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에듀 | 우리나라의 교육부장관은 지난 10년 동안 사회부총리를 겸직해 왔다.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 악화한 여론에 대응하고자 부활한 교육부장관의 사회부총리 겸직 체제는, 겉으로 보기에는 교육의 위상을 높이고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조정자 역할을 수행하게 하려는 취지였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이 제도는 교육정책이 오히려 사회정책의 하위 수단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낳았고, 학교 현장에서는 교육의 본질적 가치가 훼손되는 심각한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다.
학교폭력예방법과 아동학대처벌법이 초래한 학교의 사법화, 돌봄과 보육, 사회 복지 정책 등에 떠밀려 복지기관처럼 기능하게 된 학교, 그리고 의대정원 확대나 만 5세 초등입학과 같은 왜곡된 교육정책 추진은 모두 사회정책 조정자의 역할을 떠맡은 교육부장관의 겸직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교육이 백년지대계라는 점에서, 교육부장관이 부총리급 지위를 갖고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중책을 수행하는 데 대해 큰 이견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와 함께 부처 간 칸막이와 정책 이기주의가 심화된 현실 속에서, 교육부장관은 교육정책의 수호자가 아니라 사회부총리로서의 조정자 역할을 보다 우선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즉, 교육부장관으로서 수행해야 할 본연의 교육정책은 사회부총리의 조정 책임 아래에서 가장 먼저 양보되고 조정되는 '셀프 희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역설적인 구조 속에 있다는 점이다.
결국 ‘사회통합’이라는 명분 앞에서, 교육은 조정의 대상이자 우선적 희생 영역으로 밀려나는 현실이 반복되고 있으며, 이는 교육부장관이 사회부총리를 겸임하는 현 구조의 근본적 모순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특히 국가교육위원회(국교위) 설립 이후 수업과 평가 등 학습 중심의 핵심 교육정책 기능은 국교위로 이관되었고, 현재 교육부는 교육보다 사회정책의 집행기관에 가까운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교육부는 오히려 ‘교육사회부’라는 명칭이 더 적절할 정도로, 교육의 핵심기능인 ‘학습’보다 복지·돌봄·안전 등 사회정책 중심의 교육 행정을 운영하고 있다.
학교는 미래의 사회이지, 현재의 사회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부는 학교를 현재의 사회처럼 인식하고 사회정책 우선의 논리로 교육정책을 설계하고 집행하고 있다. 이러한 근본적인 인식과 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첫 걸음이 바로, 교육부장관과 사회부총리의 겸직 체제를 분리하는 일이다.
교육은 한 나라의 국격을 좌우한다. 차기 정부는 교육과 사회정책 사이에서 줄타기 묘기를 요구받는 겸직 구조를 유지하기보다, 교육정책을 교육답게 회복시키기 위한 구조 개편에 나서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그동안의 겸직 체제가 초래한 교육현장의 부작용과 해외 사례를 철저히 짚어보고, 교육부장관이 오로지 교육에 전념할 수 있도록 겸직 구조를 과감히 개선해야 할 때다.

학교의 사법화 : 학교폭력예방법과 아동학대처벌법
2012년 제정된 학교폭력예방법 이후, 학교는 작은 법정이 되었다. 학교 내 따돌림이나 폭행 사건이 발생하면, 교사들은 교육적 해결보다 사법적·절차적 대응에 쫓긴다. ‘학교’ 앞에 ‘폭력’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학교폭력’이라는 특이한 용어를 만들어내면서, 사회에서 사용하는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사법적 법률 용어가 교육 현장에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교육 영역에서도 가해자-피해자 구분이 일상화되었고, 피해 학생 보호와 가해 학생 처벌이라는 사법제도의 논리가 교육 현장에서도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학교는 문제를 교육적으로 해결해야 할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교육의 주체인 학생은 사라지고 사법의 주체인 ‘가해자’와 ‘피해자’만이 남은 공간이 되었다. 징계위원회와 심의위원회가 열리고, 법률 전문가의 판단을 구하고, 결과에 따라 학생부에 기록이 남겨지는 등의 일련의 절차는 사법 절차화된 학교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사법화 경향은 학생 간 갈등의 관계 회복을 위한 교육적 개입의 골든타임을 교사에게서 빼앗았다. 교사가 갈등 조정을 시도하면 중립의무 위반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교사는 학생을 교육적으로 지도하기보다, 사법적 중립의무를 지키는 ‘관리자’이자 방관자’의 역할을 강요받고 있다. 교육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사법적 중립 의무 위반으로 간주되는 상황은, 교사와 학생 모두를 대상으로 교육정책이 아니라 사회정책이 적용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즉, 학교에서는 문제 해결 교육을 받을 기회 없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시키는 사회정책이 실행되고 있다. 이는 교육부 정책이라기보다 ‘교육사회부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의 본질은 ‘가르침과 배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분과 처벌’이 학교정책의 핵심 기능이 되어버린 현실은 우리가 반드시 되짚어야 할 문제다.
