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전영진 기자 | 지난해까지 나란히 증가하던 4년제 대학과 전문대학의 학생 1인당 교육비 흐름이 올해 엇갈렸다. 4년제 일반·교육대학은 학생 한 명에게 투입한 교육비가 전년보다 2.6% 늘어난 반면 전문대학은 1.2% 감소했다. 전임교원 1인당 연구비 역시 4년제는 7.4% 증가했지만 전문대는 9.9% 줄었다. 반면 전문대 학생 1인당 장학금은 4.8% 증가했다. 교육부와 한국대학교육협의회는 27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2026년 8월 대학정보공시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올해 공시에서는 2025년 결산을 기준으로 학생 1인당 교육비와 장학금, 전임교원 연구비 등을 분석했다. 지난해엔 함께 늘었는데…전문대 교육비 증가세 꺾여 2025년 4년제 일반·교육대학의 학생 1인당 교육비는 2072만8000원으로 전년 2021만2000원보다 51만6000원, 2.6% 증가했다. 최근 흐름을 보면 2023년 1953만원에서 2024년 2021만2000원, 2025년 2072만8000원으로 증가세가 이어졌다. 학생 1인당 교육비는 대학이 학생 교육과 교육여건 조성을 위해 투입한 비용을 재학생 수로 나눈 금액이다. 인건비와 운영비, 장학금, 도서구입비, 기계·기구 구입비 등이 포함된다. 전문대는 방향이 달라졌다. 전문대 학생 1인당 교육비는 2023년 1246만7000원에서 2024년 1304만3000원으로 증가했지만, 2025년에는 1281만4000원으로 전년보다 1.2% 감소했다. 지난해 교육부가 2025년 대학정보공시 분석 결과를 발표하면서 '일반·전문대학 모두 학생 1인당 교육비 지속 증가'를 주요 특징으로 제시했던 것과 달라진 흐름이다. 지역별로도 4년제와 전문대의 차이가 나타났다. 4년제 대학 가운데 수도권 대학의 학생 1인당 교육비는 2228만7000원으로 전년보다 3.5% 증가했다. 비수도권은 1938만6000원으로 1.7% 늘었다. 반면 전문대 학생 1인당 교육비는 수도권과 비수도권 모두 감소했다. 수도권 전문대는 전년보다 2.0%, 비수도권은 0.5% 줄었다. 4년제 대학 내부에서도 증가 폭은 지난해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 2024년에는 수도권 4년제 대학의 학생 1인당 교육비가 전년보다 2.6% 늘 때 비수도권은 4.3% 증가해 비수도권의 증가율이 높았다. 지난해에는 반대로 수도권 증가율이 비수도권을 웃돌았다. 연구비도 4년제↑·전문대↓…수도권 4년제 증가폭 더 커 전임교원 1인당 연구비에서도 4년제와 전문대의 증감 방향은 갈렸다. 2025년 4년제 일반·교육대학 전임교원 1인당 연구비는 1억2364만5000원으로 전년 1억1514만1000원보다 850만4000원, 7.4% 증가했다. 지역별로는 수도권 대학이 1억6756만3000원으로 전년보다 9.9% 증가했고, 비수도권 대학은 8674만6000원으로 3.3% 늘었다. 수도권 대학의 전임교원 1인당 연구비가 비수도권보다 약 1.9배 많았고 증가율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전문대는 반대였다. 2025년 전문대 전임교원 1인당 연구비는 230만4000원으로 전년보다 25만2000원, 9.9% 감소했다. 다만 4년제 대학과 전문대는 교육 목적과 연구 수행 구조가 서로 다른 만큼 연구비의 절대액 자체를 단순 비교해 대학 간 연구역량 격차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올해 공시에서 확인되는 것은 전년과 비교했을 때 4년제 연구비는 늘어난 반면 전문대는 감소했다는 서로 다른 흐름이다. 교육비·연구비 줄었지만 전문대 장학금은 증가 전문대 학생 교육비와 전임교원 연구비가 줄어든 것과 달리 장학금은 늘었다. 2025년 전문대 장학금 총액은 1조5733억원으로 전년 1조4514억원보다 1219억원, 8.4% 증가했다. 학생 1인당 장학금도 438만원으로 전년 417만8000원보다 20만2000원, 4.8% 늘었다. 전체 전문대 장학금 가운데 국가장학금은 1조1735억원으로 74.6%를 차지했다. 4년제 일반·교육대학의 학생 1인당 장학금도 처음으로 400만원을 넘어섰다. 지난해 학생 1인당 장학금은 403만원으로 전년 382만9000원보다 20만1000원, 5.2% 증가했다. 장학금 총액도 5조3982억원으로 7.3% 늘었다. 장학금만 놓고 보면 4년제와 전문대 모두 증가했지만, 학생 1인당 교육비와 전임교원 1인당 연구비에서는 서로 다른 방향이 나타난 셈이다. 특히 전문대는 장학금이 늘어난 가운데 학생 1인당 교육비와 전임교원 연구비가 동시에 감소했다. 다만 교육부와 대교협이 공개한 이번 대학정보공시 분석자료에는 전문대의 학생 1인당 교육비와 전임교원 1인당 연구비가 감소한 이유에 대한 별도의 설명은 담기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 수치만으로 전문대학의 재정 여건이나 교육의 질 변화와 직접 연결해 해석하기는 어렵다. 다만 지난해까지 4년제와 전문대에서 함께 증가했던 학생 1인당 교육비가 올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연구비에서도 같은 흐름이 나타났다는 점은 향후 대학 재정과 교육투자 추이를 지켜볼 대목이다.
고교학점제 시행으로 학생마다 시간표가 달라지고 ‘공강’이 생기면서 학교는 새로운 교육적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더에듀>는 ‘전국사서교사노동조합’과 함께 기획연재 ‘사서교사와 미래교육’을 통해 공강을 독서와 탐구의 시간으로 바꾼 사서교사의 실천을 소개한다. 학생의 선택으로 생긴 시간을 배움의 기회로 연결하는 학교도서관의 역할과 함께, 교육과정 설계자로서 사서교사의 가능성과 배치 확대의 필요성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고교학점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학교의 시간표도 달라지고 있다. 학생들은 자신의 진로와 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해 이수하고, 서로 다른 과목을 선택한 학생들은 각기 다른 시간표를 갖게 된다. 여기에 수업량 적정화가 더해지면서 학교 교육과정 운영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공강 시간’이 발생한다. 교육부 역시 공강을 학생의 과목 선택 상황에 따라 발생하는 시간이며, 고교학점제를 탄력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간을 학교에서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단순히 수업이 없는 시간, 학생들이 각자 알아서 보내는 시간으로만 남겨 두어야 할까. 고교학점제가 학생의 선택권을 확대하는 제도라면, 그 선택으로 인해 생겨난 시간 역시 학생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학교도서관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고민의 결과로 2학년 학생 전체가 공강 시간을 활용해 한 권의 책을 함께 읽는 ‘윤독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특정 학생만 참여하는 독서동아리나 일회성 독서행사가 아니라, 학년 전체가 일정 기간 같은 주제를 공유하며 책을 읽는 프로그램이다. 각 학급마다 공강 시간은 달랐지만, 같은 주제의 책을 통해 흩어져 있는 시간을 하나의 독서 경험으로 연결하고자 했다. 하나의 주제, 서로 다른 두 권의 책 윤독의 큰 주제는 ‘멸종과 기후위기’로 정했다. 기후변화와 생태 문제는 학생들이 앞으로 살아갈 사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과학, 사회, 경제, 윤리 등 여러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선정한 책은 이정모의 『찬란한 멸종』과 마이클 셸런버거의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이다. 두 책은 같은 환경 문제를 다루면서도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과 강조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한 권의 책에서 하나의 정답을 찾게 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책을 통해 학생들이 환경 문제를 다층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 두 도서는 각각 2학년 학생의 절반가량이 동시에 읽을 수 있는 수량을 구입했다. 전반과 후반으로 학생을 나누어 한 학기 동안 한 권을 읽고, 다음 학기에는 책을 서로 교체하도록 구성했다. 한 번 구입한 책을 일부 학생만 읽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학기별 순환을 통해 학년 전체가 두 권의 책을 모두 만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윤독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책을 끝까지 읽었는가’만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해진 시간에 모두가 같은 속도로 같은 페이지를 읽도록 통제하기보다, 학생들이 자신의 공강 시간을 활용해 스스로 책을 읽어나가도록 했다. 사서교사는 독후활동기록카드를 구성해 매시간 독서 활동을 기록할 수 있도록 기획하고, 학생들은 그 안에서 자신의 속도로 독서를 이어간다. 공강 시간이 자칫 의미 없이 흘러갈 수 있는 상황에서 일정 시간 한 권의 책에 머무르는 경험 자체에도 의미를 두었다. 1년간의 윤독, 긴 호흡을 독려하는 독후 활동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을 선정하면서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이 책은 환경 문제에 대한 기존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고 환경주의자들을 강하게 비판하는 한편, 원자력발전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따라서 책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하기보다는 학생들이 저자의 논리를 검토하고, 이에 동의하거나 반박할 수 있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윤독과 연계해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저자와 토론하기, 학술 에세이 대회’를 운영했다. 