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 2026년 시행을 앞둔 학생맞춤통합지원(학맞통) 정책을 두고 현장은 이미 불안하다. 정책의 취지나 목표에 대한 반대가 아니다. 오히려 학교는 이 장면을 너무 많이 경험해 왔다. 학교폭력, 학교민원, 늘봄학교까지. ‘학교’와 ‘학생’이라는 수식어를 앞세워 학교의 고유한 정체성과 무관한 국가의 행정 기능을 학교로 이식했던 정책들은 대부분 같은 결말을 맞았다.
이름은 달라졌지만, 정책 실패의 책임이 학교와 교원에게 귀속되도록 설계된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동일한 렌즈에서는 아무리 다양한 정책이 설계되어도 결국 같은 색의 정책이 반복된다.
정책을 아무리 보완해도 실패가 되풀이되는 이유는, 설계 단계의 인식 틀이 이미 실패를 내장한 디폴트값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맞춤통합지원 역시 그 연장선 위에 서 있다.
정책 문서들은 이를 서둘러 ‘교육복지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 설명한다. 복지라는 용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점을 강조하며, 결핍이 아닌 성장, 선별이 아닌 맞춤, 분절이 아닌 통합이라는 표현으로 정책의 성격을 새롭게 규정하려 한다.
그러나 냉정하게 물어야 한다. 무엇이 실제로 달라졌는가.
기존의 교육복지 정책 역시 학생의 성장을 목표로 했고, 학교와 지역사회의 연계를 반복해서 강조해 왔다. 용어를 바꾸고 ‘교육복지’라는 말을 덜 쓴다고 해서 정책의 작동 구조까지 자동으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구조를 바꾸지 않은 채 언어만 바꾸는 것 역시 변화라기보다 정책을 포장하는 기술에 가깝다.
학맞통법은 2026년 3월 1일부터 시행된다. 제1조는 학생이 학교 안팎의 삶에서 겪는 다양한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학습·복지·건강·진로·상담 등의 통합적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교육받을 권리와 전인적 성장을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명시한다.
제2조 역시 학생맞춤통합지원을 기초학력 미달, 경제적·심리적·정서적 어려움, 학교폭력, 경계선 지능, 아동학대 등 학습 참여를 저해하는 요인을 통합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지원으로 정의하고 있다.
중요한 점은 이 법 어디에도 학교나 교원을 통합지원의 관리 주체나 총괄 운영 주체로 명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 연구와 운영 모델을 살펴보면, 학교를 사실상의 통합지원 컨트롤타워로 전제한 설계가 반복되고 있다. 이는 법이 설정한 책임 구조와 정책 설계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통합의 오해, 맞춤의 왜곡
학맞통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환자의 건강 상태를 개별적으로 진단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여러 전문 영역을 조정해 지원하는 종합병원 모델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종합병원은 모든 진료과를 하나로 통합한 기관이 아니다. 오히려 각 진료과는 더욱 정교하게 분화되어 있으며, 전문성은 철저히 분리된 상태로 유지된다. 종합병원에서 통합되는 것은 전문성 자체가 아니라, 환자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조정 체계와 연결 구조이다.
이 구조에서 의사는 치료 판단의 핵심 주체이지만 병원의 운영과 행정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는 아니다. 의사는 환자의 상태에 따라 추가적인 검사나 타 전문과 진료를 제안할 뿐이며, 실제 운영·조정·관리는 별도의 행정 체계가 담당한다. 연계 역시 강제가 아니라 환자와 보호자의 선택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이 비유가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통합이란 모든 기능을 하나의 주체에게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문성을 분리한 상태에서 조정 구조를 통해 연결하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학맞통도 마찬가지이다. 맞춤형이라는 개념은 본질적으로 분리를 전제로 한다. 학생에게 맞추기 위해서는 무엇을 학교가 책임지고, 무엇을 학교 밖 전문 영역으로 넘길 것인지가 분명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정책 설계는 이 경계를 흐린다. 진단, 연계, 조정, 기록, 관리까지를 학교가 담당하도록 요구하는 순간, 이는 통합이 아니라 책임의 집중이다.
통합지원이란 모든 기능과 운영 방식을 하나로 묶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통합되어야 할 것은 학생을 중심으로 한 조정 체계와 연결 구조이며, 학습·복지·건강·심리 영역의 전문성 자체는 분리된 상태로 유지되어야 한다. 통합지원에서 핵심은 무엇을 통합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끝까지 분리해 둘 것인가를 명확히 하는 데 있다.
학교와 교원의 역할은 어디까지인가
학령기 학생에게 교사와 학교가 제공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지원은 학습복지이다. 이는 단순한 성취도의 문제가 아니라, 의미 있는 배움의 경험, 관계 속에서의 성장, 학습을 통해 회복되는 참여감과 자존감의 문제이다.
이 영역은 교원의 고유한 전문성에 속한다. 따라서 학생맞춤통합지원에서 교사의 맞춤형 지원의 핵심은 고도화된 학습복지여야 한다.