교육적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에 과도하게 법의 논리가 개입하면서, 학교는 더 이상 교육과 치유의 공간이 아니라, 분쟁과 갈등을 조정하는 사법 기관처럼 전락하고 있다.
한편, 아동학대처벌법과 아동복지법의 적용이 학교 현장으로 확대되면서, 교사들은 또 다른 사법화의 그물망에 걸려 교육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다.
원래 이들 법은 가정 내 아동 학대를 방지하기 위한 사회정책적 목적에서 제정된 것이지만, 현재는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정당한 교육활동, 특히 학생지도의 영역까지 포괄하면서 심각한 왜곡이 발생하고 있다.
교사는 '학생'을 대상으로 교육 활동을 수행하지만, 법적 판단의 장면에서는 해당 학생이 '아동'으로 해석됨에 따라 교사의 행위가 '아동에 대한 지도'로 재분류된다. 이로 인해 학생을 대상으로 생활지도를 한 교사가, 아동을 대상으로 생활지도를 해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동학대 혐의로 변형된 형태의 법적 신고를 당하는 사례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수업 중 산만한 학생을 훈육하려다 억울하게 가해자로 몰린 교사, 또는 단순한 훈계나 생활지도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학부모의 과도한 민원 제기 한 번으로 직위 해제되고 경찰 수사를 받는 상황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교사는 정당성을 소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곧바로 범죄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되는 현실에 놓인다.
이는 '가정폭력의 부모로부터 아동을 보호하겠다'는 사회정책의 좋은 취지가 교육현장에서는 오히려 학생이 아닌 아동을 기준으로 법이 작동하면서,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왜곡된 결과를 초래한 대표적인 사례다. 결과적으로, 교육정책의 이름으로 적용된 법제도가 오히려 교육현장을 혼란과 불신의 공간, 나아가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학생을 정당하게 가르치고, 훈육과 생활지도를 하는 교사의 교육적 행위 자체가 범죄시되는 교육환경에서는 어떠한 창의적인 수업도, 인성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법과 제도가 교사들로 하여금 소극적인 방관자로 남도록 만드는 구조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이들과 학부모,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가 감당해야 할 사회적 리스크로 되돌아오게 될 것이다.

사회정책의 개입 : 돌봄, 보육...학교의 복지화
교육부장관이 사회부총리를 겸하면서 나타난 또 하나의 두드러진 변화는 바로 학교의 복지기관화 현상이다. 대표적인 예가 초등 돌봄교실과 유아 보육 정책이다. 맞벌이 가정의 육아 부담을 줄이고 저출산 문제에 대응한다는 사회정책적 목표 아래, 교육부는 학교에서의 방과 후 돌봄 서비스를 대폭 확대해 왔다.
국가 차원에서 보면, 초등학교가 수업을 마친 아동을 저녁 늦게까지 돌보는 이 정책은 일정 부분 사회적으로 필요한 제도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로 인해 학교의 기능과 무게중심은 ‘교육’에서 ‘돌봄’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비록 교원의 본래 업무에서 돌봄을 제외시키겠다는 방침이 표면적으로는 존재하지만, 교육부장관이 사회부총리 역할을 겸하는 구조에서는 교육정책과 사회복지정책을 명확히 구분하여 추진하기 어렵다.
