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 민주공화국에서는 교원이나 공무원도 다른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기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서 교원의 정치적 기본권이 제한되고 있는 이유는 독재 권력에 의한 부당한 탄압이나, 교원 집단에 대한 비합리적 혐오 때문이 아니다. 헌법에 규정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이라는 공공선을 위해서이다. 헌법 제31조 제4항에는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리고 헌법 제7조 제2항에는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교원과 공무원의 정치적 기본권인 개인적 표현의 자유는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공공선과 충돌하지 않는 개인적 표현의 자유까지 교원과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제한하는 것은 민주공화국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정당 가입이나 선거운동 등 교원과 공무원의 집단적 정치활동까지 허용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다. 교원과 공무원의 정치활동을 허용하면 학교를 정치의 장으로 만들 위험성이 있고, 조직적인 관권선거가 부활할 가능성이 있어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학교를 정치의 장으로 만들 위험성 ◆ 보이텔스바흐 협약과 헌법재판소 판례 교원의 정치활동 허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학교 밖에서 근무 시간 외에만 허용하면, 학교 안에서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특히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협약’을 통해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976년에 마련된 ‘보이텔스바흐 협약’은 학생들에게 특정한 견해를 강제로 주입하거나 교화해서는 안 된다는 ‘강제성의 금지’ 원칙, 수업에서 현실 세계의 다양한 논쟁적 사안을 다루되 여러 입장을 균형 있게 제시해야 한다는 ‘논쟁성의 유지’ 원칙, 학생들이 스스로 현실적 상황을 판단하고 참여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주어야 한다는 ‘정치적 행위 능력 강화’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특정 정당에 가입해 선거운동을 하는 교사들이 수업 시간에 정치적 중립 준수와 강압적 주입 금지의 원칙 등 보이텔스바흐 협약을 제대로 지킬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지금까지 교원의 정당 가입이나 선거운동을 제한해 온 이유는 수업 시간에 교사들이 보이텔스바흐 협약처럼 정치적 중립 의무를 준수하도록 강제하기 위해서인데, 지금은 정당 가입이나 선거운동을 허용해도 보이텔스바흐 협약을 철저히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교원들이 보이텔스바흐 협약을 지키면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된다는 말도 교원들이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하지 않으면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된다는 말과 같은 동어반복일 뿐이다. 오히려 특정 정당에 가입하여 선거운동을 하는 교사들이 수업 시간에 보이텔스바흐 협약을 철저히 지킬 수 있을지 우려하는 국민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미 헌법재판소도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교원과 공무원의 정치활동을 근무 시간 내외를 불문하고 일절 금지해야 한다고 판단해 왔다. 지난 정당법 제6조 제1호 등 위헌확인(2001헌마710) 사건에서 헌법재판소는 “감수성과 모방성, 그리고 수용성이 왕성한 초·중등학교 학생들에게 교원이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고, 교원의 활동은 근무 시간 내외를 불문하고 학생들의 인격 및 기본 생활 습관 형성 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잠재적 교육과정의 일부분”이므로 근무 시간 외에서도 정치활동을 제한하는 것은 헌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또한, 헌법재판소는 국가공무원법 위헌소원 사건(2009헌바298)에서도 “교원의 특성에 비추어 보아 교육공무원의 선거운동을 기간과 태양, 방법을 불문하고 일절 금지하는 방법 외에 달리 덜 제한적인 방법으로 목적 달성이 가능할 것인지 불분명하고, 법익균형성도 갖추었다”라고 판시했다. 헌법재판소는 공직선거법 제60조 제1항 제4호 등 위헌확인(2018헌마222) 사건에서도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개별 행위들을 일일이 규정하기란 입법 기술상 불가능하고, 근무 시간 내외를 불문하고 학생들의 인격 및 기본 생활 습관 형성 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교육공무원의 특성 등에 비추어 침해의 최소성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확보라는 공익은 선거운동의 자유에 비해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법익의 균형성도 충족한다”라고 판시했다.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교원과 공무원의 정치활동을 근무 시간 내외를 불문하고 일절 금지해야 한다’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은 현시점에서 여론에도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교원이 근무 시간 외에 특정 정당에 가입해서 선거운동을 하면서도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정치적 중립 의무를 준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교원들에게 근무 시간 외에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교원이 방과 후에 학생들을 대상으로 선거운동을 해도 막을 방법이 없게 된다. 근무지 밖에서만 선거운동을 허용한다고 해도 교원이 학교 주변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선거운동을 하면 막을 수가 없다. 일부에서는 요즘 학생들은 교사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정치활동 허용의 근거로 들기도 한다. 하지만 교원의 정치활동을 허용하면, 특정 정당 소속의 교장과 교사들이 학교를 편향적으로 운영하게 되고, 그 피해가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돌아갈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국민이 대부분일 것이다. ◆ 교원의 정치활동과 학생의 민원 증가 일부에서는 교원이 근무 시간에 특정한 정당이나 정파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등 교육의 중립성을 훼손하는 행위를 제한하거나, 수업 시간에 보이텔스바흐 협약을 지키지 않는 교사들에 대한 처벌 조항을 넣어 놓으면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교원이 근무 시간이나 개별 수업 시간에 정치적 중립성 의무를 위반하는지, 보이텔스바흐 협약을 지키는지를 판별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이를 문제 삼고 신고하는 주체가 동료 교사나 학생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학교 내에서 교사 간 혹은 교사와 학생 간 극심한 정치적 갈등과 대립을 유발할 가능성도 매우 크다. 최근 경기 지역의 한 고등학교에서 ‘교사가 정치적 중립의무를 위반했다’는 학생의 민원이 접수되어 교육 당국이 조치에 나서는 일이 벌어졌다. ‘해당 교사가 수업 중에 전 대통령에 대한 비하 발언을 하고, 지지 집회 참가자들이 극우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 회원이거나 특정 종교단체 신도라고 했다’며 지역 교육지원청에 민원을 제기한 것이다. 해당 교육지원청은 이날 학교를 방문해서 특정 정치인, 정당에 대한 모욕과 일방적 옹호 등은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 소지가 있음을 알렸다고 한다. 2019년 서울 인헌고등학교 사태는 교원의 집단적 정치활동이 허용되지 않는 지금도 학교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로 인해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 피해를 당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이다. 