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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에듀 | 학창시절을 돌아보자. 교실은 늘 새로운 구성원으로 채워졌고, 그곳에서 다양한 역사가 만들어져 왔으며, 어른이 된 오늘도 그 시간을 그리워한다. 한 가지 색이 아닌 셀 수 없는 무수한 빛깔로 가득 찬 곳에서 수없이 많은 꿈을 꿀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더에듀>는 ‘꿈몽글 교사들’과 함께 교실에 펼쳐진 다양한 색을 찾아가는 여정 ‘오늘의 교실’을 시작한다. 교실은 그때도, 지금도, 내일도 살아있다는 것만 기억하자. |
학교는 어떤 공간일까요? 학교는 어떤 곳이 되어야 할까요?
이 질문에는 다양한 답변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표현이 이루어지든 간에 그 중심에는 ‘교육’이 빠져서는 안 되겠지요.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가 학교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교육’이 빠져있는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학교에는 배움이 있어야 하고, 가르침이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통해 성장의 경험이 학생들에게 일어나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배움과 가르침, 성장에 방해가 되는 요소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학교는 원활히 굴러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즘 이러한 대처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많습니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얽혀있는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 그리고 경제적 논리가 교육이라는 단어를 말끔히 지우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또 그 기저에 깔린 다양한 이유로 이러한 문제를 교육 종사자들은 분명하게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도 거기에서 자유롭진 못하지요.
교육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학교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을 솔직하게 다뤄보겠습니다. 가장 먼저 학교를 두고 일각에서 제기하는 문제점들을 훑어보며, 사회에서는 어떤 원리로 학교를 문제투성이로 생각하는지 가늠해 보고자 합니다. 교육 관련 이슈에 올라온 누리꾼들의 댓글을 중심으로 이 내용을 다뤄보겠습니다.
“공부만 강요해서 아이들의 사고를 억압하는 공간이 학교야”
정말 자주 보이는 표현이지요. 아마 이런 댓글을 다시는 분들은 학교를 다닌 시점이 몇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런 연령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교육과정이 그새 많이 바뀌었거든요. 교육 철학과 이념도 끊임없이 변화했고요.
요새 아이들은 스스로 ‘학교 다닐 때가 좋았다’고 말합니다. 세상 행복했다고요. 다들 매번 뉴스에 나오는 자극적인 타이틀 위주로 학원 수십 개 다니는 아이들에게 주목해서 그렇지.
안 그래도 이어서 이런 댓글들이 보이네요.
‘요새 아이들은 공부를 너무 안 해서 문제.’
어휘력이 떨어진다느니, 기본적인 상식이 부족하다느니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던 어린 세대를 향한 부정적 평가들이 보입니다.
아까는 너무 공부만 해서 문제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공부를 많이 시킨다는 주장 자체가 정말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비판인지, 검증이 필요합니다.
지필 시험의 영향도 많이 낮아진 요즘이기에, 학교가 주입식 유형의 공부만을 강요했다고 볼 수 있는지는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프로젝트 학습이나, 다채로운 활동들이 부쩍 늘어난 요즘이라서요.
좀 더 터놓고 말하면, 어떤 과목에서 성취 수준이 매우 낮은 학생도 미흡하다고 평가를 할 수 없는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의 실태를 세상이 알고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잘하지 못하는 것을 잘하지 못한다고 있는 그대로 서술하기 힘든 상황이기도 하고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공부를 많이 하면 아이들의 사고가 억압되는 가’ 하는 부분도 아리송한 대목입니다. 다양한 지식을 갖출수록 더욱 창의성을 폭넓게 발현할 수 있다는 진실을 외면하는, 어쩌면 ‘무질서함이 곧 창의성’이라고 곡해하는 사상이 기저에 깔린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드는 부분이거든요.
그래요. 저 문장은 요로 봐도, 모로 봐도, 참 알쏭달쏭한 문장입니다.
“진정한 스승은 옛말이다! 요새 교사들은 그저 직장인 아니냐”
일단 교사가 직장인이면 안 되는지도 깊은 논의가 필요합니다만, 급한 대로 저 발언을 하신 분의 마음을 존중하며 진정한 스승의 의미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 같은 그 시대, 그러니까 과거의 학교를 다르게 기억하는 분들이 있어서요. 오, 찾았다. 이 댓글을 읽어볼까요?