예컨대 돌봄업무를 교육청이 아닌 지방자치단체로 이관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으나, 이를 조율해야 할 주체가 동시에 교육부장관이자 사회부총리인 동일 인물이다 보니, 부처 간 이견을 조정하는 데에 실질적인 추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 결과, 일선 학교 현장에서는 “학교가 방과후 보육소로 전락하고 있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으며, 교육의 질 향상보다 복지 서비스 제공이 우선되는 구조 속에서, 정작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학습권과 교육 본연의 기능은 점차 뒤로 밀리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추진된 유보통합 정책 또한 학교의 복지화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보통합이란 유아교육(유치원)과 보육(어린이집) 체계를 하나로 통합하겠다는 정책으로, 그 목적은 영유아들에게 균등한 돌봄·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추진 과정에서는 교육부와 보건복지부 간의 이원화된 구조와 부처 간 권한 다툼, 그리고 현장 교원들의 반발로 인해 혼란만 가중되었다. 특히 사회부총리 산하의 교육부가 정책 추진을 주도하면서, 유치원 교사와 어린이집 보육교사의 자격 기준, 운영 철학, 교육 내용의 차이 등 섬세한 부분에서 충분한 조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유보통합 추진 방향도 바뀌었고, 결국 이 문제는 교육부가 떠안은 채 표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 사이 교육부장관은 사회정책의 조정자로서 거시적 사회통합 과제에 집중하느라, 정작 현장의 실질적인 교육 요구와 세부 과제들은 놓치게 되는 정책적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이렇듯 교육부가 보육·복지 과제를 책임지는 동안, 교육 본연의 핵심 정책인 교육과정 혁신, 교원 양성 체계 개선, 교사 전문성 신장 등의 과제는 정책 우선순위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교육정책이 사회부총리 역할을 보조하는 사회정책의 하위 개념으로 기능화되는 구조가 고착되면, 장기적으로 교육의 정체성과 자율성은 심각하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교육정책 아닌 사회정책....의대 정원 확대와 만 5세 입학 추진
교육부장관의 사회부총리 겸직 체제는 정책의 왜곡으로도 나타난다. 최근 큰 논란이 되었던 의대 정원 확대 정책을 보자.
대한민국의 의사 부족 문제와 지역 의료 격차 해소는 분명한 사회적 현안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2023년부터 수년간 동결되었던 의과대학 정원을 증원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런데 이 정책의 최전선에 선 인물은 다름 아닌 교육부장관(사회부총리)이었다. 교육부는 보건복지부 등과 함께 의대 정원 확대를 논의하고 의료계와 협상을 시도했지만, 부처 간 조율 부족과 내부 협의 미비로 인해 혼란을 자초했다. 결국 정부 내에서는 교육부장관이 의료정책까지 떠안아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정책은 본래 보건의료 정책의 영역이지만, 교육부장관이 사회부총리로서 사회적 요구에 밀려 교육의 본질적 고려 없이 추진한 사례로 평가된다. 그 결과, 고등교육 정책의 큰 그림은 실종되고, 교육부는 타 부처의 숙원 사업 해결에 동원되는 부처로 전락했다.
의대 정원 증원은 사회적 필요와 교육적 관점 간의 균형이 요구되는 사안이지만, 현재의 겸직 구조에서는 사회정책의 논리가 교육정책의 원칙을 압도하는 양상이 고착화되고 있다.
또 다른 사례로, 2022년 추진되었다가 철회된 ‘만 5세 초등학교 입학’ 정책이 있다. 당시 박순애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은 초등학교 입학 연령을 만 6세에서 만 5세로 앞당기는 파격적인 학제 개편안을 제시했다.
그 배경에는 저출산에 따른 생산인구 감소 대응, 조기 입학을 통한 보육비 절감 등 사회경제적 고려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교육계와 학부모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고, 불과 한 달여 만에 전면 철회되었다.
만 5세 아동의 초등 입학은 발달상 부적절하며, 유아기의 놀이와 자연스러운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는 교육적 비판이 집중적으로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태의 책임을 지고, 박순애 부총리는 취임 35일 만에 자진 사퇴하였다.