관점이 부딪칠 수 있는 책 속 구절을 발췌해 제시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논증할 수 있도록 했다. 책의 저자가 권위 있는 답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독자가 질문하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토론의 상대’가 된 것이다. 학술 에세이 대회 논제 1. 책 447쪽, ‘가난한 나라의 성장을 가로막는 환경주의자들’을 읽고, 저자의 다음 주장에 동조 또는 비판하는 글을 작성하시오. * 환경주의자들은 부유한 국가에서는 에너지 소비를 억제해 경제 발전을 가로막을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아 왔다. 하지만 약하고 가난한 나라에 대해서는 지난 50년간 에너지 소비를 억제해 경제 발전을 가로막기에 충분한 권력을 휘둘러 왔다. 2. 책 545쪽, ‘우리에게는 그린 뉴클리어 딜이 필요하다’를 읽고 원자력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요약한 후, 탈원전 정책에 대해 3가지 이상의 근거를 들어 본인의 생각을 논증하시오. 이 활동을 통해 독서는 저자의 생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경험하게 하고자 했다. 특히 사회적으로 논쟁적인 주제를 다루는 책일수록 책을 읽지 않거나 배제하기보다는, 오히려 무엇에 동의하고 무엇에 동의하기 어려운지 따져 보고 그 판단의 근거를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다양한 관점을 접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힘 역시 독서를 통해 길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윤독 프로그램의 주제는 곧 학교도서관에서 운영하는 독서 프로그램의 주제가 되었다. 학생들은 멸종과 기후위기에 관한 여러 자료를 읽고, 각자의 관심 분야를 중심으로 주제를 심화 탐구한 뒤 월드카페 토론으로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다. 하나의 질문에 한 가지 답을 내리는 토론이 아니라 여러 테이블을 이동하며 다양한 관점을 만나고, 다른 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고 확장하는 과정이었다. 이어 극한기상을 주제로 전문가 강의를 마련했다. 학생들이 책과 자료를 통해 접한 기후위기 문제를 실제 연구와 연결해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책을 읽으며 생긴 질문이 토론으로 이어지고, 토론에서 해결되지 않은 궁금증이 다시 전문가의 설명과 만나는 구조를 만들고자 했다. 시기별로 흩어진 독서 프로그램은 하나의 주제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고교학점제 시대, 학교도서관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교학점제는 학생의 선택을 확대했지만, 동시에 학교에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학생별 시간표가 달라지고 공강 시간이 생기는 상황에서 학교는 학생들이 머물며 스스로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학교도서관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중요한 교육 공간 가운데 하나다. 특정 교과의 교실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여러 교과와 주제를 넘나들 수 있고, 학생 각자의 시간에 찾아와 배움을 이어갈 수 있다. 이번 윤독 프로그램은 공강을 없애거나 학생의 자율적인 시간을 또 하나의 수업으로 채우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학생들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 책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 그 읽기가 생각하고 질문하고 대화하는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교육과정 사이에 생겨난 시간을 비어 있는 시간으로 두지 않고, 학생이 스스로 읽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과 지식을 나누는 배움의 가능성으로 연결하는 것. 학교도서관은 그렇게 학생의 선택과 학교의 교육과정을 이어 주는 또 하나의 배움터가 될 수 있다. [사서교사 오선지 = 광주 상일여자고등학교 사서교사로 학교도서관을 수업과 독서, 탐구가 연결되는 교육 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광주광역시교육감 승인 인정교과서인 [미디어정보리터러시]의 대표집필자로 참여했고, 학교도서관저널에 미디어정보리터러시 수업 사례를 연재하며 학교도서관과 교과 수업을 연결한 실천을 나누고 있다. 학생들이 책을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질문하고 토론하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윤독, 사회적 독서, 독서 토론, 주제 탐구 등 다양한 독서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한다.]
더에듀 | ‘AI는 지식을 대체하는가? AI 시대에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인간 고유의 역량은 무엇이며, 학습의 기본 원리는 여전히 유효한가? 그렇다면, 교육은 무엇을 바꾸어야 하고, 무엇은 지켜야 하는가?’ AI 시대 교육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지만, 먼저 확인해야 할 질문들이 충분히 다뤄지고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AI 기술 자체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총 6회의 연재를 통해 교육학과 교육정책의 관점에서 AI 시대 교육 담론을 다시 성찰하고, 기술의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질문과 답은 서로 대체할 수 있는가 AI가 답을 만들어 주는 시대이니 이제 교육은 답을 찾는 교육에서 질문하는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한다. 처음 들으면 그럴듯하다. 그러나 생성형 AI는 답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연구질문도, 토론질문도, 후속질문도 만들어 준다. 그렇다면 AI가 질문까지 만들어 주는 시대에는 질문하는 교육도 필요 없어지는가. 더구나 AI가 답을 만들어 준다고 해서 답을 판단하고 검증하는 능력까지 필요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답이 맞는지 틀리는지, 타당한지 편향되었는지를 판단할 수 없다면 AI가 제공한 답은 지식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출력일 뿐이다. 그렇다면 최근 교육정책 담론에서 반복되는 ‘답보다 질문이 중요하다’는 주장 자체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질문과 답은 어떤 관계이며, 과연 서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인가. 질문이 중요하다는 말과 질문이 답보다 중요하다는 말은 전혀 다르다. 질문이 있어야 답을 찾을 수 있지만, 이미 축적된 답과 지식이 있어야 새로운 질문도 가능하다. 하나의 답은 새로운 지식이 되고, 그 지식은 다시 다음 질문의 출발점이 된다. 질문은 답의 반대말이 아니며, 답 역시 질문의 종착점이 아니다. 인간의 학습은 기존의 지식에서 모르는 것을 발견하고, 질문하고, 탐구하고, 답을 찾고, 그 답을 검증하면서 지식을 수정하고 확장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새롭게 축적된 지식에서 다시 질문이 탄생한다. 실제 배움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앞뒤를 오가지만, 중요한 것은 질문과 답이 하나의 학습과정 안에서 서로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이다. 인지과학의 관점에서도 이 관계는 분리되기 어렵다. 새로운 정보는 이미 알고 있는 지식과 연결될 때 이해되고, 충분히 조직된 배경지식은 추론과 문제해결, 비판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된다. 질문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좋은 질문은 지식의 반대편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좋은 질문은 지식의 경계에서 탄생한다. 좋은 질문은 지식의 경계에서 탄생한다 인간은 모르는 것을 질문한다. 그러나 완전히 모른다면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고, 모든 것을 이미 안다면 질문할 이유가 없다. 자신의 앎이 어디에서 멈추는지를 인식하고, 기존 지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지점을 발견하며, 무엇을 하나의 문제로 볼 것인지를 구성할 때 질문이 탄생한다. 그러나 질문은 단순히 발견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현상을 연결하고, 어떤 전제를 의심하며, 무엇을 문제로 삼을 것인지는 인간이 선택하고 구성한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창조하는 것은 세계 자체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질문의 틀이다. 