당시 언론 보도에 의하면, 인헌고 마라톤 대회에서 학교 측이 학생들에게 반일 구호를 외치게 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에 학생들로 구성된 인헌고등학교 학생수호연합(학수연)은 교문 앞에서 “학생은 정치적 노리개가 아니다”라는 충격적인 현수막을 들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당시 국가인권위원회는 학생 인권 침해로 보기는 어렵다고 하면서도 일부 교사의 반일 구호제창, ‘조국 뉴스는 가짜뉴스’ 등 발언에 대해서는 “매우 부적절하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인헌고 교장에게는 정치·사회적 현안 관련 행사와 수업 진행에서 학생 의사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이뤄지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하지만 서울교육청은 교사들의 발언이 반복적이고, 강압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징계하지 않았다. ‘교육 공무원 징계 양정에 관한 규칙’에 따라 교사가 정치활동을 할 경우 ‘감봉’이나 ‘견책’을 주는 징계 기준이 있지만, 어디까지를 정치 운동으로 볼지 애매하기 때문에 처벌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교원의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있는 지금도 이러한데, 앞으로 교원의 집단적 정치활동이 허용된다면 학교가 정치의 장으로 변질되지 않을지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학교는 학교폭력과 교권 침해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런데 교원의 정치활동이 허용되면, 교사가 수업 시간에 말한 것을 꼬투리 잡아서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민원을 제기하거나 신고하는 학생들이 늘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동안 학교폭력이나 교권 침해로 징계를 받게 될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이를 모면하기 위해서 교사의 정당한 교육활동과 생활지도조차 아동학대로 신고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교원의 정치활동이 허용되면, 교사가 수업 시간에 말한 것을 꼬투리 잡아서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민원을 제기하거나 신고하는 학생들이 늘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금까지 아동학대를 핑계로 교사를 신고해 왔는데, 이제는 정치적 중립 의무 위반이라는 또 하나의 무기로 교사를 신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학교의 가장 큰 문제는 학교폭력과 교권 침해 등으로 인해 학교의 교육력이 심각하게 저하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학교에서 AI 기술 패권 경쟁 시대 세계를 선도하는 미래 인재를 기르기는 어렵다. 여기에 교원의 정치활동까지 허용해서 자칫 극우니 극좌니, ‘1찍’이니 ‘2찍’이니 하는 낡은 이념 전쟁까지 벌어진다면 학교의 교육력은 더욱 심각하게 저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계엄과 탄핵 이후 정치적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하고 있는 시대에 교원의 정치적 기본권 보장은 시기상조이다. 지금은 교원의 정치적 기본권 확대가 아니라, 극단적인 정치 투쟁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되는 안전한 학교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이다. 조직적인 관권선거의 부활 위험성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헌법에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과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규정하고 있는 이유는 과거 1960년 4·19 혁명을 불러온 3·15 부정선거 이후 정권이 교원과 공무원들을 조직적으로 선거에 동원하는 관권선거를 방지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교원과 교육공무원에 의한 관권선거 교원의 정치활동이 허용되면, 교육감 선거에서 관권선거가 부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약 현직 교장이 휴직한 후 교육감 선거에 출마할 수 있고, 교사들도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교장은 소속 교사와 학부모들을 중심으로 선거 캠프를 꾸리고 선거운동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소속 교사와 학부모들 입장에서도 출마한 교장이 선거에서 낙선하더라도 다시 학교에 교장으로 복귀할 수 있으니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현직 교육감이 선거에 다시 나오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관권선거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지금은 교육감이라도 지역 학교의 교장과 교사들을 선거운동에 동원할 수가 없다. 그런데 교원의 정치활동이 허용되어 교장과 교사들도 선거운동을 할 수 있게 되면, 현직 교육감은 이들을 선거에 조직적으로 동원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교원과 함께 교육청 공무원까지 정치활동이 허용된다면, 현직 교육감이 공적인 교육청 조직까지 총동원하는 관권선거를 막을 수가 없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미 지금도 현직 교육감들은 선거법의 공백을 이용해서 암암리에 관권선거를 하고 있다. 그런데 교원과 공무원의 정치활동까지 허용되면 현직 교육감들이 날개를 달게 될 것이다. 지금 교육감 임기는 4년이고 3선 연임이 가능하지만, 방대한 공적 조직을 동원할 수 있는 현직 프리미엄으로 인해 사실상 교육감 임기가 12년으로 늘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실제로 최근 춘천지방법원은 지난 2022년 지방선거 당시 불법 선거 운동과 뇌물수수 혐의를 받는 강원교육감의 교육자치법 위반과 사전 뇌물수수 혐의 사건 선고 공판에서 교육감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검찰은 앞선 결심 공판에서 교육감과 도교육청 대변인에게 징역 3년을, 관련이 있는 전직 교사에게 벌금 500만 원을, 지역 초등학교 교장 등에게 징역 6개월을 구형했다. 교육감이 선거법 위반으로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자, 강원지역 교원단체들이 선출직 공무원의 선거법 위반은 공공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중대 사안이라는 이유로 교육감의 사퇴를 촉구하고 나섰다. 앞으로 교원과 공무원들의 정당 가입과 선거운동이 허용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쉽게 알 수 있다. ◆일반 공무원들에 의한 관권선거 교원의 정치활동을 허용하는 것은 정치적 중립 의무가 부여되는 다른 공무원과의 형평성 문제가 발생한다. ‘교원도 시민으로서 정치적 기본권인 정당 가입과 선거운동 등 집단적 정치활동을 허용해야 한다’는 논리는 공무원도 시민으로서 이를 허용해야 한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국공립 유·초·중·고 학교 교원은 법관, 검사, 경찰공무원, 소방공무원, 군인 등과 함께 특수 분야의 업무를 담당하며 자격, 신분보장 등에서 특별법이 적용되는 특정직 공무원이다. 따라서 교원의 집단적 정치활동을 허용하면, 동일한 신분인 특정직 공무원들의 정치적 행위도 허용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공무원도 시민으로서 정치적 기본권인 정치활동을 허용해야 한다는 논리로 일반직 공무원까지 정치활동이 허용된다면, 전체 지자체 선거에서 현직 시장이나 도지사들이 소속 공무원들을 총동원하는 관권선거가 자행되어도 막을 길이 없게 될 것이다. 특히 현직 시장이나 도지사가 선거에 다시 출마한 경우는 공무원 조직 전체가 관권선거에 동원될 수도 있다. 공무원도 근무지 밖에서만 정치활동을 허용하고, 근무지 안에서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무원들이 특정 정당에 가입해서 선거운동을 하면서도 정치적 중립을 지킬 것이므로 관권선거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공무원의 정치적 행위를 허용해도 공직선거법상 엄정한 선거법 집행이나, 선관위의 감시, 감독을 통해서 관권선거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무원의 정치적 행위가 금지되어 있는 지금도 선거법 위반 사건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는데 엄정한 법 집행만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우리 사회가 관권선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정치적 양극화가 해소되지 않는 한, 교원과 공무원의 정치적 기본권 보장은 시기상조이다. 