이 사건은 교육부장관이 사회부총리라는 거대한 정책 담론에 매몰되어, 정작 아이들의 성장과 학습이라는 교육의 기본 원칙을 간과한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기록된다.
사회정책 우선의 논리로 밀어붙인 정책이 어떻게 교육적으로 부실하고 위험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해외에서는 교육부장관이 사회정책을 겸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교육부장관-사회부총리 겸직 구조는 해외 선진국들과 비교해 볼 때 매우 특이한 사례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교육부 또는 교육부장관이 교육 분야 업무에만 집중하는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는 연방 교육부 장관이 있지만, 교육부에서는 학교 교육, 학력 평가, 고등교육 및 연방 학자금 지원 등을 담당한다. 돌봄이나 복지 정책은 맡지 않으며, 교육 기회의 평등 보장이라는 차원에서 제한적으로만 연계된다. 아동돌봄과 프로그램, 복지 정책은 보건복지부(HHS) 등 별도의 부처가 관장한다.
영국 역시 교육부 장관이 존재하며, 사회복지 관련 정책은 복지부(Department for Work and Pensions)나 내무부(Home Office)에서 담당한다. 영국에서는 아동 돌봄(Childcare)과 교육이 일부 겹치는 지점이 있지만, 정책 조정은 주로 교육부(DfE)와 복지 및 연금부(DWP) 간 협의로 이루어지고, 같은 장관이 겸직하지 않는다. 이처럼 교육과 사회정책을 단일 인물이 총괄하는 구조는 해외에서 보기 드문 형태다.
일부 국가에서 부총리직이 존재하더라도, 이는 주로 정책 조정 능력이나 전문성과는 무관하게, 정치적 균형과 정당 간 보상 차원에서 부여되는 상징적 직함이거나, 경제·외교·안보 등 범정부적 조정이 필요한 분야에 한정되어 있다. 즉, 교육 분야의 최고 책임자가 동시에 사회‧문화 분야의 컨트롤타워 역할까지 수행하는 국가는 사실상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사회부총리제가 도입될 당시에도, 교육계 원로들과 교원단체들은 교육·사회·문화를 한데 묶는 부총리직 신설은 단지 물리적 결합에 불과하며, 자칫하면 정작 중요한 교육 의제가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것이라고 예견했다.
실제로 지난 10여 년간 우리나라는 해외 어느 나라에서도 사례를 찾기 어려운 겸직 구조를 실험해 온 셈이고 지금의 이러한 결과는 시대착오적인 정치·행정 실험으로 평가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지난 2022년 국교위 신설은 교육부의 핵심 기능을 분산시키며, 교육정책의 소외 현상을 더욱 가속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교육 정책의 본질적 가치, 어디로 갔나
공교육을 대상으로 한 교육정책이 교육 자체의 독자성과 철학보다, 돌봄과 복지 등 사회정책의 하위 기능으로 밀려나는 구조가 심화되면서, 교육정책의 본질적 가치는 점점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교육의 본질은 미래 세대에게 지식과 인성을 함양시키고,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를 양성하되 개인의 성장과 잠재성을 실현하게 하는 것에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학교 현장의 교사들은 민원 처리와 법적 대응에 지쳐가고, 학생들은 공교육에 대한 신뢰를 잃고 있다.
수업과 평가의 혁신, 교육철학에 대한 담론은 자취를 감추고, 대신 CCTV 설치, 안전사고 예방 대책, 학교폭력 처벌 강화, 돌봄교실 운영 지침, 행정업무 TF 운영과 같은 사안들만이 교육정책의 중심이 되어버렸다.
교육부는 학교와 교원이 학생을 가르치고 배우는 본연의 활동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보다, 사회의 문제 상황이 터질 때마다 ‘대책반’을 꾸려 대응하는 땜질식 행정에 몰두하고 있다. 이로 인해 교육행정은 장기적 안목과 교육적 소명을 잃고, 즉각적 대처만을 요구하는 사회 여론에 끌려다니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결국 교육정책은 정책 본연의 목적과 기능을 상실한 채, 끊임없이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교권 추락, 학습 결손, 인성 교육의 부재와 같은 교육 위기의 많은 원인이 이러한 구조적 문제와 맞닿아 있다.