같은 현실을 보고도 질문이 달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군가는 학생의 성취가 낮은 이유를 학생 개인에게 묻지만, 누군가는 그 성취를 판단하는 기준이 적절한지를 묻는다. 누군가는 AI 시대의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묻지만, 누군가는 왜 인간다움의 기준을 인간이 아닌 AI에게서 찾는지를 묻는다. 현상은 같아도 질문의 틀이 달라지면 문제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래서 잘못된 질문은 잘못된 답보다 더 위험하다. 답은 질문이 정한 범위 안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질문을 만드는 개념과 기준이 잘못되어 있다면 아무리 정교한 답을 내놓아도 문제의 본질에 도달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질문이 답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질문과 답은 독립적으로 떼어 어느 하나를 선택하거나 정책적으로 위계화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사고과정 안에서 서로의 질을 만들어 가는 상보적 관계다. 좋은 질문이 더 나은 답을 가능하게 하고, 그 답은 다시 새로운 지식이 되어 다음 질문의 출발점이 된다. 따라서 성찰이 필요한 것은 ‘답 중심 교육’이나 ‘질문 중심 교육’ 그 자체가 아니라, 어느 한쪽을 다른 쪽보다 우위에 놓는 정책담론이다. AI 시대 교육정책의 혁신은 답 중심에서 질문 중심으로 중심축을 옮기는 데 있지 않다. 질문과 답을 서로 대립시키고 어느 한쪽을 선택하게 하는 사고방식 자체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질문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다시 지식을 밀어내는 것도 위험하다. 지식은 교육의 전부가 아니다. 그러나 지식을 주변화한 채 질문과 탐구, 토론과 비판, 창의성과 주도성을 말할 수는 없다. 충분한 지식 없이 무엇을 질문하고, 무엇을 탐구하며, 어떤 근거로 토론하고 비판할 수 있는가. 좋은 질문을 만들고 판단하려면 지식이 필요하고, 답을 탐색하고 그 타당성을 검증하려면 다시 지식이 필요하다. 질문도 답도 지식 위에서 이루어진다. 지식은 질문과 답에 맞서는 또 하나의 선택지가 아니라, 질문을 만들고 답을 탐색하며 그 결과를 검증하고 다시 새로운 질문으로 나아가게 하는 학습의 토대다. 편향의 방향만 바꾸는 것이 혁신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교육정책의 변화 방식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몇 년 전에는 하브루타와 질문 중심 수업이 새로운 수업혁신 방법처럼 소개되며 교육부와 교육청의 정책과 연수에서 주요한 언어로 등장했다. 당시에는 생성형 AI도 없었다. 지금은 AI가 답을 대신해 주는 시대이므로 질문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질문이라는 교육적 행위가 새롭게 발견된 것이 아니라 시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이유와 이름을 붙여 다시 소환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러한 정책언어가 개념과 원리 위에서 축적되기보다 유행처럼 등장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반복된다는 점이다. 효과와 한계를 충분히 검증해 다음 정책에 축적하기보다, 새로운 이름의 정책이 등장하면 이전의 언어는 어느새 사라지고 다시 또 다른 혁신의 언어가 그 자리를 채운다. AI 시대의 새로운 교육언어처럼 소비되고 있는 ‘질문 편향 담론’ 역시 단독 현상은 아니다. 교육정책 담론은 새로운 것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것을 그 반대편에 놓는 방식으로 변화를 설명해 왔다. 지식보다 역량을, 가르침보다 배움을, 정답 찾기보다 질문과 탐구를 강조하는 식이다. 객관식이냐 서·논술형이냐를 둘러싼 논쟁도 다르지 않다. 결국 편향은 교육의 한 지점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지식보다 역량, 가르침보다 배움을 우위에 두는 가치의 편향, 객관식보다 서·논술형을 새로운 평가로 규정하는 평가방법의 편향, 여러 교수·학습 방법 가운데 특정 방식을 좋은 수업의 표준처럼 제시하는 수업방법의 편향은 서로 다른 모습처럼 보이지만 같은 사고의 틀을 공유한다. 문제가 되는 한쪽의 한계를 보완하는 대신 그것을 문제의 원인으로 규정하고, 반대편을 새로운 기준으로 세운다는 점이다. 특히 정치와 교육행정이 여러 교수·학습 방법 가운데 특정한 방식을 수업혁신의 대표 모델로 제시하거나, 특정 수업·평가 방식을 법과 제도를 통해 일반화하려는 시도는 교사의 전문적 판단 영역을 좁힐 수 있다. 교육의 목적과 기준을 세워야 할 정책과 법이 방법까지 선택하기 시작하면, 다양한 학생과 교과, 수업 맥락에 따라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평가할 것인지 판단해야 할 교사의 전문성은 오히려 약화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어떤 개념과 판단 기준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이다. 개념과 기준을 충분히 세우기 전에 새로운 정책언어부터 앞세우면 용어는 바뀌어도 편향은 반복될 수 있다. ‘답보다 질문이 중요하다’는 정책담론을 만들려면 먼저 무엇을 질문이라 하고 무엇을 답이라 하는지부터 개념적으로 공유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존의 답 중심 편향을 해소한 것인지, 아니면 답이라는 편향에서 질문이라는 편향으로 방향만 바꾼 것인지 판단할 수 있다. 그 판단 기준조차 없다면 새로운 담론은 편향을 해체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름의 편향을 반복하는 데 그칠 수 있다. 슬로건은 달라져도 사고의 틀은 같다. 지식이냐 역량이냐, 가르침이냐 배움이냐, 답이냐 질문이냐, 객관식이냐 서·논술형이냐를 선택하게 한다. 그러나 인간의 학습에서 이들은 어느 하나를 제거해야 다른 하나가 성립하는 관계가 아니다. 인간의 성장과 발달을 다루는 교육정책이라면 새로운 용어를 얼마나 빨리 도입했는가보다, 어떤 개념과 원리를 축적해 교육의 질을 지속해서 개선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새로운 슬로건이 등장할 때마다 이전의 교육을 낡은 것으로 밀어내는 대신, 무엇이 정말 잘못되었고 무엇은 여전히 필요한지를 먼저 구분해야 한다. 교육의 기준은 다시 인간의 학습이어야 한다 교육의 변화는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중심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배우는 전체 과정 안에서 각각의 의미와 관계를 다시 세우는 일이어야 한다. AI 시대가 되었다고 인간의 학습 원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AI는 인간이 지식에 접근하는 방식을 바꾸었다. 질문을 만드는 방식도, 답을 찾는 속도도 바꾸고 있다. 그러나 기술이 학습을 돕는 방식이 바뀌었다고 인간이 배우는 원리까지 바뀐 것은 아니다. 인간은 알고 있는 것에서 모르는 것을 발견하고, 질문을 만들고, 답을 탐색하고, 그 답을 의심하고 검증하면서 자신의 지식을 수정하고 확장한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질문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AI 시대 교육이 해야 할 일은 답을 버리고 질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을 배우고, 질문을 만들고, 답을 탐색하고, 그 답을 검증하며 다시 새로운 질문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인간의 전체 사고과정을 길러 내는 일이다. AI가 질문도 만들고 답도 만드는 시대라면 오히려 더 분명해진다. 교육의 기준은 AI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다. 인간이 어떻게 배우고, 생각하고, 판단하며 성장하는가이다. 다음 글에서는 AI 시대 교육개혁이 정말 바꾸어야 할 것은 무엇이고, 오히려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지 교육의 본질에서 다시 살펴보고, 6회에 걸친 ‘AI 시대, 미래교육의 함정’ 시리즈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 연재 순서 예고 - 제1편. AI는 지식을 대체하는가? • AI가 바꾼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식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 제2편. 왜 같은 AI를 사용하는데 결과는 다른가? • AI 활용 능력의 차이는 결국 인간의 전문성과 지식 수준의 차이인가. - 제3편. AI 시대 학생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 지식 교육은 축소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더욱 중요해지는가. - 제4편. 인간 고유 역량이라는 말의 함정 • AI와의 비교 속에서 인간다움을 설명하려는 교육 담론을 비판하다. - 제5편. AI가 인간의 학습 원리까지 바꾸었는가? • 인지과학과 교육학의 관점에서 다시 묻다. - 제6편. AI 시대 교육개혁의 진짜 과제는 무엇인가? • 기술이 아닌 교육의 본질에서 미래교육을 다시 설계하다.