우리 헌법에서 같은 시민임에도 불구하고 교원과 공무원의 정치적 기본권을 제한하고 있는 이유는 그동안 정치적 이념 대립이 극심해서 관권선거의 폐해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치적 이념 대립이 완화되기는커녕 계엄과 탄핵 등으로 오히려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망국적인 관권선거를 방지할 수 있는 실질적인 대책도 없이 교원과 공무원의 정치활동을 지지하는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더에듀 | 오늘 학교 현장에서 가려진 모순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현재 고등학생 제자는 정당에 가입하고 출마도 할 수 있는데, 정작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교사는 한 줄의 의견도 낼 수 없는 ‘정치적 무권리 상태’입니다. 과연 무엇을 위한 권리 박탈입니까? ‘교육의 중립’은 교사를 무권리 상태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부당한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교육 현장을 지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교사의 목소리를 막아버리면, 학교에는 현장을 모르는 이들이 만든 탁상행정식 정책들만 남게 됩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의 몫입니다. 교사가 정책 과정에 참여해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교육 환경과 학습 여건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교사가 학생에게 살아있는 민주주의를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대한민국 교사,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정치적 권리 보장받지 못해 여러분, 대한민국 교사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치적 섬’에 갇혀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OECD 국가 중 교원의 정치적 권리를 이토록 전면적으로 봉쇄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가 유일합니다. 독일, 프랑스, 미국 같은 나라의 교사들은 정당 활동은 물론 출마도 자유롭습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민주주의 의식이 낮아서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교사가 깨어있는 시민일 때 교육이 더 건강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계적 기준에 한참 뒤처진, 이 낡은 규제는 이제 반드시 사라져야 합니다. 근무 시간 외 자유 보장 교사의 정치적 중립은 수업 시간과 학교 안에서 철저히 지켜져야 합니다. 하지만 학교 문을 나선 퇴근 이후의 삶까지 국가가 통제하는 것은 명백한 과잉입니다. 사생활의 영역에서조차 시민권을 박탈당한 교사가 어떻게 학생들에게 주체적인 시민의 삶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퇴근 후의 교사는 공무원이기 이전에 한 명의 시민입니다. 학교 밖에서의 자유는 교육의 중립을 해치는 것이 아닌, 교사의 인격을 존중하는 민주 사회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본입니다. 정당 가입의 필요성 지금 교사들은 교육 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있습니다. 정당 가입은 특정 정당을 지지하겠다는 선언 이전에, 현장의 실상을 전달하고 정책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시민의 통로’입니다. 교사가 정당을 통해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비로소 학교는 ‘탁상행정’이 아닌 ‘현장 행정’의 장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사의 특혜가 아니라, 무너져 가는 공교육을 살리기 위한 가장 실질적인 대책입니다. 학생과 학부모의 이익에 기여 교사의 정치기본권이 학생과 학부모에게 손해로 작용할까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현장 맥락을 무시한 정책들이 비가 오듯 쏟아질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과 학부모에게 돌아갑니다. 교사가 정책 과정에 주체로 참여해 ‘이 정책은 아이들의 학습권을 침해한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사의 목소리가 살아나야 행정 편의주의적인 정책이 줄어들고, 우리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창의적이고 안전한 학습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사회적 가치 수호를 위해 최근 12.3 계엄 사태나 청소년들의 극우화 현상을 보며 많은 분이 우려하고 계십니다.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길러지는 것입니다. 정치가 거세된 교실에서 침묵만 배운 아이들이 어떻게 건강한 시민으로 자라겠습니까? 교사가 시민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때, 비로소 아이들에게도 혐오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법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교사의 정치기본권은 우리 사회가 비민주적인 압력에 휩쓸리지 않도록 지켜주는 마지막 ‘방파제’가 될 것입니다. 무너진 교권, 왜 정치적 목소리가 해답인가? “교권 보호가 구호에만 그치는 이유, 현장의 목소리에 ‘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최근 우리는 수많은 동료를 잃으며 교권 침해의 비극을 목격했습니다. 전 국민이 슬퍼하고 대책을 약속했지만, 왜 현장은 여전히 바뀌지 않을까요? 바로 정책을 결정하는 정치권에 교사들의 목소리가 ‘실질적인 힘’으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들에게 교사는 ‘보호의 대상’일 뿐, 함께 정책을 논의할 ‘정치적 파트너’가 아닙니다. 교사에게 정치기본권이 있다면, 우리는 교권 보호를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법과 제도를 바꾸는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내 교실을 지키고 내 제자를 안전하게 가르칠 최소한의 방어막, 그 ‘핵심 열쇠’가 바로 교사의 정치적 시민권입니다. 교권 회복은 결국 우리 스스로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미래 교육의 설계자, 교사의 정책적 전문성 “교실의 담장을 넘어, 미래 교육을 설계하는 전문가로 거듭나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AI와 디지털 전환이라는 거대한 교육의 변화 앞에 서 있습니다. 이런 급격한 변화의 시기에 교육 정책이 현장과 따로 논다면 그 혼란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미래 교육의 성공 여부는 교사가 교실 안에만 갇혀 있느냐, 아니면 교육 생태계 전체를 설계하는 주체로 참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교사의 정치기본권은 단순히 투표권을 넘어, 교사의 전문적 식견이 국가 교육 설계도에 직접 반영되게 하는 통로입니다. 현장을 가장 잘 아는 교사가 정책의 파트너로 바로 설 때, 우리 아이들은 비로소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미래 지향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사의 시민권 회복은 대한민국 미래 교육을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입니다.
