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 만약 당신의 아이가 학교에서 갑자기 쓰러졌을 때, 생명을 지켜줄 보건실 문이 굳게 닫혀 있다면 어떨까.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학교의 유일한 의료전문가인 보건교사가 교실수업에 나가며 아이들의 건강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보건실이 비어가고 있다. 법의 왜곡된 해석과 행정 편의주의가 만든 ‘안전 공백’ 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방치되고 있다. <더에듀>는 <전국보건교사노동조합>의 이야기를 통해 닫힌 보건실 문 뒤에 가려진 불편한 진실을 파헤치고, 무너진 학교 안전 시스템의 근본 원인을 살펴본다. 더 이상 2023년 대전에서와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무엇을 바로잡아야 하는지 해답을 찾아간다. 우리 아이는 오늘, 학교에서 정말 안전할까. |

학교 보건실은 늘 분주하다.
급하게 밥을 먹다 체한 학생, 체육관에서 뛰어놀다 다친 학생, 급식을 먹고 알레르기 반응을 호소하는 학생까지 다양한 상황이 동시에 발생한다. 여기에 1형 당뇨, 뇌전증, 자가면역질환, 희귀·난치성질환 등을 앓는 ‘요보호학생’도 전체 학생의 약 5%에 달하며, 그 수와 중증도는 날로 더해지고 있다.
국회는 이 특별한 관리가 필요한 아이들의 안전한 학교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보조 인력’을 둘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학교보건법 제15조의2 제3항).
<제15조의2(응급처치 등)> ③ 학교의 장은 질병이나 장애로 인하여 특별히 관리‧보호가 필요한 학생을 위하여 보조인력을 둘 수 있다. 이 경우 보조인력의 역할, 요건 등에 관하여는 교육부령으로 정한다. |
이 법의 취지는 명확하다. 아픈 아이 곁에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지원의 손길을 두어, 학교 건강관리 시스템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자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청과 학교는 이 조항을 학생 개별 지원이 아닌 ‘보건실을 지키는 대체 인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왜곡하고 있다. 학생을 지원하는 대신 이 인력을 보건실에 홀로 앉혀 두고 보건교사의 수업으로 인한 부재를 메우는 데 활용하는 것이다.
‘강사’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수업도 하지 않고, ‘보조인력’을 근거로 삼고 있지만 아픈 아이들을 개별 지원해야 할 본래의 역할도 수행하지 못한다. 이로서 법의 선의는 훼손되고, 결과적으로 아픈 아이들을 더 큰 위험으로 내모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법의 선의가 ‘꼼수’의 알리바이가 되다
교육 당국은 보건교사의 수업으로 인한 보건실 의료공백에 대비한다며 ‘보건지원강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인력 제도를 확대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 ‘학교보건지원강사’는 법적근거가 불분명하다. ‘유·초·중등·특수학교 계약제 교원 운영 매뉴얼’에서 ‘강사’는 ‘정규 교원의 결원 및 교육과정 운영상 일시적 보충’을 위한 기간제 교원 중의 하나를 말한다.
그러나 정규교원인 보건교사가 정상적으로 출근하여 교실에서 수업하고 있는 상황은 ‘정규교원의 결원’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학교보건지원강사’는 보건교사의 결원을 대체하는 시간제 교원이 될 수 없으며, 보건교사의 업무를 대신할 수 없다.
만약 ‘보건지원강사’가 학교의 교육과정을 운영 지원하기 위함이라면 ‘보건교육(강의)’을 담당토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이 강사는 교실에서 수업을 하지 않고, 보건실에서 보건교사의 역할을 대체하고 있다.
교육당국은 ‘보건지원강사’가 학교보건법 제15조의2 제3항의 ‘보조인력’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우긴다. 그러나 학교보건법 제15조의 제3항의 보조인력은 명백히 교원이 아닐 뿐만 아니라, 보건교사 대체인력도 아니다.
간호사 면허를 가진 보조인력은 ‘질병과 장애로 인하여 특별한 관리와 보호를 필요한 학생’에 대한 보건교사의 활동을 보조하는 것을 임무로 한다.

이러한 혼란은 법률의 명백한 목적 전치(目的轉置)이자 심각한 논리적 모순이다.
아픈 아이의 건강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는 학교 내에서 유일하게 보건교사이다. 그런데 그 보건교사를 교실로 보내고, 그 빈자리를 법적 직무가 다른 보조인력으로 채우는 것이 과연 아픈 아이를 위한 정책인가?
이는 질병과 장애를 가진 학생 입장에서 보면, 학교내에서 주된 간호 전문가는 교과교육과정 운영을 위해 교실로 빼앗기고, 그나마 자신을 위해 존재해야 할 보조인력마저 자신과 무관한 ‘보건실 지킴이’ 역할로 빼돌려지는 이중의 배신과 다름없다.
게다가 보조인력이 홀로 보건실을 맡다가 생기는 문제의 법적 책임은 여전히 보건교사에게 귀속된다.
교육청과 학교가 ‘보건실을 지키는 인력’을 마련했다고 주장해도, 그 인력이 권한 없는 보조 인력이라면 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는 오히려 더 복잡해진다. 권한 없는 보조 인력이 자리를 지키고, 사고의 책임은 보건교사가 지는 모순된 구조다. 이 구조 속에서 보건실은 더 안전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정해졌다.
아픈 아이의 권리를 박탈하는 ‘위험한 역설’
교육청의 이러한 '꼼수'는 결국 다음과 같은 '위험한 역설'을 낳고 있다.
첫째, 아픈 학생은 전문가의 돌봄을 받을 권리를 박탈당한다.
보건교사는 교실에, 보조인력은 보건실 전체를 막연히 담당하게 되면서, 정작 법이 보호하고자 했던 ‘특별히 관리·보호가 필요한 학생’은 그 누구에게서도 집중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는 역설이 발생한다.
둘째, 모든 학생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 보조인력은 법적으로 의료행위를 할 수 없다.
갑자기 쓰러진 학생 앞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교실에 있는 보건교사에게 연락하는 것뿐, 이 모든 혼란 속에서 학생의 생명을 구할 골든타임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땜질식 처방’이 학교 전체를 더 큰 위험으로 몰아넣고 있다.

문제의 해법은 ‘분리’에 있다
이 꼬여버린 매듭을 푸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교육청이 처음부터 ‘보건교육 강사 지원’과 ‘아픈 학생 지원 보조 인력 배치’를 분리하여 운영했다면 지금과 같은 혼선은 없었을 것이다.
▶ 보건교육 강사: 수업이 필요한 학교에 강사를 지원하여 학생들은 안정된 환경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고, 보건교사는 본연의 직무인 보건실을 지킨다.
▶ 아픈 학생 지원 보조 인력: 법의 취지대로 질병·장애 학생이 있는 학교에 배치하여 보건교사의 지도 아래 아픈 학생의 건강관리를 ‘보조’한다. |
이처럼 정책을 ‘분리’하기만 하면, 보건교사는 보건실에서, 강사는 교실에서, 보조 인력은 아픈 아이 곁에서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학교 안전망은 지금보다 훨씬 촘촘해질 수 있다.
교육 당국에 묻는다.
‘법의 선한 취지를 왜곡한 채 학생 안전을 위협하는 ‘꼼수’를 언제까지 이어갈 것인가?’
지금이라도 엉뚱한 곳에 배치된 ‘보건지원강사’를 제자리로 돌려 놓고, 법과 원칙에 따른 제도적 분리를 실현해야 한다.
‘땜질식 처방’이 아닌, 정공법만이 닫힌 보건실 문을 열고, 우리 아이들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진정한 대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