‘예전 교사들이 교사냐. 애들 맨날 때리고 그랬지.’
그래요. 예전 교사들에 대한 분노와 분개를 가지신 분들도 참 많아요. 그런 감정은 저도 이해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저도 같은 시대를 겪었으니까요.
교실에서 놀았다는 이유로 당구 큐대나 1m짜리 쇠자 좁은 면으로 두들겨 맞아 허벅지에 피가 철철 난 적도 있고요.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수업 시간 내내 맞았던 사건도 기억나네요. 공부는 그래도 꽤 했는데, 거기에 비하면 참 많이 맞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런 안 좋은 기억 때문에 예전 선생님들을 욕하는 분들도 계시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유형의 선생님도 계셨어도 여러 좋은 선생님들도 계셨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어찌 되었든 각자에게 그런 아픈 기억이 있을 수 있는 게 사실이니까요.
제 말은, 그 마음은 이해한다는 거예요. 같은 시대를 겪었으니까요. 사실 그래서 더 교사가 되고 싶었거든요. 여러 좋은 선생님들을 보며 그 점을 닮아가고, 나쁜 선생님들을 만나면 그런 점들 때문에 받은 상처를 제자들에겐 절대 안 주겠다고 다짐하면서요. 그런데도 그 기억을 왜 저희 세대에게 투영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훌쩍.
아무튼 예전이 좋았다는 건가요, 안 좋았다는 건가요? 학교를 비판하시는 분들이 어떤 포지션인지 모를 때가 참 많습니다. 단적인 예가 ‘보충학습’이에요. 요즘도 어떤 열의가 넘치는 선생님들은 국어나 수학 등 주요 교과에 부진 정도가 심한 친구들을 위해 자체적으로 보충학습을 추진하시려고 해요. 저라면 정식 보충학습 시간이 아니면 감히 그렇게 하진 못할 거예요. 그만큼 존경스러운, 그렇게 열정으로 그리고 아이들을 향한 사랑으로 가르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참 슬픈 현실은요. 매번 그 노력을 안 좋아하는 분들이 나타나요. 학생을 위한 부가적인 지도 활동에 불만을 갖고 민원을 넣는 학부모님들이 계시거든요. 왜 우리 아이를 남겨서 기를 죽이니 뭐라느니 다양한 이유를 듭니다. 그저 아이를 위해서, 눈앞의 필수 성취 기준을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하는 건데 말이죠.
그 상황에 다음 학년 내용을 예습하는 학원에 가야 하니 시간 낭비하지 말라며, 그냥 우리 아이 집으로 보내달라고 말하시곤 하는데, 그 속에서 온갖 복잡하고 다사다난한 경험을 반복하게 된 교사들은 이제 보충학습을 자체적으로 진행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굳이, 왜?’인 거죠. 교사가 자신의 시간을 써서 아이를 위해 헌신해도, 고마워하는 게 아니라 화를 내시는 분들이 워낙 많아진 요즘이라서요.
이런 모습들은 결국 예전의 교육 방식을 사회에서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불량 학생들을 교사가 직접 제지하고 혼을 내는 방법은 이제 불가능해졌죠. 학교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때 교사가 이를 막고 혼을 내는 것도 불가능해졌죠. 담임교사가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했더니, 조그마한 사건 사고에도 교사가 모든 책임을 지죠. 심지어는 수업 활동 하나하나에 민원을 넣는 사례들도 꽤 자주 발견됩니다.
교사가 교육에 있어 최선을 다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단순히 학교만의 문제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공공 서비스 여러 영역에서 유사한 문제가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범죄자로부터 시민을 구한 경찰이 되려 처벌을 받는다든지, 사고로부터 시민의 생명을 구한 구급대원이 소송을 당한다든지 말이에요.
이런 문제들이 교육 현장에서는 교실이 진정으로 교육을 실천할 수 없는 공간으로 전락하는 모습으로 발현되는 셈이지요.
특정 직업 종사자가 그 직업에 최선을 다하길 바라면서, 막상 정말로 소명 의식을 바탕으로 본질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했을 때 처벌을 해버리고 마는 사회가 과연 유지될 수 있는 구조일까요. 아, 정말 모르겠어요. 이건 아닌데!
