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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에듀 | 한국은 자살률 1위라는 현실을 안고 있지만, 동시에 회복의 힘을 증명할 수 있는 가능성도 품고 있다. <더에듀>는 고통의 시간을 지내고 회복의 길을 걷고 있는 안신영 큐어링랩 대표의 ‘상처에서 길을’ 연재를 통해 조용히 상처를 견디고 있는 아이들에게 '너의 고통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메세지를 전하고자 한다. 더불어 사회가 함께 공감하고 회복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전하는 여정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
이태원 참사 3주기를 맞았다. 그날 이후 3년, 우리는 여전히 ‘회복’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 어려운 사회에 살고 있다.
참사가 남긴 상처에는 2차 가해도 빼놓을 수 없다. “놀러 갔다가 죽었는데 왜 국가 탓을 하느냐”는 폭언, 음모론과 조롱, 혐오의 말들은 유가족과 생존자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남겼다. 이 고통은 단지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존엄이 무너진 한국 사회의 초상이다.
진상 규명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재난 사건 이후 계속해서 삶을 살아나가야 하는 생존자와 트라우마 경험자들을 우리는 얼마나, 어떻게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 보고 있는가.
하나의 재난 사건을 우리는 진실로 ‘재난’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재난 뒤에 숨죽인 사람들의 고통을 짓밟은 채로 진상규명이 이뤄지고 있지는 않은가.
깊은 슬픔과 분노는 부조리한 사회를 바꾸는 근본적인 힘이다. 그러나 그 감정이 더 나은 변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기록과 분석 그리고 대안을 세우는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힘은 한순간의 분노로만 남고 만다.
또 다른 의미의 참사 – 재난 보도와 한국 언론
이태원 참사는 세월호, 천안함 사건과 마찬가지로 재난 생존자를 대하는 한국 사회의 민낯을 드러냈다. 그중에서도 언론의 태도는 가장 뼈아픈 문제였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언론은 ‘진실을 알리기 위해’라는 명분 아래 유가족의 사적인 공간을 침범하고, 비극의 현장을 자극적으로 소비해 왔다.
재난을 취재하는 기자들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특종’을 찾으려 분투하는 일, 그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은 피해자의 고통을 가중하지 않는 선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 단순한 윤리가 지켜지지 않을 때, 언론은 진실의 전달자가 아니라 트라우마를 재현하는 2차 가해자가 된다.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로 산다는 일
가족을 잃은 유가족과 생존자 그리고 생존자의 가족. 그들의 관계는 마냥 따뜻하거나 단순하지 않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그 안에는 다른 입장과 감정 그리고 충돌이 존재한다.
재난 상황에서 유가족과 생존자들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복잡한 현실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이해하려는 노력 대신, 국가와 사회가 그 틈을 갈라놓고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었다는 데 있다.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가 된다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사람들은 자신이 상상하는 ‘전형적인 피해자상’에서 벗어난 이들에게 쉽게 마음을 내주지 않는다. 피해자의 말과 행동이 동정하기 적당한 모습을 벗어나는 순간, 사람들은 고개를 돌리곤 한다.
그리하여 ‘살아남은 피해자’의 자리는 언제나 불안정하다. 그들의 고통은 사회의 기대치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진짜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트라우마 이후의 사회를 위하여
재난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것은 필요하고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남겨진 사람들의 회복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트라우마는 단지 한 개인의 정신적 상처가 아니라, 삶의 통제권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사회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신의학자 주디스 허먼은 ‘트라우마와 회복’에서 트라우마 치유의 첫 단계로 ‘안정’을 꼽았다. 생존자가 더 이상 위협받지 않으며, 자신의 삶이 다시 자기 손 안에 있다는 감각을 되찾을 때 비로소 트라우마의 기억을 탐색하고, 그 기억을 현재의 삶 속에 통합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아직 피해자들에게 ‘안전하다’는 감각을 선물하지 못했다. 언론의 자극적인 보도, 정치의 이용 그리고 행정의 무관심 속에서 그들은 여전히 또 한 번의 상처를 견디고 있다.
치유란, 생존자가 다시는 통제권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사회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이다.
‘모든 슬픔은 당신이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해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 이자크 디네센
트라우마 생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기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하다. 생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당신 잘못이 아니다’라고 답해주고 그 고통을 비하하는 사람들에 맞서 함께 싸워주는 이들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생존자의 몸속에서 고통의 에너지로 머물던 사건은 언어로 만들어진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물론 고통이 이야기가 된다고 해서 트라우마를 겪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겪은 과거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모든 슬픔은 당신이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해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는 한 소설가의 말처럼,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는 생존자들에게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한다.
많은 사람은 가장 아픈 상처를 말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자신이 얼마나 힘들고 억울했는지 말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기억하고 말하는 과정에서 다시 고통을 떠올릴 자신이 없기 때문이고, 어렵사리 꺼낸 말에 “네 잘못도 있잖아”라는 냉담한 응답이 돌아올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렇게 강요된 침묵으로 위장된 평화는 가장 약한 이를 또다시 피해자로 만든다. ‘언어’가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그 사건’이 생존자의 몸속에서 여전히 진행 중일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한국 사회가 이 진통을 통해 새로운 언어를 배워가길 바란다. 역사적 뿌리와 경제적 배경의 차이를 무시한 채 남용되는 ‘화해’나 ‘통합’의 언어를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과거의 갈등을 봉합하려는 언어가 실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새로움을 치장하는 도구로 쓰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 사이의 이해관계에 따른 대립이 더 첨예해지기를 바란다. 다만, 그 대립이 정치적 선동이 아닌,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에 뿌리박은 갈등이길 바란다. 그런 진통을 거치지 않고 생겨나는 대안은 결코 현실에서 힘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태원 참사 3주기를 맞아 쓰는 이 글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이용하는 것을 넘어 한국 사회가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