더에듀 | 우리는 그동안 교사와 학교를 지키기 위한 국가의 책임 있는 행동을 얼마나 간절하게 원해 왔던가? 여기에는 온갖 말과 ‘교권 5법’이란 법조문만이 난무할 뿐 실제로는 실천하는 행동에 따른 실질적인 효과가 없음에 아쉬움만을 토로해 왔다. 하지만 최근 안민석 경기도 교육감이 직접 자신이 만든 ‘교권보호단’의 출범에 즈음하여 많은 고민과 결단 끝에 드디어 강력한 행동에 옮기는 결단을 발휘해 교육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교사를 지키고 교육을 살려야 한다는 강력한 교육 철학에 근거해 “교사 협박을 용납할 수 없다”는 용기 있는 남다른 의지이기에, 이전의 형식적인 법조문 상의 교육감의 권한과는 달리 직접 행동에 나선 것은 이 나라 교사와 교육을 위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우려를 불식하고 향후 우리 교육에 대한 기대와 함께 희망을 불어넣는 환영할 만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학교 현장에서 아이들 간의 갈등을 중재하고 바른길을 지도하는 것은 교사 본연의 숭고한 교육 행위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교실에서 이 정당한 교육활동은 종종 가혹한 대가를 요구받는다. 다툼을 말리고 훈육했다는 이유만으로 ‘내 자식 지상주의’에 따른 극심한 이기적인 학부모에 의해 교사가 ‘아동학대’라는 무거운 혐의의 피의자가 되고, 학교 앞 피켓 시위와 민형사 소송이라는 거대한 법적·정신적 폭력 앞에 노출되기 일쑤였다. 최근 부천 오정초등학교에서 발생한 악성 민원 사건은 이러한 교육 현장의 병리적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학생 간 갈등을 중재한 담임교사를 향해 악성 민원을 퍼붓고, 교권보호위원회가 교육활동 침해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동학대 형사고소와 민사소송을 이어간 학부모의 행태는 정당한 교육권을 뿌리째 흔드는 일이었다. 1%가 99%의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줌에도 학교는 가슴앓이를 할 뿐 악성 민원인에 휘둘려 학교 본래의 기능을 상실했다. 그동안 학교와 교사가 얼마나 시달려 왔는지, 이 비극의 사슬을 끊어내기에 나선 것은 경기도교육청이었다. 안민석 경기도교육감은 공약 실행 1호인 ‘교권보호단’의 단장으로서 부천오정경찰서를 찾아 해당 학부모를 협박 등의 혐의로 직접 형사고발했다. 비록 뒤늦게 학부모가 고소를 취하하고 사과의 뜻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기관 차원의 ‘1호 형사고발 사안’으로 엄정히 단죄한 교육감의 결단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이번 고발 조치는 단순한 일회성 강경 대응을 넘어, 교권 보호의 패러다임을 ‘교사 개인이 홀로 견디는 외로운 싸움’에서 ‘교육청과 공공이 전면에 나서는 법적·행정적 보호’로 전환하겠다는 강력한 선언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선생님을 지키겠다”는 안 교육감의 의지는 교실이라는 외로운 섬에 갇힌 교사들에게 실질적인 안전망이 되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러나 교육감이 직접 나서는 1호 고발이라는 상징적 결단이 단발성 행정에 그치지 않고, 악성 민원을 근절하는 ‘실효성 있는 시스템’으로 지속해서 정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제도적 패러다임의 전환이 확고히 정착되어야 한다. 첫째, 법적 대리 및 전담 대응 시스템의 완전한 체계화다. 교권 침해 사안이 발생했을 때, 피해 교사가 직접 변호사를 구하고 서류를 작성하며 법정에 서는 구조를 완전히 끝내야 한다. 경기도교육청이 이번에 변호사, 경찰, 갈등조정 전문가 등 300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교권보호전담관’을 확대 발족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방향이다. 악성 민원의 초기 단계부터 전문 기구가 무조건 개입하여 기관 대 기관으로 대응하는 원스톱 법적 방어 체계가 이제는 일상적으로 작동해야 할 것이다. 둘째, ‘아동학대 처벌법’의 악용을 막을 제도적 보완과 법리적 가이드라인 확립이다. 현재 수많은 정당한 생활지도가 무분별한 정서적 아동학대 고소의 빌미가 되고 있다. 교육적 지도와 악의적 학대를 명확히 구분하는 세부 기준을 정립하고, 교권보호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정당한 교육활동에 대해서는 수사기관이 신속히 기각 및 무혐의 처리를 내릴 수 있는 법적 연계가 조속히 마련되어야 한다. 셋째, 사법적 단죄를 넘어선 ‘학부모 교육 및 공동체성 회복’의 교육적 승화다. 법적 강경 대처는 악성 민원의 남발을 막는 최소한의 방어선일 뿐, 교육의 본질은 소송전이 될 수 없다. 학부모 역시 교육의 한 축임을 자각하도록 돕는 학부모 교육 프로그램의 법정 의무화, 학교 내 갈등을 초기 단계에서 중재할 정교한 ‘학교갈등조정위원회’의 활성화가 병행되도록 보장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교사가 위축되어 방어적 교육활동으로만 그치는 교실에서는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다. 즉,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범죄자로 몰릴까 봐 두려워하는 사회는 미래를 향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이번 경기도교육청의 ‘교권보호단 1호 형사고발’ 조치가 단지 특정한 사건에 대한 일회성 처벌로 끝나지 않고, 교사의 사명감과 인간적 존엄을 지켜내는 든든한 방파제로 자리매김하기를 강력히 기대하고자 한다. 교사가 안전해야 아이들도 바로 선다. 교권이 존중되어야 학생 인권도 함께 존중을 받을 수 있다. 향후 모든 교육 개혁은 선생님의 교단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키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국민 의식과 실천이 함께 하길 바라며 이번 조치가 제왕처럼 군림한 악성 민원인과 이를 부추기는 교묘한 변호사들의 얄팍한 법기술의 적용이 난무하는 학교의 사법화에 대한 경종으로 함께 작동하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더에듀 | 세계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고도 뼛속에 각인되는 첫 문장을 꼽으라면 단연 레프 톨스토이의 명작 『안나 카레니나』의 도입부일 것이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이 불멸의 통찰을 오늘날 대한민국의 학교 현장에 대입해 보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을 지을 수 없다. “잘나가는 행복한 학교는 서로 닮았고, 사사건건 시끄러운 불행한 학교는 저마다의 기상천외한 이유로 흔들린다.” 우리 주변의 학교들의 실상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 보자. 어떤 학교는 교장실, 교무실, 행정실, 그리고 학부모회까지 톱니바퀴 돌듯 맞물려 평화로운 클래식 음악이 흐른다. 반면, 어떤 학교는 월요일 아침부터 금요일 퇴근길까지 교권 침해, 악성 민원, 학교폭력, 부서 간 갈등이라는 불협화음의 헤비메탈이 멈추지 않는다. 도대체 전국으로 번져가는 이 불행한 학교들의 ‘제각각인 이유’는 무엇이며, 우리는 이 꼬인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이 글에서는 인간 교육의 본질을 추구하면서 학교 공동체의 평화를 되찾기 위한 ‘결자해지(結者解之)’의 해법을 짚어보고자 한다. 먼저 사사건건 충돌하는 학교들을 들여다보면 공통적으로 감지되는 연주곡이 있다. 바로 ‘소리 없는 아우성’과 ‘무사고(Thoughtlessness)’의 이중주라 할 수 있다. 선생님들은 늘어나는 행정 업무와 살얼음판 같은 민원 사이에서 “제발 나 좀 건드리지 마라”며 마음속으로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고, 학부모는 학부모대로 “내 아이가 혹시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불안의 레이더를 세운다. 이 와중에 학교라는 공간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교육적 사유’와 ‘인간적 공감과 유대’는 상실해 버린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저명한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경고했던 ‘생각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은 거창한 법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옆 반에서도 그렇게 처리했으니까”, “지침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까”, “관행적으로 해오던 것이니까” 등 많은 이유를 들면서 기계적으로 갈등을 대하고, 상대방의 맥락을 ‘자세히 보거나 오래 보지’ 않은 채 문서와 법조문으로만 대응하는 순간, 학교는 교육의 장이 아니라 법적 공방의 장으로 변해버린다. 설상가상으로 여기에는 입시 준비 시간도 부족하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민주 시민 교육’의 부재가 불을 더욱 지핀다. 이런 교육에 허덕이는 학교는 작은 오해 하나도 메가톤급 폭탄으로 키워내고 만다. 톨스토이가 말한 행복한 가정들의 닮은 점은 ‘스스로 갈등을 소화해 내는 건강한 위장(胃腸)이 있다’는 것이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모든 문제를 법정이나 교육청으로 끌고 가기 전에, 학교 공동체 내부에서 먼저 매듭을 풀려는 ‘결자해지’ 내지 교육 공동체 상호 간의 ‘자율적 회복력’을 복원해야 한다. 교사, 학생, 학부모는 서로를 대적하는 삼각관계의 적수가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고 말해줄 수 있는 정서적 여유를 복원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학부모 총회나 간담회를 딱딱한 전달식 회의가 아니라, 차 한 잔 나누며 아이들의 성장을 함께 고민하는 ‘따뜻한 공감의 장’으로 리모델링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학생 간의 사소한 갈등이 발생했을 때, 즉각적인 학폭위 신고와 처벌로 대응하기보다 ‘회복적 생활교육’을 도입하는 자체의 노력이 또한 중요하다. 