예전과 오늘날 교사의 역할에 대한 일대 일 비교가 어려운 상황인데요. 사회에서는 교사들에게 옛날 스승의 역할을 기대하면서 실상은 모든 권한이 제한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교사는 모든 부분에서 책임을 지길 바라면서도 교사로서의 역할은 하지 않길 바랍니다. 교사의 가르침이 기분 나쁘면, 그게 심지어 정상적인 학급 운영이거나 교육과정에 따른 교육 활동이더라도, 각종 민원 공격을 퍼붓는 오늘날입니다.
교육을 바라기보다는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길 바라는 셈입니다. 정말 슬프고도 웃긴 일이지요. 그런 식의 모순된 요구는 교사의 역할을 아주 큰 정도로 흔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학교도 다른 공공 서비스 영역처럼 매우 큰 정도로 흔들리고 있어요. 그게 오늘의 교실이 대면한 크나큰 문제입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소중한데”
어떤 분들은 자기 아이가 실수했을 땐 “어린이가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하지만, 상대 아이가 잘못했을 땐 “어떻게 아이가 그럴 수 있느냐”라고 말씀하시기도 해요. 똑같은 아이이고, 똑같은 행위인데, 누가 하면 나쁘고 누가 하면 착한 것이지요. 행위의 주체가 누구와 더 가깝냐에 따라 행동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달라지는 상황들이 교실에서 참 자주 일어나요.
이때 나타나는 문제가 ‘사소한 일’을 ‘심각한 사건’으로 전환하는 일들이지요. 아이들은 이미 화해하고 친하게 지냄에도 부모님들끼리 다툼이 커져 싸우는 사건들, 아마 많은 학부모님과 학교 관계자들은 귀에 닳도록 자주 들어보셨을 겁니다.
“우리 아이는 소중한데”, “이런 일을 겪으면 안 되는데”... 그런 유형의 명분으로 아이들끼리는 진작 마무리된 사안을 심각한 사건으로 격상시키고자 합니다.
솔직히 학교폭력 문제, 진짜 참 어이가 없습니다. 어린 아이들도 학교폭력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117’로 신고하도록 신고를 장려하곤 했지요. 그런 사회적 인식 변화로 별일 아닌 사건에도 심심하면 신고로 넘기는 경우가 많다 보니 경찰분들도 애로사항이 있는 줄로 압니다.
인계되어 접수된 신고는 학교에서 다 사안 처리를 해야 하고요. 우리 아이가 피해를 입은 경우에는 심각한 상황인 것으로 간주해 학교폭력 신고를 강행하는 보호자 분들이 계시기도 합니다. 상식적이라면 부모님이 아이를 달래고 마무리될 아무것도 아닌 사안에 대해서요.
혹시라도 있을 학교폭력 은폐를 막기 위해 어떤 사소한 건이든 정식적으로 학폭 절차를 밟게 모든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습니다. 지금 학교를 욕하는 분들이 어린 시절이라면 ‘이걸 신고한다고?’ 하는 생각이 들 아주 사소한 일들도 죄다 학교폭력 사안으로 처리되고 있는 오늘입니다.
그러면, 학교폭력 신고 건수는 당연히 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학교 밖 사람들은 이걸 보고 또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우리 어린이들이 얼마나 소중한데. 학교폭력 신고 건수가 나날이 늘어나다니. 이거 참 심각한 문제구나! 아주 혼쭐을 내줘야겠어. 아무튼 학교는 참 한심해.”
그 생각으로 온갖 말도 안 되는 대책들을 내놓습니다. 그 대책 속에서 선량한 아이들이 다치고 쓰러지는 경우도 허다하게 발생합니다. 신고가 남발되면서 ‘진짜 학교폭력’ 사건으로서 강력한 처벌이 필요한 경우에도 다른 ‘가짜 학교폭력’ 사건에 어우러지며 정의가 구현되지 못하는 상황도 많고요.
분명히 말하지만, 학교폭력 신고의 의미를 격하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된 학교폭력 신고로 진짜 바로잡아야 할 학교폭력 사건이 드러나지 못하게 되는 이 악순환이 답답하기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 양상은 아까의 주제로 이어집니다. 한 아이가 한 아이를 바보라고 놀린 사안이 발생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아이들은 교사에게 지도받고 고칠 점을 약속한 후 사이좋게 지내고 있어요.
