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나라 헌법 제1조 2항에서 우리나라 정치형태는 민주주의, 즉 국민주권주의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모든 국민이 주인이라는 뜻이다. 주인은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이고, 의사결정 과정을 정치라고 한다.
국가적 수준에서의 의사결정을 ‘좁은 의미의 정치’, 그밖에 일상생활에서의 의사결정을 ‘넓은 의미의 정치’라고 한다. 또 전자를 ‘정치형태로서의 민주주의’, 후자를 ‘생활원리로서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공교육에서, 생활원리로서의 민주주의 교육은 잘 실현되고 있는 것 같다. 학교폭력 예방 교육, 다문화 이해 교육, 생명 존중 교육 등 다수의 교육을 통해 인권, 이해와 존중, 배려 등의 민주주의적 가치가 내면화되고 있다. 또 학생 자치를 통해 대화와 타협, 다수결의 원리 등도 잘 학습되고 있다. 그런데 협의의 정치, 즉 치형태로서의 민주주의 교육은 오히려 위축되고 있는 것 같다.
헌법 제7조 2항에서는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헌법 제31조 4항에서도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해 교육에 있어서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고 있다.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은 교육의 중립은 애초에 교육과 교원이 특정 정파에 동원되는 것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교육기본법 제6조 1항에서 ‘교육은 교육 본래의 목적에 따라 그 기능을 다하도록 운영되어야 하며, 정치적·파당적 또는 개인적 편견을 전파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동법 제14조에서도 ‘교원은 특정한 정당이나 정파를 지지하거나 반대하기 위하여 학생을 지도하거나 선동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헌법에서 ‘권리 조항’으로 보장되고 있는 정치적 중립이 법률에서는 의무조항으로 둔갑한 것이다. 왜 이런 불합치성이 발생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규정이 정치형태로서의 민주주의 교육의 족쇄가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공직선거법상 만 16세부터 정당 가입이 가능하고, 만 18세부터 선거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교육의 정치적 중립’이 강조되면서 교실에서는 정치가 ‘금기’가 되었을까?
가장 쉽게 짐작되는 이유는 미성숙한 청소년이 교사의 정치적 성향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과관계도 불분명할 뿐 아니라 사실도 아니다. 청소년도 성숙할 수 있고, 성인도 미성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청소년들은 교사뿐 아니라 부모, 친구, 미디어 등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만 16세부터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는 법률의 취지와도 맞지 않다. 그런데 교사가 공무원이기 때문에 교사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예상되는 것은 교사가 교육을 정파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위험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랴’라는 속담처럼 교육의 중립성을 준수하느라 더 중요한 민주주의 교육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마치 거짓 선동가들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표현의 자유를 완전히 금지시켜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지금의 정치적 중립은 그 모호성으로 인해 정치 자체를 금기시하게 되었다. 교사의 지극히 교육적인 지도가 별안간 ‘아동학대’로 신고당하듯 교사의 어떤 발언이 별안간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 혐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치적 중립이란 정치적 논쟁에 대해 어떤 평가도 하지 말 것, 어느 한쪽에 불리하거나 유리한 이야기도 하지 말 것, 누군가 듣기 불편한 이야기도 하지 말 것. 즉 양비론이나 양시론 또는 기계적 중립, 심지어 침묵으로 정리되고 있는 것 같다.
결국 ‘정치적 중립’이 모든 정치적 관심과 대화와 토론을 가로막고 있다. 플라톤이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받는 것이다”라고 말한 이유를 되새겨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