교사들은 전문가로서의 존중을 받지 못하고, 학생들은 교사에게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학부모는 학교를 신뢰하지 않고 사소한 일도 민원이나 법적 소송으로 대응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이것은 곧 교육공동체의 신뢰 붕괴를 의미하며, 교육이 자율성과 권위를 상실한 채 사회 여론에 종속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교육은 본래 가치의 영역이다.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사회화와 인격 도야, 민주 시민으로 성장시키는 가치 지향적 활동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정책은 이러한 가치를 지킬 철학과 여유를 상실한 상태다.
당장 눈앞의 사건·사고에 따라 정책이 요동치고, 교실 안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소송과 판결, 민원과 갈등만이 넘쳐나고 있다. 그 결과, 신뢰와 존중, 배려와 같은 교육을 통해 구현되어야 할 보편적 가치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교육의 본질을 지키는 일은, 결국 사회 전체의 미래 자산을 지키는 일이다. 그 본질이 훼손된다면, 사회정책의 성과 또한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교육부장관은 교육에만 전념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교육부장관과 사회부총리 직위의 분리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현재의 사회부총리 겸직 제도는 뚜렷한 성과 없이, 목표도 불분명한 실패한 제도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특히 교육정책 영역에서는 그 부작용이 더욱 두드러진다.
국정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조정자 역할을 기대했지만, 오히려 교육부장관 한 사람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과도한 짐을 지우는 구조가 되었고, 그 결과 교육도, 사회정책도 모두 놓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차기 정부는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과감하게 시정해야 한다. 교육부장관은 온전히 교육 현안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고, 사회부총리 직제가 필요하다면 독립적으로 별도의 인물을 임명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교육·사회·문화 분야는 성격이 매우 이질적이기 때문에 하나의 수장에게 일괄적으로 맡기는 것은 무리이다. 특히 지금의 겸직 체제는 예산·정원·인사권 등 실질 권한이 없는 무늬뿐인 부총리직이라는 점에서 실질적인 협치 효과도 기대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교육부장관이 더 이상 사회 전반을 총괄하느라 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그 역할을 재정립하는 것이다.
지난 2014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도 교육부장관의 사회부총리 겸직에 반대 의견을 분명히 밝혔다. 당시 교총은, 2001년 김대중 정부에서 처음 도입된 교육부총리 제도가 예산권을 가진 경제부총리와는 달리 실질 권한이 없어 조정 기능에 한계를 보였고, 결국 2008년 이명박 정부 시기에 폐지된 점을 들어, “교육부장관은 교육 전문가에게 맡겨 교육에만 전념토록 해야 한다”고 충고한 바 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우리는 그 충고를 외면한 대가를 분명히 치러왔다. 이제라도 교육부장관의 본래 역할과 자리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교육은 미래에 대한 투자이며, 교육정책은 단기 성과가 아니라 세대와 사회를 잇는 약속이다. 이 거대한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육부장관이 정책 철학과 현장 전문성을 바탕으로 오직 교육에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현행 사회부총리 겸직 체제 하에서는 어떤 유능한 인사가 장관직을 맡더라도 구조적으로 성공하기 어려운 한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교육부장관은 교육에 전념하고, 사회 현안은 각 부문의 전문성에 따라 분업과 협업의 체계를 구축할 때, 비로소 교육과 사회정책 모두가 선순환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것이다.
다가올 새로운 정부는 반드시 교육부장관-사회부총리 겸직 구조를 폐지하고, 교육정책 거버넌스를 바로세워야 한다. 교육을 교육답게 만드는 일 자체가 궁극적인 사회정책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교육의 본질 회복과 교육자치의 강화야말로 미래 세대에 대한 우리의 책무를 다하는 길이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지만, 그 마을을 이끄는 사람은 온전히 아이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교육부장관이 사회부총리의 그림자를 벗고 오직 교육을 향해 나아갈 때, 학교는 학교답게, 교육은 교육답게, 교육부는 교육부답게 제자리를 되찾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