하지만 양쪽 가정의 반응은 사뭇 다릅니다. 우리 아이가 학교폭력 가해자로 지목되면 “뭘 그런 사소한 일로 신고를 하냐”라면서 교사에게 “학교폭력 신고를 왜 막지 않냐”고 비난합니다.
반대로 자신의 아이가 조금만 피해를 입어도 “상대 아이는 강제 전학을 가야 한다”라면서 강력한 처분을 기대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학교는 학교폭력을 은폐했다고 주장합니다. 그 과정에서 교육과 학생은 논의되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를 앞세운 어른들의 자존심 싸움만이 오고 갈 뿐이지요.
우리 아이들, 정말 소중합니다. 정말 소중한데, 왜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그 소중함이 달라져야 하나요. 자신의 아이만 소중하고, 같은 교실에 있는 다른 아이는 왜 함부로 대해져야 하나요? 그 속에서 착하고 여린 아이들은 다칩니다. 부모님들도 무차별적으로 공격당합니다. 교사들도 무너집니다.
학교는 그때도, 지금도, 내일도 그곳에 있다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도, 어떤 이는 언제나 대한민국 학교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말할 거예요. 누군가는 언제나 학교에 결함과 문제가 존재한다고 볼 거예요. 아니, 그렇게 생각되어야만 할 거예요.
사회에 크나큰 문제가 발생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교육 때문이다’라고 외칩니다. 누군가의 잘못이나 실패도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학교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학교가 세상에 이롭지 않고, 도리어 교육에 방해가 되는 존재로 인식되어야만 누군가에게 이익이 되는 상황도 분명 존재합니다. 그 이익을 위해 학교를 집중적으로 깎아내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게 현실인 줄은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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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 여기서 분명히 말하고 싶어요. 겨우 그런 것 때문에 교육을 꺾지 말아주세요. 학교와 교실에서 살아가는 오늘날의 주인공들을 함부로 평가절하하거나 폄훼하지 말아주세요. 행복하게 서로를 아끼고 보듬으며 성장하는 학생들과 교사들을 공격하지 말아주세요.
그들은 오늘도 교실에서 정말 멋지게 살아가고 있어요. 매 순간 아름다운 시간을 쌓아가고 있어요. 교육을 중심으로 모두가 각자의 역할을 잘 해내고 있어요. 다양한 교육 담론이 펼쳐지고, 그 속에서 다채로운 수업의 장면들이 등장했어요.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더욱 즐거운 교육적 경험을 제공하고자 연구하고 부단히 노력했던, 그런 교육의 르네상스가 분명 존재했어요. 아마 교육 경력이 저랑 비슷하거나 저보다 많은 분은 모두 그 일련의 과정을 함께 보셨을 것 같아요. |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성장이, 그러니까 학교와 교실이 변화하고 자라나던 시간이 단숨에 무너지고 말았어요. 정말 한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어요. 간절히요. 교실이라는 공간, 정말 괜찮은 곳이에요.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세요. 오늘의 교실을 흔들지 말아주세요.
저는 오늘의 교실을 향한 여정을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떠날 겁니다. <더에듀>와 마련한 ‘오늘의 교실’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려 합니다. 교실에 녹아있는 생각과 거기에 담긴 교육의 의미를 한층 깊게 알려드리려고요. 학생과 교사가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순간들, 오늘의 교실 소개 편은 아래 링크를 통해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의 교실 0-1화 링크
https://brunch.co.kr/@ggummongle/146
글: 이준기 / 교실과 학교 밖 공간을 잇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합니다.
- 그림책 『내 마음 네 마음』, 『민정이의 등굣길』 글 담당 - 장편소설 『학폭교사 위광조』 공저자
- 꿈몽글 팀 글작가
그림: 이예솔 / 따뜻한 시선으로 마음에 닿는 그림을 그리고자 합니다. - 꿈몽글 팀 그림작가

꿈몽글 = 글과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교사와 전문 작가들이 힘을 합쳐 학교와 교실 속의 따뜻한 이야기를 기억으로 엮어내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대표작으로는 ‘학폭교사 위광조’, ‘내 마음 네 마음’, ‘민정이의 등굣길’ 등이 있다. <더에듀> 연재 ‘오늘의 교실’에는 14인의 교사들이 함께 한다. 교실에서 교육을 실천한 앤솔로지 프로젝트에 참여한 교사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