더에듀 | 실천교육교사모임은 현장교사들을 주축으로 현장에서 겪는 다양한 교육 문제들을 던져왔다. 이들의 시선에 현재 교육은 어떠한 한계와 가능성을 품고 있을까? 때론 따뜻하게 때론 차갑게 교육현장을 바라보는 실천교육교사모임의 시선을 연재한다. 내가 스스로 정하는 게 가장 좋다 아이가 스스로 책임지는 행동을 정할 수 있을까요? 정할 수야 있겠지요. 문제는 ‘제대로’ 정할 수 있느냐겠죠. 아이들에 대해 불신을 갖는 사람들, 아이들의 잠재력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제대로 정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맞습니다. 아이들은 불완전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턱대고 ‘아이들은 믿어주면 다 한다’고 말하는 것에 찜찜함을 느낍니다. 제 경험상 믿어준다고 아이들은 다 알아서 잘 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죠. 그렇다고 아이들의 잠재력을 부정하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아이들의 잠재력은 생각보다 큽니다. 그런데 그 잠재력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닙니다. 믿어주는 건 너무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믿어주기만 하면 나오는 그런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이들을 끌어주고 안내하는 역할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얼마나 섬세하게 안내하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잠재력은 빛을 발하기도 하고 발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교사의 역할이 너무도 중요한 겁니다. ‘아이들은 믿어주면 다 한다’는 말은 사실 믿어주는 건 기본이고, 응원하고 지지하고 끌어주고 도와주는 모든것들이 전제된 후에야 사실이 되는 겁니다. 이상적 아동관을 갖고 계신 분들한테는 죄송하지만, 믿어주기만 한다고 다 잘하는 아이는 이 세상에 거의 없습니다. 있긴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런 아이를 영재 혹은 천재라 부릅니다. 말이 길었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아이들은 교사의 도움 아래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을 수 있고, 스스로 책임지는 행동을 정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는 가능합니다. 아이와 아래와 같은 대화가 가능할 겁니다. “(복도에서 뛰는 아이를 멈춰 세우며) 잠깐 멈출게요. 뭐가 잘못됐을까요?” “복도에서 뛰었어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복도에서 뛰지 않아요.” 여기까지의 대화, 별것 아닌 것 같은가요? 그럴 수 있겠죠. 그렇지만 “누가 복도에서 뛰래? 여기에 너네만 있어? 또 뛸 거야?” 식으로 다그치는 것보다 저는 훨씬 낫다고 봅니다. 첫째, 질문의 형태로 물어보는 건 상대방이 존중받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둘째, 무엇보다 자기 잘못과 앞으로의 행동을 자기 입으로 얘기했습니다. 사실 지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모범답안을 얘기한 걸 모르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교사가 일방적으로 혼내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안까지 모두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여기까지만 하면 사실 별 효과가 없는 건 매한가지긴 합니다. 그래서 저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갈 것 같습니다. “복도에서 뛴 것에 대한 책임지는 행동을 해 볼게요. 어떤 걸 하면 될까요?” “……” 네, 사실 아이는 얘기하지 못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아이는 알아서 다 잘하지 않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책임지는 행동인지 배우지 않으면 모릅니다. 평소에 학급에서 책임지는 행동에 대해 이것저것 고민하고 실제로 해본 경험이 많지 않은 아이라면 쉽게 말하지 못하는 게 당연합니다. 이럴 때 교사가 대안을 제시해 주고 동의를 거치는 과정을 거치면 좋습니다. “책임지는 행동으로 여기서 저쪽 복도 끝까지 뛰지 않고 걸어오는 연습을 하면 어떨까 싶어요. 할 수 있을까요?” 거의 대부분의 아이는 그러겠다고 할 겁니다. 이때, 대안을 더 다양하게 제시하면 좋습니다. 나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느끼면 아이는 더 존중받는다고 느끼며, 자발적으로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책임지는 행동으로 여기서 저쪽 복도 끝까지 걸어오는 연습을 하거나 ‘복도에서 걸어다니기’ 캠페인을 쉬는 시간에 하면 어떨까 싶어요. 둘 중에 어떤 걸 해볼래요?” 그런데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드실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상 선택을 강요한 거 아니냐고요. 아이 스스로 정한 것처럼 했지만 실제로는 교사가 유도해서 그거 아니면 안 되게 한 거 아니냐고요.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과거에 이런 상황에서 항상 선택권이 없었거나 있었어도 ‘답정너’같은 선택권만이 있었거든요. 우리가 스스로 대안을 생각하고 제안한 적도 당연히 없었습니다. 지금이라고 해서 문화가 근본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지금의 아이들도 이런 식의 질문과 선택, 대안 제시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고로 자기들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하기보단 그냥 선생님의 의도를 빨리 파악하고 할 것 빨리 하고 대충 끝내버리고 싶어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실제 중요한 건, 아이들을 대하는 교사의 마음가짐입니다. 정말로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 게 실제로 있겠어, 하고 회의적으로 다가가는 분들도 많다는 것 압니다. 항상 오해는, ‘존중’이라는 것이 아이들의 모든 의견을 들어주고 받아들여 그 의견대로 따라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강박에서 비롯됩니다.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것이 그런 게 아닌데 말이죠. 존중한다는 건 복도에서 뛴 아이에게 어떤 책임지는 행동을 할 건지 물어본 건 진심이어야 합니다. 그냥 형식적으로 물어본 건 아니어야 합니다. 그게 존중의 첫걸음입니다. 실제로 네가 잘못한 것에 대해 너 스스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라는 요구이며, 스스로 내린 결단을 존중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이가 진정 고민하여 스스로 얘기하면 사실 가장 좋습니다. 그런데, 아이들 대부분은 그런 고민을 해본 적도 없고 아직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기에 교사로서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해 도움을 주는 것뿐입니다. 교사는 실제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아이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런데 교사가 제시한 대안, 즉 ‘복도 걷기 연습’과 ‘복도 걷기 캠페인’ 모두를 아이가 거부하면 어떡할까요? 일단 우리가 아이에게 선택권을 준 이상 아이가 ‘거부할 권리’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거부하는 걸 버르장머리 없다고 나무랄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돌아가, 정말로 아이가 거부하면 어떡할까요? 당황할 필요 없습니다. 아이가 대답을 못 해서 대안을 제시한 것 뿐이니까요. 그렇다면 다시금 아이에게 대안을 요구하면 됩니다. “선생님, 저 두 개 다 쑥스럽고 하기 싫어요.” “그래? 쑥스럽구나. 그럴 수 있지.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네가 다시 생각해서 얘기해줘. 만약 생각이 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저 두 가지 중 하나를 해야 해.” 아이에게 당장 대답을 요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적당히 주는 건 필요합니다. 그런데 시간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만의 책임지는 행동을 얘기하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제시한 대안 중 선택해야 합니다. 아이를 존중한다고 하여 아이에게 무제한의 선택권을 주는 건 허용되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스스로 책임지는 행동을 정해 하게끔 하는 건 이상적인 방법이며, 할 수 있는 만큼은 해야 하지만 아이가 책임지는 행동 자체를 회피할 권리는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따윈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본인 스스로 정한다고 정했는데 너무 터무니없는 걸 정했다면요? 