기초학력 지원, 수업 안에서의 개별화, 정서적 지지와 학습 경험의 질 개선이 교사의 주된 역할이다. 반면 건강, 심리, 복지, 안전, 가정 문제 등 학교 밖 전문 개입이 필요한 영역은 지역사회가 보유한 전문가 자원과 연결되어야 한다. 이때 학교의 역할은 해결자가 아니라, 학생 삶의 변화를 가장 먼저 포착하는 관찰자이자 연계의 출발점이다.
해외 사례는 이 원칙을 분명히 보여준다. 미국의 Communities In Schools(CIS)는 학교와 지역사회를 연결하는 코디네이터 모델을 통해 학생을 지원하며, 실제 서비스 제공은 지역사회 전문기관이 담당한다. 캐나다와 미국의 고등교육 분야, 싱가포르와 아일랜드의 학생 지원 정책 역시 학교가 모든 지원을 수행하지 않고, 교육과 전문 서비스를 분리·연계하는 구조를 택하고 있다.
통합운영의 실질성은 학교 중심이 아니라, 지역사회 전문성 네트워크가 작동할 때 확보된다. CIS는 학교를 더 많은 복지를 수행하는 서비스 집행기관이나 복지 실행기관, 개입의 결정 주체로 확장하지 않았다. 대신 학생이 다양한 전문 지원 체계에 접근하고 연결될 수 있도록 길을 여는 첫 관문으로 학교의 역할을 재정의함으로써, 학생 지원 정책의 설계 패러다임을 전환한 모델이다.

문제는 복지가 아니라 정책 설계다
학맞통에서 바꿔야 할 것은 복지 패러다임이 아니라, 학교를 교육 전문성의 주체가 아니라 정부 국정과제를 처리하는 행정 말단의 실행 단위로 취급해 온 정책 설계의 관성이다.
‘교육복지’라는 말을 지우고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정책의 구조적 한계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문제는 용어가 아니라, 학교를 바라보는 정책 설계의 렌즈이다. ‘교육복지’라는 말을 지우고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정책의 구조적 한계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문제는 용어가 아니라, 학교를 바라보는 정책 설계의 렌즈이다.
학맞통에서 학교를 통합지원의 컨트롤타워로 세우는 순간, 학교는 교육기관이 아니라 준행정기관으로 변질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먼저 짚어야 할 사실이 있다. 학교는 이미 자신이 수행할 수 있는 범위의 통합지원을 시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건 영역은 보건교사가, 건강·정서 영역은 상담교사와 진로교사가, 학습 영역은 담임교사와 기초학력 전담교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즉, 학교 안에서 가능한 통합은 이미 작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맞통 정책은 학교 밖 지역사회 자원까지 포괄하는 통합지원의 실행을 학교에 요구하고 있다. 이는 통합의 확장이 아니라, 학교와 교원에게 통합의 부담을 집중시키는 일방적 책임 전가형 통합에 가깝다.
지역사회 연계, 전문기관 조정, 서비스 관리와 같은 역할은 학교가 아니라 국가와 교육행정기관이 책임져야 할 영역이다. 학교가 수행할 수 있는 통합은 업무와 행정의 통합이 아니라, 학생의 변화를 가장 먼저 포착하는 관찰의 통합이다.
학맞통법의 도입 취지는 학습 참여를 저해하는 요인을 제거하는 데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정책 문서들은 통합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기존 지원의 ‘분절성’을 반복적으로 문제화한다. 이 과정에서 분절적 지원 자체가 마치 학습 참여를 저해해 온 주된 원인인 것처럼 논리를 구성하는 것은 정책 문제의 원인을 단순화할 위험을 안고 있다.
학습 참여를 가로막았던 핵심 요인은 지원의 분절 여부가 아니라, 학습이라는 목표를 중심으로 각 전문 영역의 역할과 개입이 체계적으로 조직되지 못했던 정책 설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은 정책의 선의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학교를 대상으로 한 정부 정책의 설계 역량을 묻는 질문이다. 학맞통은 복지 패러다임을 넘어섰다고 설명하지만, 실제로는 기존 학생맞춤형복지와 교육복지 정책의 구조를 유지한 채 명칭과 정책 서사만 재구성한 정책에 가깝다.
문제는 ‘복지냐 아니냐’가 아니라, 학교를 어떻게 설계하고 어떤 역할을 전제하느냐이다. 바꿔야 할 것은 복지 패러다임이 아니라, 학교를 바라보는 정책 설계 패러다임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정책 역시, 이미 여러 차례 목격해 온 실패의 경로를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이제 질문은 분명해진다. 학맞통은 법 도입 취지대로 정말로 학생의 학습 참여를 회복하기 위한 정책인가, 아니면 또 하나의 행정적 통합 과제를 학교에 이식하는 방식으로 설계된 정책인가. 학교를 정권 교체 때마다 정책 기조에 맞춰 국가 과제를 수행하는 실행 단위로 계속 설계할 것인가, 아니면 교육이라는 본질적 기능을 수행하는 교사의 전문성을 중심에 둔 정책 설계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것인가.
학맞통은 설계 패러다임만 전환된다면 충분히 성공 가능한 정책이다. 그렇다면 이 법 시행의 성패는 현장에 달려 있지 않다. 지금 이 정책의 향방은 이를 설계하고 있는 교육부의 선택에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