여기에는 서로의 마음에 난 상처를 들여다보고 사과와 용서의 과정을 거치게 하는 것, 그것이 진짜 학교가 해야 할 ‘인성 교육’이자 ‘삶의 지혜’ 교육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학교 내부의 노력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구조적 태풍이 불 때가 있다. 이때야말로 교육청과 국가가 나서서 결자해지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말로만 학교 현장을 지원한다고 하지 말고 실체적인 행동과 성과를 도출해야 한다. 여기에는 지역별 교육청 나름의 각고의 노력이 지금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함께 병행되어야 한다. 서울특별시교육청의 ‘교원안심공제’ 및 ‘통합민원창구’ 운영 (2024~2025)의 사례를 들여다 보자. 이는 교사가 홀로 악성 민원을 감당하지 않도록 학교 1차선에서 민원을 대리 접수·분류하고, 법적 분쟁 발생 시 교육청이 변호인단과 비용을 전폭 지원하는 제도이다. 교사가 안심하고 교육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든든한 방패가 되어 준 모범 사례라 할 수 있다. 교육부의 ‘학교폭력 제로센터’ 전국 확대 (2025~2026) 운영도 나름대로 기여하고 있다. 교사가 학폭 조사 업무로 본업인 수업과 생활지도를 방해받지 않도록, 퇴직 경찰 등 외부 전문 조사관을 배치해 학교의 업무 부담을 덜어준 정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의 비극은 인물들이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각자의 집착에 빠져들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오늘날 갈등으로 얼룩진 불행한 학교들의 모습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모든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교육의 본질로 돌아가는 데 있다. 점수 몇 점에 연연하는 입시 기계를 만드는 곳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사유할 줄 아는 건강한 시민을 길러내는 곳이 학교여야 한다. 이런 학교 문화에서는 학생도 학부모도 교사도 상대를 배려하고 양보하고 나누며 공감을 나누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정착한다. 이 속에서 실수는 인간이지만 용서는 신의 포용력으로 넘어가는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필자가 오랜 학교 경험에서 얻고 지금도 불변의 지론(持論)으로 간직하고 있는 원리다. 결론하여 학교 구성원들이 스스로 갈등을 소화해 내는 ‘품격’을 기르고, 국가와 교육청이 그 뒤를 든든하게 받쳐줄 때, 우리는 마침내 톨스토이의 문장을 이렇게 바꾸어 쓸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행복한 학교는 ‘존중과 사유’라는 닮은꼴의 이유로 평화롭다.” 그 눈부신 평화의 배움터를 향해, 교육공동체 모두가 매일 서로를 향한 따뜻한 한 걸음이라도 전향적으로 내딛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더에듀 | 지난 5일 경기교육청에서는 ‘편한교복으로 교복문화 대전환 추진계획’을 주제로 간담회가 개최되었다. 교육청 배포 자료에는 △편안함으로 입고 자율로 완성하는 교복문화 대전환 △교복 선택권 확대, 학부모 부담 완화, 학교 업무 경감 △교육공동체 숙의를 통한 제도 개선 등이 언급되었다. ‘편한교복’이라는 세련된 수사와 학교 민주주의의 위선 하지만 학생들은 교육청의 도움 없이도 이미 변화해 왔다. 학생자치회 선거 공약으로 교복 디자인을 공모 후 반영하고, 사복데이를 추진하며 자율성을 추구하기도 한다. 소속감과 자율성을 동시에 조화시키는 건강한 흐름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민주주의처럼 보이는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는 ‘착한 독재’를 학생들에게 학습시키는 과정이다. 초·중등교육법과 시행령에서 시작해 학칙으로 하위 위임된 복장 규정이 학칙에서 다시 학생생활규정으로, 학생생활규정에서 개별 교복규정으로 하위 위임되면서 의사결정권에 대한 법적 통제와 귀속의 ‘주어(Subject)’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어떤 학교는 민주적인 ‘교장’을 잘 만나면 공약이 실행되기도 하지만, 교장이 바뀌면 한순간에 그간의 자치 결과가 사라진다.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가장하여 교장에게 잘 보여야 공약이 실현된다는 독재의 생리를 학습하는 중이다. 이는 단순히 교복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물품선정위원회, 학교평가위원회 등 민주적 운영을 하라며 학교로 쏟아지는 각종 업무는 교육청 매뉴얼과 지침의 무능으로 인해 학교 내부 규정에서 법치주의와 의회적 민주주의의 통제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학생자치회 대의원회의 의결은 ‘학교장 승인으로 결정한다’로 명시된 학교가 여전히 많다. 오늘은 학교민주주의를 책으로만 교육하겠다고 하는 진보교육의 민낯을 살펴보려고 한다. 교복 디자인 변경 과정 - 하위 위임의 덫과 사라진 의사결정 권한 단위학교의 복장 규정은 「초·중등교육법」 제8조(학교 규칙) 및 동법 시행령 제9조 제1항 제7호에 근거한다. 이들 상위 법령은 학생 복장 등 학교생활에 관한 사항을 학교 규칙(학칙)에 기재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개정 시 학생, 학부모, 교원의 의견을 수렴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경기교육청 교복 학교주관구매 가이드북에 따르면 교복 디자인 변경은 의견수렴, 설문조사, 학교운영위원회 심의를 거쳐 학칙에 반영하는 표준 절차를 예시로 설명하며 생활인권규정의 개정방법을 따르라고 설명한다. 일부 학교는 ‘학교 구성원의 합의가 쉽게 반영될 수 있도록 교복 규정을 학생생활규정(생활인권규정)에서 별도의 교복규정으로 하위 위임’하여 유연하게 운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하위 위임 과정에서 심각한 구조적 모순이 발생한다. 법률에서 학칙으로, 학칙에서 생활규정으로, 생활규정에서 다시 교복규정으로 끊임없이 위임 권한이 하향 전달되면서 정작 최종 결정을 내리는 ‘권한의 주체’가 법제적으로 모호해진 것이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자치 토론을 거쳐 결정한 ‘사복 데이’나 생활복 착용 변경안을 최종적으로 승인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 단위학교 학칙이나 교복규정은 구체적인 ‘주어’를 제시하지 않는다. 최하위 규정에 명시되는 ‘이 규정에서 정하지 아니한 사항은 ◯◯◯◯가 정한다’라는 명시조항이 없거나, ‘학교장이 정한다’라고 포괄적으로 적혀있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학교장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한다. 결국 의사결정의 주어가 실종된 규정의 맹점 속에서, 학생들의 오랜 자치 활동 결과물은 학교장의 개인적 성향이나 자비에 완전히 종속된다. 자발적 합의와 정당한 절차를 거쳤음에도 결재권자인 학교장 개인의 성향에 따라 실행 여부가 뒤바뀌는 구조는 학생들에게 ‘민주적 합의보다 절대권력자의 기분을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냉소적 생리를 습득하게 만든다. 절차와 법치 대신 권력자의 선의에 기대는 처세술, 그것이 바로 학교가 자치라는 포장지 안에서 학생들에게 실습시키고 있는 은밀한 독재다. 위원회 구성 및 위원 선정 과정의 실태 - 주어 없는 추천과 자의적 운영 이러한 ‘주어의 부재’는 복장/교복 규정이나 교복 학교주관구매 가이드북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공정성과 투명성이 생명인 학교 내의 각종 법정·비법정 위원회의 위원 선정 매뉴얼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각종 위원회의 위원 선정에서 위원을 누가 추천하고 결정하는지 명확한 ‘주어’가 부재하기 때문에, 단위학교 안에서 학교장의 자의적 지배가 관철되는 통로가 되고 있다. 1. 물품선정위원회 위원 선정 과정의 예시와 허점 경기교육청의 「2025 물품선정위원회 운영 기준(개정)」에 따르면, 단일품목 추정가격 2천만 원을 초과하는 물품 구매 시 물품선정위원회를 필수로 개최해야 한다. 위원회 구성에 대해 지침은 ‘수요자 중심으로 5인 이상 구성(학생, 학부모, 교직원 등)’하되 ‘학교장과 간사는 제외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위원 위촉의 절차, 즉 위원을 구체적으로 ‘누가 추천하고’, ‘어떤 민주적 절차로 확정하는지’에 대한 명시적 ‘주어’가 매뉴얼에 없다. 결과적으로 일선 학교에서는 행정실이나 담당 부서가 학교장의 묵시적 지침에 맞추어 우호적인 교직원, 마찰을 빚지 않을 학부모와 학생 대표 몇 명을 임의로 골라 명단을 작성하고, 교장의 결재를 받아 위원회를 구성한다. 형식적으로는 학교장이 위원에서 제외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교장이 거수기 역할을 할 위원들을 독점적으로 선택하여 앉힐 수 있는 구조다. 2. 학교자체평가위원회 구성의 한계 예시 단위학교의 교육 활동을 자체 진단하고 차년도 계획에 반영하는 ‘학교자체평가위원회’ 역시 마찬가지다. 「2025 경기 학교평가편람」에 따르면 위원회는 교원, 학부모, 외부위원을 포함하여 7명 내외로 구성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편람은 ‘학교자체평가위원회 구성과 세부 운영에 대한 사항은 학교에서 결정’한다고만 명시하고 있다. 이 모호한 위임 역시 단위학교 안에서는 교장의 자의적 임명권으로 작용한다. 학부모 위원은 학부모회에서 정당하게 추천된 자인지, 외부 위원은 객관적 기준을 거쳤는지에 대한 제도적 약속이 없다. 