말귀가 느릴 수도 있다. 감정 조절이 서툴 수도 있다. 사회적 규칙에 익숙해지는 데 남들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이런 순간에 필요한 것은 지적이나 처벌이 아니라, 속도를 맞추어 기다려주는 사람이다. “왜 그게 안 돼?”라는 말은 아이의 마음을 닫게 한다. “괜찮아, 다시 해보자”라는 말은 아이에게 다시 걸어갈 용기를 준다. 기다림은 방임이 아니다. 아무 말 없이 내버려두는 것도,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잘할 때는 격려하고, 어려워할 때는 다시 설명하며, 그래도 안 될 때는 한숨 대신
더에듀 | 요즘 교육 현장에서 자주 들리는 말이 있다. “그럴 수도 있지.” 아이가 실수를 해도, 친구를 괴롭혀도, 심지어 교사에게 무례한 행동을 해도 이 말은 손쉽게 따라붙는다. “아직 어려서 그래요.” “요즘 아이들은 다 그렇죠.” 겉으로는 이해와 배려 같지만, 어느 순간 아이를 향한 방임으로 미끄러지곤 한다. 공감은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따뜻한 태도이다. 하지만 방임은 아이의 행동을 그냥 흘려보내는 태도이다. 둘은 결코 같은 이름을 가질 수 없다. 공감이 교육의 출발이라면, 훈육은 교육의 마침표이다. 공감만 있고 훈육이 없다면 아이에게 남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무한한 자기중심성이다. “그럴 수도 있지”가 아무런 점검 없이 반복될 때, 아이들은 행동의 결과를 마주하지 않는다.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고, 고쳐야 할 이유도 찾지 못한다. 물론 공감이 꼭 필요한 순간이 있다. 넘어져 눈물을 삼키는 아이, 실수로 마음이 다친 아이, 혼자 외로움에 머무는 아이. 그 아이들에게는 따스한 마음을 건네는 일이 우선이다. 그러나 친구를 때린 아이, 규칙을 반복해서 깨는 아이, 수업을 방해하고 교사에게 말대꾸하는 아이에게 “그럴 수도 있지요”라는 말은 책임을 비껴가게
더에듀 | “너 어른한테 왜 그렇게 말하니?”, “선생님께 인사 좀 똑바로 해라.” 우리는 아이에게 존중을 요구하면서 정작 그 존중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는 제대로 가르치지 못할 때가 많다. 존중 교육의 출발점은 지시가 아니라 어른의 태도이다. 존중은 말로 전달되지 않는다. 시선과 말투, 아이의 이야기를 듣는 방식처럼 일상의 작은 행동에서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이다. 겉치레로 꾸밀 수 없고, 권위로 강요할 수도 없다. 진심이 빠진 예의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어른의 말과 행동이 불일치할 때 가장 먼저 그 모순을 간파한다. 아이의 실수를 가볍게 넘기거나 “왜 그랬어!”, “또 너야?”라는 말로 다그치는 순간, 아이는 자신이 존중받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크게 체감한다.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아이는 반항하거나 마음을 닫는다. 반대로 존중받는 아이는 생각하고, 이해하고, 스스로 변화를 받아들인다. 즉, 존중은 훈육의 전제다. 아이를 한 사람의 존재로 인정할 때 비로소 훈육은 효과를 가진다. 존중에는 순서가 없다. 나이가 많다고 먼저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지위가 높다고 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먼저 존중을 베푸는 사람에게 진정한 존
더에듀 | “참다 참다 화가 나서 그랬어요. 저도 사람인데 아이가 너무 말을 안 듣잖아요.” 이 말은 아이를 혼낸 뒤, 수많은 부모와 교사가 스스로를 변호하며 내뱉는 익숙한 문장이다. 그러나 그 훈육이 과연 ‘교육’이었는가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 순간, 우리는 아이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을 아이에게 쏟아낸 것은 아니었을까. 훈육은 감정을 푸는 일이 아니다. 그건 아이에게 책임을 전하는 일이다. 아이의 행동에 책임을 묻기 전에, 먼저 어른인 우리가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너 때문에”가 아니라, “네가 어떤 선택을 했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화를 내는 건 쉽다. 그러나 가르치는 건 어렵다. 감정은 순간이지만, 가르침은 시간이 걸리고, 반복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 차이를 모르면 우리는 매번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화를 내고, 그 자리에 상처와 후회를 남기게 된다. 훈육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잘못을 짚고, 옳음을 설명하며, 다시 기회를 주는 과정. 그 과정 안에 신뢰와 존중, 기다림과 인내가 깃들 때, 비로소 아이의 마음에 변화의 씨앗이 자란다. 아이를 혼낼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더에듀 |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왜 자꾸 말 안 들어?” 화를 내며 아이를 꾸짖던 부모가 전화벨이 울리자 순식간에 표정이 바뀐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 순간, 아이는 본다. 말과 태도가 다른 어른의 모습을. 아이들은 말보다 모습을 기억한다. 교육은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는 것에서 시작된다. 부모가 집에서 어떤 말투로 대화하는지, 약속을 지키는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 모든 것이 아이의 ‘기본 태도’를 빚는다. 부모는 아이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처음 만나는 교사이다. 말을 배우고, 표정을 익히고,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우는 첫 교실이 바로 가정이다. 그곳에서 배운 태도는 학교에서, 친구 사이에서, 그리고 사회 속에서 고스란히 반복된다. “우리 아이는 왜 인사를 안 할까요? 왜 자기 생각만 말하고, 타인을 배려하지 않을까요?” 그 질문에 앞서, 부모는 스스로를 비춰보아야 한다. - 나는 먼저 인사했는가? - 나는 상대의 말에 귀 기울였는가? - 불편한 상황에서 내 감정을 어떻게 다스렸는가? 아이는 듣기보다 흉내 내는 존재이다. 교사의 말보다 부모의 태도를 먼저 흡수한다. 그
더에듀 | 언제부터인가 교실은 ‘떠들어도 되는 곳’이 되었다. 교사는 ‘항상 참아야 하는 사람’이 되었고, 교육은 ‘간섭하지 않는 것’으로 포장되었다. 자율이라는 이름 아래 질서는 흐트러지고, 교사의 권위는 사라졌다. 예전에는 교사가 들어서면 아이들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지금은 “조용히 하자”는 말에 “왜요?”, “꼭 조용해야 해요?”라는 반문이 돌아온다. 권위는 무너졌고, 품격은 지워졌다. 교사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 그 권위는 억압이나 폭력이 아니라, 지식과 인격, 태도와 신념에서 비롯된 존중의 힘이다. 아이들이 자라는 공간에는 중심이 필요하다. 그 중심이 흔들리면 배움은 사라지고, 공동체는 흩어진다. 교실은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공간이 아니다. 태도를 배우고, 관계를 익히며,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곳이다. 이 신성한 공간이 존중받으려면, 먼저 그곳에 서 있는 교사가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학생을 지도하면 민원이 들어오고, 단호하면 불친절하다는 말을 듣는다. 꾸짖으면 아동학대를 걱정하고, 기준을 세우면 불통이라 말한다. 그래서 교사는 말을 아낀다. 가르치기를 망설이고, 훈육을 피한다. 그저 시간을 채우고, 갈등을 피하며, 자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