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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실 공백, 학생 안전은?] 혼돈의 시작, ‘보건교사의 정교사화’

‘보건교사 정교사화’ 주장의 모순과 니그레도(Nigredo)의 비극

더에듀 | 만약 당신의 아이가 학교에서 갑자기 쓰러졌을 때, 생명을 지켜줄 보건실 문이 굳게 닫혀 있다면 어떨까.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학교의 유일한 의료전문가인 보건교사가 교실수업에 나가며 아이들의 건강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보건실이 비어가고 있다. 법의 왜곡된 해석과 행정 편의주의가 만든 ‘안전 공백’ 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방치되고 있다. <더에듀>는 <전국보건교사노동조합>의 이야기를 통해 닫힌 보건실 문 뒤에 가려진 불편한 진실을 파헤치고, 무너진 학교 안전 시스템의 근본 원인을 살펴본다. 더 이상 2023년 대전에서와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무엇을 바로잡아야 하는지 해답을 찾아간다. 우리 아이는 오늘, 학교에서 정말 안전할까.

 

 

‘보건실 이용은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응급상황이 아니면 수업 시간 자제’라는 이용수칙이 마치 당당한 수비꾼처럼 보건실 문 앞을 지켜 섰다.

 

쉬는 시간 10분을 이용해 다치고 아픈 아이들이 보건실로 동시에 모여들면, 보건교사는 아이들의 호소를 제대로 듣고 살필 겨를조차 없어서, 신속하게 속도전을 펼치며 ‘처치’를 해야 한다.

 

아픈 아이의 호소에 따라 증상을 살피고, 건강 문제가 무엇인지를 진단하고 보건지도를 하는 보건교사의 진짜 보건교육은 보건실에서 실종됐다. 아픈 아이 한 명에게 할애하는 시간은 고작해야 1~2분이고, 그나마 수업 종이 울리면 보건실에 몰려왔던 아이들은 교실로 돌아가야 한다.

 

응급상황임을 스스로 증명하지 못한 아이들은 수업시간에 보건실 이용을 제한받는다. 설령 담임교사의 허락을 받고 보건실에 도착해도 보건교사가 수업 중이면 오히려 더 위험한 책임 부재의 공간에 놓이게 된다. 대체교사의 지시에 따라, 보건교사가 올 때까지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침상에서 홀로 방치되거나, 대일밴드 한 개를 얻어 붙이고 교실로 다시 돌려 보내진다.

 

그나마 피가 흐르거나 소란스럽게 통증을 호소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위급을 표현할 수 있는 경우는, 대체교사의 관심을 끌 수 있다. 그런데 진짜 위급한 아이들 중에는 오히려 고통을 호소할 기력조차 없을 수 있다는 것을 과연 누가 알겠는가?

 

위급한 아이가 도움을 구할 때, 언제든지 보호의 손길을 내밀도록 준비되어야 할 보건실이 스스로 높은 장벽이 되고 오히려 혼란을 유발하는 장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 중심에는 ‘보건교사의 정교사화’라는 기묘하고도 모순적인 구호가 있다.

 

2007년 무렵, ‘보건교육은 수업이고 수업하는 교사는 정교사이므로 보건교사는 정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일부 보건교사 단체를 중심으로 ‘교육 운동’의 형태로 포장되어 확산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보건교사의 정교사화’라는 형용모순적 용어의 생성 배경이다. ‘보건교육의 개념 변질로부터 기인한 보건교사 스스로의 자기부정 여정’, 그 시작점인 셈이다.

 

이러한 주장이 나오게 된 데에는 ‘보건교육’을 ‘보건수업’으로 왜곡하는 학교의 독특한 업무 메카니즘에 있다.

 

‘교육’을 주된 업무로 하는 초중등학교에서는 교육 자체가 일종의 ‘생산품’이다. 학교에서 ‘교육’은 곧 ‘수업’과 동의어로 취급됐고, 보건관리활동의 일환으로서 보건교육은 교과 과정의 틀 안에 시수가 있는 수업 형태로 규격화되면서 변질되었다.

 

‘수업을 해야 진짜 교사’라는 인식이 팽배한 학교에서 보건교사의 본질적 직무인 건강관리 활동은 제대로 된 평가 기준조차 없지만, 주당 몇 시간의 수업은 온전히 ‘생산성 있는 업무성과’로 기록되고 격려받는다. ‘보건교사의 정교사화’는 이 차별적인 문화가 낳은 기형적 산물이다.

 

하지만 교육공무원법이 정의하듯, ‘직위’란 직무와 책임에 따라 구분된다. 보건교사는 간호사 면허를 기반으로 학생의 건강관리를 책임지는 직위이며, 정교사는 교과 수업을 운영하는 직위로 본질부터 다르다. ‘보건교사의 정교사화’는 법적으로도 기능적으로도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결국 이는 직업적 정체성, 즉 자아(自我)의 부정으로 이어진다.

 

심리학자 칼 융은 인간의 자기실현 과정을 연금술에 비유했다. 금이 아닌 것을 금으로 만들 수 없듯, 본질이 아닌 것을 추구하는 과정은 결코 통합(루베도)에 이르지 못하고 혼란과 파괴(니그레도) 단계에 고착될 뿐이다.

 

‘보건교사의 정교사화’가 혼란과 파괴의 단계인 니그레도에 머무는 것은 필연적이다. 분노스러운 것은, 우리 아이들의 안전이 그 니그레도의 제단에 제물로 바쳐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보건교사의 정체성 실패는 개인의 실패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는 학교 공동체의 정의를 훼손하고, 가장 보호받아야 할 학생의 생명권을 위협하는 구조적 문제로 이어진다.

 

고대 철학자 플라톤은 ‘국가’에서 정의란 “각자가 자신에게 마땅히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단순한 역할 분담을 넘어, 각자 고유한 기능에 충실할 때 공동체 전체가 조화로워진다는 원칙이다.

 

이제 혼돈과 파괴의 시간을 끝내고, 모두의 정의가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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