결국 학교장이 편한 지역위원이나 지인을 위원으로 선정하게 되며, 위원회는 실질적인 토론과 비판 없이 교직원들이 써 온 보고서 초안에 서명만 해주고 흩어지는 무력한 기구로 전락한다. 더 큰 문제는 학운위 산하 소위원회와 교장 산하 위원회를 구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원칙조차 없다는 점이다. ‘경기교육청 각종 위원회 설치 및 운영 조례’처럼 위원회 구성의 객관적 민주성과 위원 선정의 주어를 명확히 하는 조례나 규정, 학칙이 단위학교 차원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시민교육의 형용모순 - 독재를 예습하는 학생들 지방 교육자치 10여 년 동안 진보 교육계는 ‘민주시민교육’을 외쳐 왔다. 하지만 학교 행정의 실제와 의사결정 규칙은 여전히 은밀한 독재 체제를 답습하고 있다. 학생들은 교실에서 법치주의와 권력의 분립, 절차적 정당성을 배우지만, 자신들의 매일의 복장과 학교 운영을 결정하는 구조 속에서는 법과 규칙 대신 권력자의 기분을 살피는 복종을 실습한다. 학교 구성원들이 치열한 토론 끝에 마련한 개정안이 제도적 보장이 아닌 교장 한 명의 성향에 의해 사문화되는 경험은 학생들에게 법과 제도가 아닌 권력에 대한 맹종을 학습시킨다. 학생들이 책으로 배운 민주주의를 믿지 말라고 단위학교 행정이 직접 실습으로 교육하는 이 위선적인 형용모순을 깨지 않고서는 진짜 민주시민교육은 불가능하다. 법치와 자치의 재건 - 초·중등교육법 개정과 광역의회 조례 제정의 필요성 단위학교의 무너진 법치와 자치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임시방편의 가이드북 배포를 넘어, 세밀한 권한 구조를 바로잡는 입법적·제도적 해결책이 필요하다. 1. 초·중등교육법에서 조례 위임의 필요성 현행 초·중등교육법과 시행령은 학교 규칙 제정권을 포괄적으로 부여할 뿐, 학교 내부의 자치기구 권한 분배나 위원회 구성의 세부 원칙을 규율하지 못한다. 국가 수준의 법령으로 모든 단위학교의 구체적 의사결정 규칙을 다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중등교육법의 개정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법률에 ‘법령에서 정하지 아니한 학교 운영에 관한 민주적 원칙, 자치 기구의 지위 및 위원회 구성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은 지방자치단체의 광역의회 조례로 정할 수 있다’는 명시적인 위임 근거조항을 신설해야 한다. 2. 광역의회(도 조례) 제정의 시급성 이 개정 근거에 따라 광역의회(예: 경기도의회)는 ‘단위학교 각종 위원회 설치 및 운영 조례’를 제정해야 한다. 이 조례는 학교 현장의 ‘주어 없는 규정’을 바로잡는 나침반이 될 것이다. 조례에는 첫째, 복장 변경과 자율 복장 승인 등의 실질적 권한이 학생자치회와 학부모회의 발의, 학교운영위원회의 심의·의결에 귀속됨을 명확히 하는 '주어의 법제화'를 담아야 한다. 둘째, 물품선정위, 학교평가위 등의 위원 위촉 시 학생 위원은 학생자치회가 추천하고, 학부모 위원은 학부모회를 통해 추천하도록 하는 '위원 선정권의 분립'을 명시해야 한다. 셋째, 학교장 자의로 운영되는 비법정 위원회와 공식 위원회의 구분을 규정하고 설치 대원칙을 투명하게 정하는 기준을 담아야 한다. 결론 : ‘교장의 선한 독재’에서 ‘민주주의와 법치’로 학교의 복장 규정 변경과 위원회 운영이 훌륭한 학교장의 개인적 선의와 온정에 의해 결정되는 구조는 민주주의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왕정 시대의 인자한 ‘계몽군주’가 베푸는 시혜에 불과하다. 지배자가 바뀌면 기본권이 한순간에 사장되는 지금의 단위학교는 결코 온전한 시민을 길러낼 수 없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학교는 ‘교장의 자비와 선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법치’에 의해 지탱되는 공간이다. 학생들이 스스로 정한 규칙이 법적으로 보장받고, 위원회의 위원을 자신들의 대의기구로 당당히 파견하는 법치주의적 ‘지배의 메커니즘’을 직접 경험할 때 비로소 배움터는 민주시민의 요람이 된다. 초·중등교육법의 신속한 개정과 광역의회의 조례 제정을 통해, 단위학교의 잃어버린 주어를 찾고 학교 현장에 상식적인 법치주의를 즉각 건설해야 할 때다. 교장, 학생, 학부모의 업무상의 권한은 천부인권과 다르다. 법에서 부여된 권한을 행사한다는 합의된 틀과 이해를 통해서만 학교구성원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더에듀 | 정치는 입만 열면 국민을 위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국민을 위한다는 선언과 국민을 위한 제도는 같은 것이 아니다. 법과 정책이 실제로 누구의 권익을 보호하는지는 그 이름이나 명분이 아니라, 시행 이후 누구의 권리가 보호되고 누구의 권리가 약화되었는지를 통해 판단해야 한다. 최근 검찰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검사의 직접 보완수사 기능을 폐지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검사는 경찰에 보완수사를 요구할 수 있지만 수사가 부족하다고 판단하더라도 직접 보완할 수는 없게 된다. 수사와 기소를 분리해 검찰 권한의 남용을 막겠다는 것이 입법의 명분이다. 그러나 먼저 물어야 한다. 보완수사는 누구를 위한 제도인가. 검사를 위한 권한인가. 아니면 미진하거나 잘못된 수사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국민을 다시 살피기 위한 국가의 공적 기능인가. 경찰 수사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고 검찰 수사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민주주의가 어느 한 기관을 무조건 신뢰하지 않는 이유다. 서로 다른 국가기관이 견제하고 보완함으로써 권한 남용과 판단 오류의 가능성을 줄이는 것이 견제와 균형의 원리다. 따라서 보완수사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검사가 독점적으로 누리는 권리로 설계할 것이 아니라, 부실하거나 미진한 수사로 피해를 입은 국민이 국가에 요구할 수 있는 구제 절차로 설계해야 한다. 그런데 이를 ‘국민을 위한 보완제도’가 아니라 ‘검사의 보완수사권’으로 부르는 순간, 국민을 위한 공적 기능이 특정 직역의 사적 권한인 것처럼 인식되는 착시가 생긴다. 정치가 제도보다 특정 주체를 앞세우고, 공적 기능을 그 주체의 권한으로 명명하는 순간 검사의 권한을 축소하는 것이 곧 국민을 위한 개혁처럼 보이게 된다. 공적 기능을 특정 직역의 특권으로 프레이밍한 뒤 그것을 없애는 일을 개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교권으로 바뀐 교육의 공적 의무 이처럼 용어를 바꾸어 공적 기능을 특정 직역의 특권으로 보이게 만드는 정치의 프레이밍은 전혀 낯설지 않다. 지난 십여 년 동안 학교에서도 같은 방식이 반복되어 왔고, 지금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교사의 법적 직무는 학생을 교육하는 것이다. 교사의 교육활동은 교사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사하는 사적 권리가 아니다. 국가가 학생의 학습권을 실현하기 위해 교사에게 맡긴 공적 의무이자 교육권한이다. 그러나 정치는 이를 교사를 위한 ‘교권’으로 프레이밍했다. 학생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교사의 생활지도와 교육적 개입을 제한하는 일이 어느새 ‘개혁’과 ‘혁신’으로 포장되기 시작했다. 정당한 교육활동과 권한 남용을 구분하여 전자는 보호하고 후자는 통제하는 정교한 기준을 세우기보다, 교사의 교육적 개입 자체를 위험한 권력처럼 의심했다.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법률과 제도는 반드시 필요하다. 학생의 인권 역시 당연히 보장되어야 한다. 문제는 약자를 보호하는 입법 자체가 아니다. 개별 주체를 보호하는 정책이 헌법적 원리와 전체 법체계의 정합성, 다른 권리와의 균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설계될 때 발생하는 결과다. 학생의 권리를 교사의 교육활동과 대립시키고, 학부모의 권리를 교사의 전문적 판단과 충돌시키며, 교권과 학생인권을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권리처럼 배치해 온 입법과 정책 속에서 학교는 지속적인 갈등 구조에 놓였다. 그 결과 교사가 잃은 것은 특권이 아니었다. 가르치고 지도해야 할 법적 직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교사가 가르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침해된 것은 교사의 권리가 아니라 대다수 학생의 학습권이었다. 그런데 국가는 이 문제를 다시 ‘교권 보호’라는 특정 주체의 문제로 정의했다. 교권보호위원회를 확대하고, 전담기구를 만들고, 교권보호국을 신설하자는 대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교육활동과 학생의 권리, 학부모의 권리, 국가의 교육책임을 전체 법체계 안에서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권리 간 균형이 무너져 발생한 구조적 문제를 다시 하나의 주체 중심 보호정책으로 해결하려는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문제의 원인이 법체계의 부정합과 권리 간 불균형에 있는데도, 처방은 또다시 특정 주체를 보호하는 조직과 절차를 덧붙이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다. 갈등을 제도의 기본값으로 삼는 입법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입법의 출발점에 있다. 갈수록 정치권의 입법은 헌법적 원리보다 특정 주체를 앞세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학생과 교사, 학부모와 교사, 노동자와 사용자, 피의자와 피해자, 약자와 강자라는 이분법이 정책의 기본값이 된다. 이러한 주체 중심 설계는 이번 형사소송법 개정에 따른 후속 보완책에서도 드러난다. 