예를 들어 이렇게 말한다면요. “선생님, 저는 그럼 제가 잘못했으니 쉬는 시간 동안 복도에서 손 들고 서 있을게요.” 이렇게 말한 의도가 반항이든 그냥 엉뚱함의 발현이든 뭐든, 아이의 의견이라고 다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아니,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라면서 또 다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건 무엇이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것이 아이의 어떤 의견이든 받아들여 실행하라는 걸 의미한다면, 교실은 아비규환이 될 것입니다. 화가 나면 친구를 때려도 된다는 의견이 있을 때, 아이의 의견이니 받아들여야 한다면 교실은 폭력이 난무하게 될 겁니다. 의견을 존중한다는 건 사실 ‘말할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이가 하는 말이 아무리 터무니없더라도 일단 아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 자체로 비난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죠. 일차적으로는 그게 존중입니다. 그리하여 쉬는 시간 손 들고 서 있겠다는 말도 다소 터무니없지만, 그 말을 했다고 해서 그 아이를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때, 지난 글에서 제가 말한 ‘3R1H’의 원칙이 다시 필요합니다. 존중하는 방식(Respectful)인지, 연관성(Related)이 있는지, 합리적(Reasonable)인지, 도움을 주는 방식(Helpful)인지 말이죠. 일단 누가 보더라도 손 들고 서 있는 것은 아이를 존중하는 방식이 아닐 뿐더러, 아이가 복도에서 뛴 것과 전혀 연관성도 없습니다. 사실 이 3R1H의 원칙은 다소 어렵더라도 아이들에게 미리 얘기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책임지는 행동’은 이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요. 그래서 아이들이 다소 엉뚱한 방식을 얘기한다면 이 원칙을 들이밀면 됩니다. 모두 함께 정하는 것도 좋다 그런데, 사실 너무 어렵습니다. 대안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닌데, 거기다가 3R1H인지 뭔지 이상한 기준까지 맞춰야 하니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네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나 보구나. 그럼 우리 반 친구들에게 물어보고 함께 정해보자. 그리고 그 중 괜찮은 게 있으면 골라서 해 보자.” 그러고선 실제 반 친구들과 함께 생각해 보는 겁니다. 함께 정할 때도 3R1H의 원칙은 지켜져야 합니다. 친구들이 얘기한 대안 중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거기서 골라 하면 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대안을 잘 얘기할까요? 다소 엉뚱하고 말도 안 되는 것들도 많이 얘기하지만, 분명한 건 혼자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겁니다. 은근히 그럴듯한 대안을 얘기하는 친구도 생각보다 많습니다. 교사가 어떻게 질문을 하는지, 아이들의 대답을 어떻게 다듬으며 정리하는지에 따라 아이들 답의 수준도 덩달아 올라갑니다. 열심히 함께 논의했음에도 친구들이 얘기한 것 중에 마음에 드는 게 없다면요? 네, 앞에서와 같이, 그렇다면 본인이 대안을 제시하면 됩니다. 그게 아니라면 좋든 싫든 제시된 대안 중 골라야 합니다. ‘책임’이라는 건 그런 거니까요. 내가 싫어도,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해야 하는 거니까요. 사실 많은 아이들에게 자주 일어나는 문제행동은 미리 함께 머리를 맞대 책임지는 행동을 정하면 좋습니다. 이른바 ‘학급회의’를 통해 규칙을 정하는 거죠. 함께 머리를 맞대고 규칙을 정하는 것. 이게 말이 쉽지, 실제로 해 보면 정말 쉽지 않습니다. 생각해야 할 것, 고려해야 할 것도 많고요.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이 또 한가득인데, 언젠가 이야기할 날이 올지 모르겠습니다. ‘친절하며 단호한 초등학생생활지도, 어떻게 해야 하나’ 연재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더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이 연재의 수명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글이 누군가에게, 티끌만큼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실천교육교사모임과 함께 한 연재 ‘실천교사 이야기’를 마칩니다. 그동안 의미 있는 글을 보내 주신 실천교육교사모임 회원 분들과 애독해주신 독자 분들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더에듀 | 아이는 친구를 때렸다. 교사는 아이를 불러 조용히 지도했다. 그런데 그날, 교실보다 먼저 달려온 것은 부모의 항의였다. 사건은 아이의 손에서 시작됐지만, 문제는 어른의 말에서 커졌다. “우리 애가 왜 그랬겠어요?”라는 질문은 이미 결론을 품고 있다. “먼저 시비 건 건 상대방이잖아요”라는 말에는 아이의 행동을 돌아볼 여지가 없다. 부모는 아이의 편에 섰지만, 그 순간 교육의 자리는 사라졌다. 교사는 그때 깨달았다. 이 잘못은 아이의 것만이 아니었다. 요즘 교실에서 더 어려운 것은 아이의 행동이 아니다. 아이의 행동 뒤에 붙는 어른의 태도이다. 사실보다 감정이 앞서고, 지도보다 변명이 먼저 나온다. 아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이 사랑이라 여기는 문화가 교실을 흔든다. 교육의 본질은 잘못이 없도록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잘못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 아이는 실수할 수 있고, 화낼 수 있으며, 때로는 억울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감정 위에 무엇을 얹어 주느냐가 아이의 다음을 만든다. 사랑은 아이의 잘못을 덮어주는 일이 아니다. 사랑은 아이가 자신의 행동을 마주할 수 있도록 곁에 서는 일이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은 순간 편할 수 있지만, “그건 옳지 않아”라는 말은 아이를 한 단계 자라게 한다. 공자는 “허물을 고치지 않는 것이 진짜 허물”이라 했다. 아이의 말만 듣고 사실을 재단하면 책임은 사라진다. 늘 누군가 대신 싸워주면 아이는 돌아볼 이유를 잃는다. 그 결과 아이는 배려보다 권리를 먼저 배우고, 사과보다 항변에 익숙해진다. 책임을 배우지 못한 아이는 공동체에서 길을 잃는다. 물론 아이는 미성숙하다. 그래서 실수도 하고, 오해도 하며, 감정이 앞서기도 한다. 그렇기에 어른의 말 한마디, 태도 하나가 결정적이다. 그 순간 부모가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이의 내일을 바꾼다. 학교는 아이를 혼자 키우지 않는다. 교사는 아이의 행동을 가르치지만, 태도까지 대신 길러줄 수는 없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다시 시작하는 힘은 가정에서 자란다. 교육은 학교와 가정이 마주 서는 일이 아니라 나란히 서는 일이다. 아이의 잘못은 아이만의 잘못이 아니다. 가정의 말투, 사회의 시선, 어른의 반응이 겹쳐 아이의 오늘을 만든다. 아이는 어른의 등을 보고 세상을 배운다. 그래서 어른의 태도는 늘 교육이다. 진짜 어른은 아이를 무조건 감싸지 않는다. 함께 서서 잘못을 직시하게 하고, 책임을 가르치며, 다시 걸어갈 길을 보여준다. “우리 아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에요”보다 “다시 그러지 않도록 함께하겠습니다”라는 말이 아이를 키운다. 아이는 혼자 자라지 않는다, 어른의 태도만큼 자란다.
