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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에듀 | 한국은 자살률 1위라는 현실을 안고 있지만, 동시에 회복의 힘을 증명할 수 있는 가능성도 품고 있다. <더에듀>는 고통의 시간을 지내고 회복의 길을 걷고 있는 안신영 큐어링랩 대표의 ‘상처에서 길을’ 연재를 통해 조용히 상처를 견디고 있는 아이들에게 '너의 고통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메세지를 전하고자 한다. 더불어 사회가 함께 공감하고 회복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전하는 여정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
요즘 캄보디아 사태로 온 나라가 뜨겁다. 아니, 뜨겁다기보다는 오히려 얼어붙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외교 당국에 신고된 캄보디아에서의 우리 국민 납치·실종·감금 신고는 지난해 220명, 올해 8월까지 330명에 이른다. 이 중 80여명은 여전히 안전이 확인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단순한 해외 범죄가 아니라고 말한다. 자국민이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 등장하는, 낯선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국민을 고액 취업 등의 미끼로 끌어들인 뒤 납치하고, 고문하며, 다시 그들을 보이스피싱과 로맨스스캠에 동원했다. 그렇게 피해자는 또 다른 피해자를 낳으며, 이 사건은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사람들’의 비극으로 번졌다.
최근 국내로 송환된 수십명의 피의자들 중에는 공식적으로 ‘가해자’로 불리지만, 동시에 ‘피해자’의 얼굴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들이 저지른 범죄는 법적 판단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 사태를 개인의 일탈로만 보기에는, 그 안에 사회의 병이 너무 깊다.
고립된 청년, 책임만을 떠안다
캄보디아 피해자의 대부분은 청년들이다. 뉴스 속에는 예천, 상주, 광주, 여수 등 지역의 이름이 등장하고, ‘충남 모 대학 선후배’라는 문구가 반복된다. 이들은 학력이나 수도권 중심 구조에서 기회를 얻기 어려웠던 청년 남성층이다.
과연 해외 고액 일자리 제안 뒤에 불법이 자리할 가능성을 몰랐을까. 알고 있었을 가능성을 제외하기 어렵다. 하지만 지역에는 일자리가 없고, 수도권의 기회는 그들을 향하지 않았다.
비트코인, 이더리움은 언감생심이니 알트코인에 올인하다가 빚이 생기면 캄보디아로 간다. 이 사태는 IMF 이후 퍼졌던 다단계, 불법 토토, 온라인 도박의 연장선상에 있다.
즉, 캄보디아로 간 청년들만 탓해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이자, 구조적 방치의 피해자이다.
애도보다 ‘구분’에 몰두하는 사회
대한민국은 범죄가 일어나면 늘 같은 풍경이 반복된다.
피해를 애도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피해자와 피의자를 구분한다. ‘누구는 불쌍하고, 누구는 구할 필요 없다’는 잣대가 여론을 지배한다.
큐어링랩은 ‘범죄 피해’라는 렌즈로 한국 사회를 바라본다. 이 렌즈를 통해 보면, 범죄 사건 하나하나가 사회의 취약한 지점을 드러낸다.
쉽게 답할 수 없지만, 반드시 직면해야 할 질문들이 그 안에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예민한 질문들을 직시할 때, 비로소 더 나은 사회가 될 수 있다.
수전 손택은 『에이즈와 그 은유』에서 이렇게 말했다.
“환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비하한다는 고통이다.”
세월호, 천안함, 그리고 이번 캄보디아 사태까지. 한국 사회는 여전히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세상을 떠난 이들은 애도하고,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낙인을 씌운다.
같은 배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천안함 생존 장병 58명은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영웅이 아닌 패잔병으로 남았다.
사망자와 생존자의 고통을 서로 비교하고 살아남은 이들의 고통을 폄하해서 우리 사회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생존자의 상처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슬픔을 잃은 사회의 위험
캄보디아 사태는 단지 해외 범죄 사건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는 거울이다. 일자리를 찾지 못한 청년들, 그들의 상처를 돌보지 않고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사회.
말로는 “청년의 고립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지만, 문제가 곪아 터져나오면 그들에게 다시 비난의 칼을 겨눈다.
그런 과정을 지켜본 청년들에게 이 나라에 남아달라, 정치에 관심을 가지라 말할 수 있을까.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한국 사회는 양극화된 여론 속에서 누구를 탓할지에만 몰두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같은 질문을 떠올린다.
“왜 우리는 세상을 떠난 이들을 함께 애도하고, 살아남은 이들을 함께 위로할 수 없을까.”
슬픔을 회복하는 일, 인간을 회복하는 일
천안함, 세월호 그리고 캄보디아 사태는 모두 트라우마 생존자에 대한 사회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또한 진영 논리 속에서 타인의 고통을 조롱하는 우리의 편향을 보여준다.
단식하는 부모 앞에서 피자를 시켜먹던 ‘폭식 투쟁’의 장면, 그런 극단적이고 저열한 행동을 일반화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들을 손가락질하던 ‘우리’ 역시 참사 앞에 애도가 아닌 피로감을 느꼈다. 억울한 고통을 겪은 뒤 이해도 치유도 받지 못한 채 사회로부터 버려진 이들이 거대한 퇴적층처럼 겹겹이 쌓여 한국 사회의 지층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고통을 방치한 결과, 우리는 슬퍼할 능력을 잃었다.
기억하기 위해 애도해야 한다
역사는 후퇴할 수 있고 한국 사회는 더 위험해질 수 있다. 그래서 한국사회가 캄보디아 사태를 기억하는 방식은 피해자를 향한 연민을 넘어서야 하고, 슬픔과 분노를 소비하는 행위를 넘어서야 한다.
우리는 기억하기 위해 애도해야 하고, 상처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기념해야 한다.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한국 사회의 주변부로 내몰려 해외로 떠난, 아우성을 질러도 대답이 없었던 캄보디아 피해 청년들의 그 기억과 함께 살아가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