정치권은 직접 보완수사 폐지에 따른 공백을 막겠다며 가정폭력, 아동학대, 성폭력, 스토킹, 장애인·노인학대 등 사회적 약자 대상 7대 범죄에는 별도의 보완 장치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들 피해자를 두텁게 보호해야 한다는 데 이견은 없다. 그러나 특정 범죄에서 보완수사가 필요하다면 그 기준은 피해자의 신분이 아니라 수사의 누락과 오류, 피해의 중대성, 증거 보완의 필요성이어야 한다. 미진한 수사를 다시 살펴달라고 요구할 필요는 특정한 국민에게만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반적 보완 기능은 없애면서 일부 범죄에만 예외를 두는 것은 보완수사가 불필요하다는 증명이 아니다. 오히려 국민 보호를 위해 보완 기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는 권력과 자원의 불균형이 존재하며 사회적 약자를 특별히 보호해야 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약자 보호는 특정 주체를 절대화하거나 다른 권리를 적대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실질적 평등을 위한 보호 역시 비례성, 적법절차, 책임의 원칙, 전체 법질서와의 정합성 위에서 설계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한쪽을 선으로, 다른 쪽을 악으로 규정하는 제도가 아니다. 충돌하는 권리와 권한을 법적 원리에 따라 조정하고, 어느 한쪽도 자의적으로 다른 쪽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견제와 균형을 설계하는 체제다. 그런데 정치가 갈등을 헌법적 원리로 조정하기보다 갈등하는 주체들의 대립을 입법의 기본값으로 삼기 시작하면, 갈등은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법이 그 대립을 제도 속에 고착시킨다. 하나의 보호입법이 새로운 충돌을 낳고, 그 충돌을 해결한다며 또 다른 특별법과 기구를 만든다. 특정 주체 중심 입법, 권리 간 불균형, 현장의 갈등, 새로운 보호대책과 제도의 복잡화가 반복되는 것이다. 정치적 오용과 공적 기능을 구분해야 한다 검찰과 학교는 전혀 다른 영역이다. 그러나 정치가 문제를 정의하고 개혁의 방향을 설정하는 방식은 놀랄 만큼 닮아 있다. 문제가 된 것은 모든 교사가 아니었다. 교육을 정파적으로 이용하거나 교육활동을 부당하게 행사한 일부 사례였다. 문제가 된 것도 모든 검사가 아니었다. 수사와 기소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권한을 남용한 일부 검사와 그들을 둘러싼 정치적 구조였다. 그렇다면 개혁의 대상은 교사의 교육활동이나 검사의 공적 기능 자체가 아니어야 한다. 공적 권한을 정치적으로 동원하지 못하도록 개입 구조를 차단하고, 권한 남용에는 명확하게 책임을 묻되 정당한 직무 수행은 보호했어야 한다. 문제는 교사가 가르친 것 자체가 아니라 교육이 정치적으로 이용된 것이었고, 문제는 검사가 수사한 것이 아니라 수사가 정치적으로 이용된 것이었다. 그런데 정치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정치적으로 이용된 권한을 바로잡기보다 권한 자체를 축소했고, 정치가 만든 왜곡을 교사와 검사의 문제로 바꾸었다. 정치적 오용이 문제였는데 처방은 공적 기능의 축소였다. 정치는 자신을 어떻게 개혁했는가 그렇다면 이제 정치권에 물어야 한다. 정치권은 자신을 어떻게 개혁했는가. 검찰 인사와 수사에 정치권력이 개입할 가능성은 얼마나 차단했는가. 수사기관을 정권의 이해에 따라 이용하지 못하도록 정치권 스스로를 통제하는 장치는 얼마나 강화했는가. 교육과정과 학교를 정권의 이념과 공약을 집행하는 수단으로 동원해 온 관행은 얼마나 개선했는가. 법률이 특정 정치세력의 이해가 아니라 국민 전체의 권익을 대변하도록 입법 과정의 책임성과 숙의 구조는 얼마나 강화했는가. 잘못된 정책과 입법에 대해 정치인이 직접 책임지는 제도는 얼마나 마련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교사와 검사의 권한부터 줄였다면 그것은 정치개혁이 아니다. 정치의 실패를 공적 조직의 실패로 바꾸어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정치검사가 문제였다면 검사를 정치적으로 종속시키는 구조부터 개혁했어야 한다. 정치교육이 문제였다면 교육을 정파적으로 동원하는 정치권력부터 통제했어야 한다. 그러나 정치권은 자신을 통제하는 제도보다 교사와 검사를 통제하는 제도를 먼저 만들었다. 공적 권한은 특권이 아니라 의무의 수단이다 헌법은 공무원을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 규정한다. 따라서 공적 권한은 그것을 행사하는 직역의 이익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권익을 위해 존재한다. 교사의 교육권한은 학생을 위해 존재하고, 검사의 수사 기능은 범죄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억울한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존재한다. 여기서 반드시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교사와 검사가 가진 권한은 마음대로 행사하거나 포기할 수 있는 사적 권리가 아니다. 교사는 학생의 학습권을 실현하기 위해 교육하고 지도해야 하며, 검사는 범죄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억울한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법이 부여한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들에게 부여된 권한은 특권이 아니라 그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법적 수단이다. 따라서 공적 권한을 박탈하거나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단순히 교사와 검사의 힘을 줄이는 일이 아니다. 학생과 국민이 법에 따라 당연히 제공받아야 할 교육과 수사·구제 기능을 국가 스스로 약화시키는 일이다. 교사에게 가르치고 지도할 권한을 보장하지 않으면서 학생을 제대로 교육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검사에게 미진한 수사를 직접 보완할 수단을 없애면서 국민의 억울함을 끝까지 살피라고 요구하기도 어렵다. 의무는 그대로 둔 채 그 의무를 수행할 권한만 제거한다면, 남는 것은 실질적 수행수단을 잃은 명목상의 직무뿐이다. 결국 공적 권한의 축소는 해당 직역의 특권을 제거하는 문제가 아니다. 국가공무원으로서 국민 전체에 봉사해야 할 의무를 수행할 실질적 수단을 제거하는 문제다. 권한을 박탈한 채 의무만 남겨둔다면, 그것은 의무를 존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무력화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권한을 통해 보호받아야 할 학생과 국민의 법적 권익은 누가, 어떤 방식으로 끝까지 보장할 것인가. 개혁의 기준은 권한 축소가 아니라 국민 보호다 특정 직역의 권한을 확대하거나 축소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공적 권한은 국민의 권익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범위에서 보장하되, 그 남용은 엄격히 통제해야 한다는 헌법적 원칙을 다시 묻는 것이다. 공적 권한을 행사 주체의 특권으로 오인해서도, 권한 남용을 이유로 공적 기능 자체를 무력화해서도 안 된다. 다른 권리 및 국가기관과의 관계 속에서 견제와 균형을 이루도록 설계해야 한다. 진정한 개혁은 권한을 무조건 확대하거나 없애는 일이 아니다. 공적 기능이 헌법적 원리와 전체 법체계 안에서 국민을 위해 제대로 작동하도록 바로잡는 일이다. 정치는 자신이 오염시킨 공적 조직을 개혁한다며 그 조직의 공적 기능부터 해체해서는 안 된다. 정치적으로 이용된 권한과, 국민을 위해 필요한 권한은 같은 것이 아니다. 약자를 보호하는 일과 특정 주체를 중심으로 국가를 설계하는 일 역시 같은 것이 아니다. 갈등을 해결해야 할 정치가 갈등을 입법의 기본단위로 삼고, 그 결과 발생한 새로운 갈등을 또 다른 법과 기구로 봉합하는 악순환도 멈춰야 한다. 교사와 검사를 개혁하기 전에, 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온 정치는 자신을 얼마나 개혁했는가. 국민을 위한다는 말이 진실이라면, 이제 정치가 답해야 한다. 그리고 정치가 끝내 답하지 못한다면, 국민의 법적 권익을 보호해야 할 대통령은 이 법안에 재의를 요구해야 한다. 검사의 권한을 되돌려 달라는 요구가 아니다. 미진한 수사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국민을 국가가 끝까지 구제할 수 있는지 다시 심사하라는 요구다.