더에듀 | 2025년에 이르기까지 우리 교육계는 ‘교사의 정치기본권’ 허용에 대한 찬반으로 진보와 보수 양 진영 간에 줄타기를 해왔다. 진보 성향의 현재 정권조차 “학부모의 찬성률이 높지 않다”는 미지근한 입장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지 못하고 여론의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다. 급기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위원장은 단식에 들어가 대여 강경 투쟁에 나섰고, 대통령실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현장을 찾아 순간 모면의 타결 방안을 위한 발언으로 일단 단식을 풀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교육계가 많은 현안에 대해 진보와 보수의 협업이 절실한 상태에 교착되어 있음을 방증하는 적나라한 민낯이라 아니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지금이야말로 우리 교육계가 더 이상 진보와 보수 진영의 교육 정책에 ‘각개 전투’ 방식의 정책 입안에서 ‘협업 체계’로의 획기적인 대화와 타협이 필요한 때라는 것이다. 언제까지 대한민국 교육력의 분산을 지속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진보와 혁신은 이 시대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다. 인공지능, 디지털 전환, 교육 패러다임의 변화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변화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사회는 불안해지고, 그 불안은 보수의 이름으로 전통과 안정, 연속성을 요구한다. 문제는 진보와 보수가 서로를 부정하는 대립이 아니라, 함께 작동할 때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시점에서 얼마나 절실하게 인식하고 있는가이다. 교육은 양자 진영의 입장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영역이다. 교육학자 존 듀이(John Dewey)는 ‘민주주의와 교육’에서 교육을 ‘경험의 재구성’이라 정의하며, 사회 변화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분명 진보의 언어이다. 그러나 듀이는 동시에 교육이 공동체의 가치와 전통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역할을 부정하지 않았다. 변화는 축적된 경험 위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은 진보와 보수의 결합 위에 서 있다 할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적 보수 사상가인 마이클 오크숏(Michael Oakeshott)은 ‘보수적 성향에 대하여’에서 전통을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침묵의 지식’이라 불렀다. 말로 모두 설명할 수 없지만, 오랜 시간 검증된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혁신이 이 침묵의 지식을 무시할 때, 사회는 방향 감각을 잃게 된다. 반대로 전통이 변화를 거부할 때, 그것은 생명력을 잃은 관습으로 굳어버린다. 실제 교육 정책에서도 조화의 사례는 존재한다. 교육 선진국 핀란드는 창의성과 자율성을 중시하는 혁신 교육의 대표 국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토대에는 교사에 대한 강한 신뢰, 공교육 중심이라는 보수적 가치가 자리 잡고 있다. OECD의 Education 2030 보고서 역시 미래 역량으로 창의성, 문제해결력을 제시하면서도, 책임, 윤리, 공동체 의식을 핵심 가치로 병기하고 있다. 이는 혁신은 가치의 공백 위에서가 아니라, 가치의 토대 위에서 설계되어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아시아 최고의 부국인 싱가포르의 교육 역시 주목할 만하다. 싱가포르는 첨단 기술 교육과 글로벌 경쟁력을 강조하면서도 ‘Character and Citizenship Education’을 통해 국가 정체성과 사회적 책임을 강하게 가르치고 있다. 급진적 혁신 속에서도 질서와 공동체 의식을 유지하려는 보수적 선택이 국가 경쟁력과 충돌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결국 우리가 모색해야 할 길은 ‘진보 대 보수’의 구도가 아니라 ‘진보와 보수의 협업’이다. 교육 현장에서 이는 새로운 기술과 방법을 과감히 도입하되, 그 목적을 인간 성장과 공동체의 선이라는 오래된 질문에 묶어두는 일이다. 학생들에게 “무엇을 바꿀 것인가”뿐만 아니라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를 함께 묻는 교육이 필요하다. 지금은 혁신을 멈출 수 없는 시대다. 하지만 보수는 브레이크가 아니라 그런 혁신의 방향키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진보는 전통을 깨부수는 망치가 아니라, 전통을 재해석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우리 교육이 이 균형을 견지할 때, 우리는 변화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더에듀 전영진 기자 | 경북 김천의 증산초등학교를 지키기 위해 입학한 ‘만학도’ 어르신들이 자신들을 학생으로 인정하지 않고 분교 전환을 추진하는 교육당국을 상대로 법적 대응에 나섰다. 증산초에 재학 중인 60대~90대 어르신 학생 15명은 지난해 12월 29일 임종식 경북교육감과 전·현직 김천교육장 등 3명을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 혐의로 김천경찰서에 고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1차 고발이 ‘혐의없음’으로 각하된 지 한 달 만에 이뤄진 재고발이다. ‘폐교 위기’ 막으려 책가방 멘 어르신들...갈등의 씨앗 된 ‘학생 수’ 갈등의 발단은 지난 202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증산초는 신입생이 1명으로 급감하며 전교생이 7명에 불과해져 분교장 전환 위기에 처했다. 이를 지켜보던 지역 주민과 출향인들은 ‘학교 살리기’를 위해 뜻을 모았고, 그 결과 마을 어르신 13명이 전격 입학하며 폐교 위기를 넘기는 듯했다. 당시 학교장은 어르신들의 입학을 허가했지만, 상급 기관인 김천교육지원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학령을 초과한 어르신들을 정식 학생(의무취학아동)으로 인정할 명확한 규정이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현재 교육청이 산정한 증산초의 정식 학생 수는 8명인 반면, 교직원은 11명이다. 경북교육청은 ‘교직원 수가 학생 수보다 많은 경우’를 분교 전환 기준으로 삼아, 오는 3월 1일 자로 증산초의 분교 개편을 강행하겠다는 입장이다. “헌법상 교육 권리” vs “일반 학생 학습권 침해 우려” 고발에 나선 어르신들은 교육청의 이 같은 행정이 ‘차별’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고발장을 통해 “학령초과자라 하더라도 헌법과 교육기본법에 따라 무상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는 의무교육 대상자”라며 “행·재정적 지원을 고의로 외면하는 것은 교육당국의 직무유기”라고 주장했다. 반면 경북교육청 측은 실무적인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 교육청 관계자는 “어르신들을 학생 수 통계에 포함하긴 어렵지만, 실제 학교 현장에서는 일반 학생과 동일하게 교육과정과 급식 등을 지원해 왔다”고 해명했다. 또 “어르신들의 입학 목적이 학교 유지에 치중될 경우, 오히려 어린 학생들의 학습권이 침해될 우려가 있다”며 문해교실 등 대안적인 교육 형태를 권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참 좋은 학교’ 선정됐는데...“거꾸로 가는 행정” 비판도 주민들은 교육당국의 이중적인 태도도 문제 삼고 있다. 증산초는 지난해 교육부 주관 ‘농어촌 참 좋은 학교 공모전’에 선정될 만큼 우수한 교육 환경을 자랑하며, 경북교육청 역시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한 바 있다. 마을 주민 A씨는 “교육부로부터 상까지 받은 학교를, 정작 교육청은 통계 논리를 앞세워 분교로 격하시키려 한다”며 “마을의 구심점인 학교를 지키려는 어르신들의 절박한 마음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찰은 지난달 1차 고발 건에 대한 각하 사유와 어르신들의 반론을 검토해 이번 재고발 사건에 대한 수사를 이어갈 방침이다. 지역 소멸의 최전선에서 벌어지는 ‘학생 인정’ 싸움이 법정에서 어떤 결론을 맺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더에듀 AI 기자 | 올해부터 미국 학자금 대출 탕감액 비과세 폐지로 세금이 부과되면서 특히 저소득 차입자의 부담 증가 우려 목소리가 나온다. 지난 3일 미국 뉴스 미디어 Newsweek는 올해부터 미국 연방 학자금 대출 탕감액이 다시 과세 소득으로 취급되며 많은 차입자와 전문가의 우려를 보도했다. 미국의 소득연동상환제(IDR, Income-Driven Repayment)는 일정 기간 상환 의무를 이행한 차입자에게 남은 대출금을 탕감해 주는 제도로 지난해까지 탕감액은 비과세 적용을 받았다. 올해부터 탕감 금액은 일반 소득과 동일하게 세금이 부과된다. Education Data Initiative에 따르면 약 4250만명 이상의 학자금 대출 차입자가 영향을 받아 세금 부담 증가를 경험할 것으로 예상됐다. 재정 전문가들은 이 상황을 ‘세금 폭탄(tax bomb)’이라고 표현했다. 5만달러의 대출이 탕감될 경우, 연방세와 주세를 합쳐 최대 1만달러를 초과하는 세금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주에서 근무하는 Emily Carter(가명) 공립학교 교사는 “20년 넘게 대출을 갚아와 이제 숨을 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탕감 후에 세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끝이라고 믿었던 지점에서 또 다른 부담이 시작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Mark Sullivan 재정 상담가는 “많은 차입자가 탕감 자체에만 집중하고, 그 뒤따르는 과세 문제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며 “사전 대비 없이 맞닥뜨리면 재정적 충격은 상당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법조계와 입법부에서도 이 문제는 논쟁거리이다. 일부 의원들은 의회가 비과세 조치를 연장하거나 저소득 차입자를 위한 법적 보호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교육부 등 정책 관계자들은 정부의 세입 기반 유지를 위해 탕감액 과세 전환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학생 부채 관련 시민단체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미국 비영리 학생대출 옹호단체 ‘Student Borrower Protection Center’ 관계자는 “탕감은 고등교육 접근성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인데, 이를 다시 과세하는 것은 정책의 본래 취지를 흐리는 것”이라며 “의회가 비과세 조치를 연장하거나 저소득 차입자를 보호할 수 있는 별도의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 기사는 Article Writer를 활용해 작성했으며 지성배 편집국장의 감수를 거쳤습니다.
더에듀 지성배 기자·김연재 수습기자 | 이호동 경기도의원(교육기획위원회)이 아동학대처벌법 입건전조사종결(내사종결) 확대와 내사종결 시 지자체의 추가 조사 중지 필요성을 제기했다. 아동학대처벌법 제24조에 따르면, 아동학대 사건의 경우 수사기관은 내사종결 처분 외의 사건은 무조건 검찰 송치해야 한다. 내사종결이란 경찰이 수사 개시 전에 사건을 종결하는 것을 뜻한다. 이 의원은 5일 자신의 SNS에 ‘아동학대처벌법상 시/군/구청장 및 수사기관의 역할에 대하여’라는 게시물을 통해, 내사종결 확대 필요성을 제기했다. 아동학대 사건으로 입건되면 무조건 송치되므로, 빠른 내사종결 판단을 통해 불필요한 피해를 막아야 한다는 것. 실제 지난 2024년 국회입법조사처 현안분석 자료에 따르면, 아동학대 사건 10건 중 3건은 내사종결 처리됐다. 교육감이 ‘정당한 생활지도’라는 의견을 낸 사건 중 85.4%가 내사종결 또는 불기소처분됐다. 그만큼 무분별한 아동학대 신고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원은 이를 ‘말도 안 되는 신고’로 규정하고, 피내사자 조사 없이 빠른 내사종결을 제안했다. 특히 수사기관의 내사종결 사건에 대해서는 지자체의 추가 조사 중지 필요성을 제기했다. 현행법은 ▲지자체에 의한 조사 ▲수사기관에 의한 수사 2분할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수사기관이 내사종결 처리해도, 지자체 요청에 따라 수사기관이 동행할 경우 다시 피신고자는 다시 학대행위자로 조사를 받는 경우가 발생한다. 실제 경기도의 한 교사는 수사기관으로부터 내사종결 처분서를 받은 다음 날, 지자체의 출석 요구를 받는 황당한 상황에 맞닥뜨렸다. 이 의원은 “수사기관이 이미 내사종결 처리했다는 것은 학대행위자에 대한 별도 조치가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라며 “추가 조사에 응해야 한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더에듀 지성배 기자 | 서울교육청이 학생인권조례 폐지안의 재의를 요구했다. 공교육의 책임과 공익을 훼손하는 결정이라는 이유이다. 정근식 서울교육감은 5일 서울시의회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서울시의회가 의결한 ‘서울학생인권조례 폐지안’의 재의를 요구했다. 시의회는 지난해 12월 16일 서울학생인권조례 폐지안을 의결했다. 재석 의원 86명 중 찬성 65명, 반대 21명이었다. 서울학생인권조례 폐지안은 이미 지난 2024년 시의회가 통과시켰으나 서울교육청의 소송으로 대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으며, 폐지안의 효력이 중단된 상태이다. 그러나 지난해 주민조례발안으로 청구돼 다시 안건이 된 후 의결됐다. 당시 최호정 의장은 서울교육청 학생구성원의 권리와 책임에 관한 조례가 제정되어 있는 점과 학생 인권 보호를 위해 계속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근식 서울교육감이 이번 폐지안 의결에 대해서도 재의를 요구, 또다시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됐다. 정 교육감은 ▲헌법 위반 ▲상위법 위반 ▲공익 침해 ▲타당성 결여 ▲법원 판단의 반복적 부정을 재의 요구 이유로 댔다. 그는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인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해 온 최소한의 재도”라며 “일방적이고 반복적으로 폐지하려는 것은 교육에 대한 정치 폭력”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학생인권은 교육공동체 모두의 인권의 출발점”이라며 “후퇴는 교육공동체 모두의 인권을 후퇴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교육감은 이미 시의회 의결의 위법성을 담은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했으며, 김영호 국회 교육위원장과 최교진 교육부장관에게도 공식 서한을 전달할 예정이다.
더에듀 | 2022년 기준 학업중단학생이 매년 5만여명을 넘어선 것으로 조사됐다. 학업 중단 학생들은 대안교육기관을 통해 기초·기본 교육을 받으며 검정고시 등을 통해 학력 인정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대안교육기관에서는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어떤 교육을 진행하고 있을까. 또 그 안에서 학생들은 어떤 성장의 과정을 거치고 있을까. <더에듀>는 지난해에 이어 금산간디학교 아이들이 작성한 자신의 성장 기록을 통해 대안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이번 졸업 프로젝트로 사진집 ‘낯설게 보기’를 만들었습니다. 사진집에 들어가는 사진들을 찍고 고르며 제 사진을 통해 발견한 저의 마음에 대해서 깊게 들여다볼 수 있었어요. 제 사진집은 단순히 사진을 모아놓은 책이 아니라, 사진을 통해 스스로를 바라보며 성장해 온 1년의 기록입니다. 사진을 시작하게 된 계기 저는 모두가 인정해 주는 취미를 갖고 싶었어요. 기타를 치는 친구들처럼 저도 뭔가에 몰입하고 싶었죠. 그 즈음에 사진기를 들며 사진을 찍는 친구가 있었어요. 혼자 셔터를 누르며 자신만의 시간을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카메라는 셔터, 조리개, 감도 이 3가지만 다룰 줄 알면 무엇이든 찍을 수 있다고 해서 입문 난이도가 낮다고 생각했고, 저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필리핀에서의 첫 사진집 : 순간포착 사진에 흥미가 생겼을 무렵, 필리핀 이동학습을 떠났어요. 출사팀과 같이 사진을 찍고 공유하는 것이 즐거웠어요. 그토록 원하던 취미가 생겼죠. 몰입할 수 있는 도구가 생긴 것만으로도 행복했어요. 그때 저의 첫 사진집인 ‘순간포착’을 만들었죠. 제가 직접 만든 결과물을 다른 사람에게 나눌 수 있었고, 저도 몰입할 수 있는 무언가가 생겼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다는 게 정말 뿌듯했어요. 하지만, 사진집을 판매하며 제가 찍은 사진이 인기가 없는 것 같아 작아지기도 했어요. 그래서 사진에 흥미를 잃기도 했죠. 그럼에도 사진은 제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고, 하나뿐인 취미를 잃고 싶지 않았던 저는 이번에 또 다른 사진집을 만들기로 결심했어요. 사진을 찍으며 꼭 사진집을 만들지 않아도 되지만, 사진을 찍으면서 변화했던 저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 담고 싶었고, 다시 용기를 갖고 사람들에게 제가 카메라를 통해 바라보는 것들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찍을까 출사를 나가면 무엇을 찍어야 하는지 모를 때가 많았어요. 가끔은 한 컷도 안 찍고 돌아올 때도 있었죠. 그럴 때마다 제가 진심으로 좋아하고, 찍고 싶은 것을 찾고 싶었어요.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내가 사진에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은 그냥 예쁜 사진을 찍을 때가 아닌, 나만의 특별한 사진으로 찍을 때였어요. 저는 한없이 익숙한 공간과 피사체라도 기법, 구도 등을 이용해 낯설게 담아낼 때 진짜 제 사진을 찍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빛을 피사체로 삼아보기도 하고, 흔들린 사진 속에서 의도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챕터 1. 언제나 예측 불가능 올해 초,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빛의 색감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꼈던 적이 있어요. 제 사진에 빛은 항상 있었지만, 빛 자체를 피사체로 둔 적은 없었어요. 빛을 찍으며 느꼈던 것은, ‘예측할 수 없음’이었습니다. 빛은 늘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어요. 출사를 나갔는데 하늘은 흐리고, 구름이 많이 껴 있었어요. 원래 노을을 촬영하는 게 목적이었지만, 노을은 잘 보이지 않았고, 구름이 해를 덮고 있었죠. 실망하던 찰나, 날씨가 흐려 아름다워지는 것들이 보였어요. 빛이 새어 나오는 것 같은 구름은 ‘구름과 빛’이라는 소재를 매력적으로 만들었고, 어두워서 더 강하고 다양하게 빛나는 조명들도 발견했죠. 그렇게 촬영을 이어가다 금방 밤이 되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밝기를 올리려 이용한 저속 셔터가 사진을 흔들리게 했고, 흔들린 사진은 오히려 특별한 장면을 연출했죠. 자주 보던 풍경에서 다름을 상상하고 표현하는 것이 재밌었어요. 그렇게 ‘있는 그대로 찍는다’는 생각보다 ‘내 시선으로 다시 만든다’는 느낌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찍은 사진들로 ‘챕터 1, 언제나 예측 불가능’이 탄생했죠. 언제나 예측 불가능 깜깜하게 변한 하늘 뒤, 여러 색 LED가 눈에 띄었죠. 사람들은 앉아서 한강의 불빛들을 보며 얘기를 하거나 버스킹 공연을 보고 있었어요. 은은한 네온사인 덕분에 빛으로 퍼져있는 안개가 더 잘 보였고, 순간 모든 풍경이 몽환적으로 느껴졌어요. 찍을 때마다 의도대로 되지 않는 빛은 예측할 수 없고, 그렇기에 사진의 소재가 무한했어요. 나에게 이런 사진들은 특별하고, 특이하다. 있는 것을 그냥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만든다고 생각했어요. 이처럼 모든 상황과 장소에 아름다운 장면은 있고, 포착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어디서든 장면을 아름답게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출사였어요. 챕터 2. 익숙함에서 새로움을, 새로움에서 익숙함을 낯선 곳에서 새로운 공간을 담고 싶다는 마음으로 여름 방학 기간에 유럽 여행 캠프에 참여했어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직접 눈과 카메라에 담을 수 있어서 기대가 컸어요. 한번쯤 가 보고 싶었던 공간들에 호기심도 있었기에 즐거운 마음이었죠. 하지만 낯선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정은 쉽지 않았고, 카메라를 들 여유도 없었어요. 기대와는 다르게 새로웠던 풍경은 금방 익숙해졌고, 열심히 찍은 사진들은 전부 뻔한 여행 사진 같았죠. 재미가 없었어요. 지루함을 느끼고 있을 때 캠프에서 만난 선생님께서 “타지가 낯설고 신기하겠지만, 관광지를 너무 담으려고 하다 보면 진짜 중요한 순간들을 놓치기 쉽고 그 나라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하셨죠. 그 말을 듣고 유명한 관광지가 아닌, 평범한 풍경을 새롭게 볼 수 있었어요. 이곳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새롭게 느껴지는 사진을 찍고 싶어졌어요. 익숙함에서 새로움을, 새로움에서 익숙함을 남들이 보고 지나친 장소와 시간을 나의 시선과 시간으로 다시 들여다보곤 했어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오자는 마음으로 여행을 떠났어요.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발견한 건 제 마음가짐이었어요. 낯선 두 나라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카메라를 들었어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저는 타지에서 외로움을 느꼈고, 호기심 가득했던 곳도 일상이 되니 한국에 있는 것처럼 익숙하게 느껴졌어요. 여행을 떠나면 모든 게 아름다울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어디를 가던 아름답게 보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시간과 장소를 현지인만큼 익숙하게 바라보고 싶었고, 이곳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새롭게 느껴지는 사진을 찍고 싶었어요. 여행하면서 저는 눈으로 담는 즐거움도 배우게 되었어요. 빡빡한 일정 속에 카메라를 드는 대신, 눈으로만 바라봤던 순간들이 아쉽기도 했지만, 점점 눈으로 담는 것을 즐기게 되었어요. 카메라를 일부러 들지 않을 때도 있었죠. 저는 이제 카메라가 없어도 아름다운 세상을 눈에 담을 수 있어요. 챕터 3. 무엇이든 끝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 마지막 챕터는 혼자 서는 법을 배워가는 이야기예요. 생각해 보면 저는 혼자 있는 시간이 지루했어요.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한 공간에 있으면 멈춰있던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았죠. 우울한 모습을 보이는 친구가 있으면 내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고, 저를 필요로 해줬으면 했어요. 1년 동안 개인 졸업 작품을 하면서 혼자 사진을 찍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외롭기도 했고, 다른 친구들과 비교가 되기도 했어요. 주변을 보면 사진을 찍을 때 외로움을 느끼는 저와는 다르게 다들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보내는 것 같았고, 외로운 시간을 버티게 해 주는 각자의 취미가 있는 것 같았죠. ‘유일하게 취미라고 생각했던 사진도 혼자 있는 시간을 의미 있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면 나을까?’, ‘주변에 사람들이 없어지면 나는 살아가는 이유를 어떻게 찾아야 할까?’ 혼자 사진을 찍을 때 마음 한 부분이 공허했고, 16기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이런 공허한 감정이 안 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지금까지 곁에 있던 여행의 동반자가 친구들이었다는 생각이 소중하면서도, 친구들과 늘 함께할 수 없다는 게 실감이 났죠. 그래도 함께했던 기억을 되돌아 볼 때 슬픔과 외로움보단 좋은 감정을 기억하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선 타인에게 너무 의지하는 모습도 조금 버려야 했고, 저의 가치를 스스로 찾고 홀로 서는 법을 연습해야 했어요. 끝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같이 있어도 혼자 있어도 모두 채워져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을 마지막 챕터에 담았습니다. 무엇이든 끝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 1년 동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혼자 사진을 찍는 날이 많았어요. 외롭기도 했고, 혼자 출사를 갈 때면 지금 함께하고 있는 같은 반 친구들을 자주 떠올렸어요. 그럴 때마다 저는 혼자 행복을 느끼기 어려운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중학교 3년의 기억을 쭉 간직하고 싶지만, 새로운 인연을 만날 때 지금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을까 걱정이 돼요. 즐거웠던 기억, 서로에게 상처 줬던 기억 전부 추억으로 남길 준비를 해요. 늘 붙어있던 우리가 다른 길을 간다는 게 슬프지만, ‘끝’이 있다는 게 우리를 더 소중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이 뭉클한 기억을 사진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카메라는 세상을 보고, 나를 보는 눈 사진집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진과 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기 시작했어요. 필리핀 이동학습 때 사진과 저는 매우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카메라는 저와 친구들을 연결해 주는 도구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번에는 제 성장을 도와준 도구가 되었죠. 홀로 사진을 찍으며 외로움도 많이 느꼈지만, 사진은 저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게 했어요. 또 사진은 제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어떻게 자라고 싶은지 알게 해줬어요. 친구들과 항상 같이 있던 게 좋았던 저는 혼자가 되어보며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었고, 평범한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16기 단체 사진을 볼 때면 저희가 걸어왔던 시간이 생각나듯이, 저는 저의 사진을 볼 때면 스스로 던졌던 질문들이 떠올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