더에듀 |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는 거창한 말을 꺼내기가 너무 민망하고 학교가 이렇게까지 스스로 얼굴에 먹칠을 하고 미처 돌아가는 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작년 8월 서울의 한 특성화 고교 ‘인공 지능 활용 능력 민간 자격 시험’에서 발생한 집단 부정행위 사건이 그것이다. 대한민국 교육 현장이 이토록 윤리적 도덕 해이 상태로 추락한 것인지 심히 공포스럽다. 이는 지난 7월 31일, 1년이 다 되어 가는 현시점에서 뒤늦게 언론 매체인 위키트리 기사와 YTN 보도를 통해 밝혀진 것이다.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지난해 8월, 인공지능 활용능력 민간 자격시험이 열린 한 서울의 고교 교실에서 상식적으로 1도 납득하기 힘든 비리가 저질러졌다. 시험을 감독하고 학생들을 바른길로 인도해야 할 교사가 앞장서 우수 학생의 답안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그리고 비대면 실시간 카메라 감독을 피하기 위해, 노트북 화면에 답안을 띄워 칠판 크기로 확대해 교실 전체에 공유했다. “1번은 무엇, 2번은 무엇”이라며 교사가 직접 ‘집단 커닝’의 판을 깔아 주었다. 이것이 과연 신성한 배움터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이렇게까지 해서 시험을 쳐야 하나 회의감이 들었다”는 한 학생의 양심 고백은, 이 기이하고 기만적인 상황 앞에서 아이들이 느꼈을 혼란과 상처를 그대로 증명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단순히 “학생 몇 명이 성적을 올리기 위해 부정행위를 했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교육의 주체이자 도덕적 보루여야 할 교사가 집단 부정행위의 ‘주모자’로 나섰다는 점에서 사태의 심각성은 차원이 다르다. ‘학교 실적만 올리면 그만’, ‘모두 같이 합격해서 좋은 게 좋은 것’, ‘우리 끼리만 알고 넘어가면 문제가 없다’는 식의 온정주의와 성과지상주의가 결합한 최악의 결말이다. 교사가 솔선수범하여 정직과 공정을 짓밟는 모습을 본 학생들이 과연 교실에서 무엇을 배우겠는가? 성과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잘못된 가치관을 학교가 나서서 주입한 셈이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해이를 넘어 대한민국의 공교육 기반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교육 붕괴’의 현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학교 현장에서 발생하는 이와 같은 비리에 대해 그동안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온정적이었다. 제 식구 감싸기식 솜방망이 처벌과 제재는 이러한 최악의 추태를 키운 방조제나 다름없다. 가르칠 '교(敎)', 스승 '사(師)'라는 이름표 뒤에 숨어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더 이상 교사로서의 우대나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 이 사건의 당사자는 제자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교육자가 아니라, 공정한 평가 시스템을 방해하고 아이들의 양심을 짓밟은 ‘추악한 범죄자’일 뿐이다. 서울교육청은 철저한 감사를 통해 사건의 내막을 한 치의 의혹도 없이 천하에 공개해야 한다. 그리고 해당 교사와 학교의 관련자들에게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시험 방해 등 법이 허용하는 최상위 수위의 형사 처벌과 파면 등 엄중한 중징계를 내려야 한다. 교직 사회에 “부정행위를 주도한 결과는 교단에서의 영구 퇴출과 법적 처벌뿐”이라는 강력하고 명확한 메시지를 던져야 한다. 이러한 비극이 다시는 대한민국 학교와 교실에서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일회성 질타를 넘어 근본적인 제도 개선과 구조적 수술이 시급하다. 첫째, 교육청 차원의 즉각적인 전수조사와 무관용 원칙(Zero Tolerance) 확립이다. 관내 특성화고 및 민간 자격시험 운영 학교 전체를 대상으로 유사 부정행위 여부를 전수조사해야 한다. 나아가 교직원 비위 사실이 적발될 경우, 단 한 번의 비위로도 교단에서 영구 제명하는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를 민간 자격시험 및 교내외 모든 평가 영역으로 엄격히 확대 적용해야 한다. 둘째, 학교 평가 및 자격증 채택 시스템의 구조적 개편이다. 자격증 취득률이나 취업률 등 단기적인 성과 수치만으로 학교와 교사를 평가하는 구조가 이러한 기만행위를 부추긴 측면이 크다. 수치 위주의 평가 시스템을 개선하고, 비대면·민간 자격시험의 감독 주체와 관리·감독 프로세스를 외부 전문 기관에 맡겨 교사와 학교의 이해관계가 시험 평가에 개입할 여지를 철저히 차단해야 한다. 셋째, 교직 윤리 교육의 강화와 내부 고발자 보호 시스템 구축이다. 교사 임용 및 재교육 과정에서 교직 윤리 프로그램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또한, 이번 사건처럼 내부 학생이나 양심 있는 관계자의 제보가 없었다면 묻혔을 비리를 밝혀낼 수 있도록, 신원 노출 걱정 없이 제보할 수 있는 ‘교육 비리 전담 핫라인’과 강력한 제보자 보호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거짓으로 얻은 합격은 아이들의 미래를 망칠 뿐이다. 거짓과 편법으로 얻은 자격증 한 장이 아이들의 인생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어른들의 그릇된 욕심이 정직하게 노력하던 아이들의 땀방울을 짓밟았고, ‘공정’에 대한 아이들의 믿음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더 이상 교실이 부정과 비리의 난장판으로 전락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 당국은 이번 서울 특성화고 집단 커닝 사건을 대한민국 교육의 사형선고로 받아들이고, 관련자들에 대한 일벌백계와 철저한 개혁에 나서야 한다. 미래 세대인 청소년들에게 정직을 가르쳐야 할 학교가 거짓을 모의하는 이 같은 비극을 완전히 뿌리째 끊어낼 것을 강력하게 요구함과 함께 이번 언론 보도에 드러난 추악한 사건을 늦었지만 반드시 거슬러 올라가 학교 감사와 수사를 통해 납득할 만한 조치가 이루어지길 강력하게 촉구하는 바이다.
더에듀 여원동 기자 | 에듀테크 전문기업 ㈜에듀프레임이 인공지능(AI) 연동 전자칠판 판서 프로그램의 조달청 디지털서비스몰(G2B) 등록을 완료했다. 사용자 편의성과 수업 활용성을 강화한 판서 소프트웨어를 학교와 교육기관에 더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으로 평가된다. ㈜에듀프레임은 지난달 23일 전자칠판 판서 프로그램 ‘AI PowerIWB V3.0’과 ‘AI PowerScribo V3.0’이 각각 조달정 디지털서비스몰에 등록됐다고 3일 밝혔다. 두 제품은 각각 윈도우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에 최적화한 수업보조용 소프트웨어로 전자칠판 판서를 비롯해 PDF·PPT등의 수업자료 활용, 원드라이브·구글 드라이브 연동, 인터넷 보조 수업자료 검색, 생성형 인공지능 서비스 활용 기능을 하나의 프로그램에서 제공한다. 전국 초·중·고등학교와 교육청, 교육기관은 조달 절차를 통해 제품을 도입할 수 있다. 전자칠판 신규 설치뿐만 아니라 기존 전자칠판의 판서 소프트웨어 개선과 운영체제별 수업 환경 표준화에도 활용이 가능하다. 특히 지난 5월 GS인증 1등급을 획득, 기술력도 증명됐다. ‘AI PowerIWB V3.0’...윈도우 64비트 환경에 최적화 ㈜에듀프레임의 ‘AI PowerIWB V3.0’은 윈도우 64비트 환경에 최적화한 전자칠판 판서 프로그램으로 교사는 두 손가락을 끌어 조작하는 투 핑거 드래그 제스처를 이용해 판서 프로그램의 주요 기능을 빠르게 실행할 수 있다. 수업 중 도구 상자를 반복해서 열거나 메뉴를 여러 차례 선택해야 하는 불편을 줄여 수업 내용과 학생 반응에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웹브라우저, 웹이미지, 웹동영상등 인터넷에 있는 다양한 보조 수업자료도 원클릭 방식으로 검색해 활용할 수 있다. 필요한 자료를 수업 화면에서 즉시 불러올 수 있어 응용프로그램을 반복 실행하거나 화면을 복잡하게 전환해야 하는 부담을 줄였다. 수업이 끝난 뒤에는 판서 내용과 수업자료를 저장해 학생 복습자료나 교사용 강의록으로 활용할 수 있다. ‘AI PowerScribo V3.0’, 안드로이드 판서와 화면 주석을 통합하다 ‘AI PowerScribo V3.0’은 윈도우용 프로그램의 핵심 판서 기능과 사용 방식을 안드로이드 전자칠판 환경에 구현했다. 기존 안드로이드 전자칠판은 자체 운영체제에서 실행되는 온보드 판서앱과 외부 입력 화면 위에 글씨를 쓰는 화면 주석 기능이 분리돼 있어, 교사가 수업 중 여러 프로그램을 오가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이에 에듀프레임은 일반 판서와 화면 주석 기능을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통합해 교사의 사용 편의성을 높였다. 또 안드로이드 환경에서도 PDF와 PPT 등 다양한 수업자료를 불러와 판서할 수 있으며, 인터넷에 있는 다양한 보조 수업자료도 원클릭으로 활용할 수 있다. 원드라이브와 구글 드라이브에 저장된 자료를 교실에서 바로 불러올 수 있어 교사가 연구실이나 가정에서 미리 준비한 자료를 별도의 저장장치 없이 활용할 수도 있다. GS인증 1등급, 생성형 인공지능(AI) 연동 두 제품은 지난 5월 GS인증 1등급을 획득했다. 이는 소프트웨어 품질과 기술적 완성도를 인정받았다는 의미이다. 또 챗GPT와 제미나이 등 생성형 인공지능 서비스를 판서 프로그램과 연계해 교사가 수업 중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고, 자료를 분석하거나 핵심 내용을 요약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조정묵 ㈜에듀프레임 대표는 “전자칠판의 경쟁력은 화면 크기와 해상도뿐만 아니라 교사가 교수·학습자료를 얼마나 쉽고 빠르게 활용할 수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며 “학교는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판서 소프트웨어의 품질과 수업 활용성을 검토해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윈도우와 안드로이드 환경에서 일관된 판서 사용성을 제공하고, 클라우드와 인터넷 수업자료 및 생성형 인공지능을 하나의 수업 흐름으로 연결하는 데 중점을 뒀다”며 “학교 현장 요구를 반영해 기능 개선 등 지속적인 업데이트에 나설 것”이라고 설명했다.
더에듀 | 인간의 정신적·물질적 성취욕구는 자신의 발전은 물론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되어 왔다. 성경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바벨탑 사건은 인간의 발전 자체를 꾸짖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보다 인간의 욕망을 더 높이 쌓으려 했던 교만을 경고하는 영원한 교훈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흩어지기를 거부하고 한곳에 모여 “우리 이름을 내자”며 하늘에 닿는 탑을 쌓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적은 건축이 아니라 자기 영광이었다. 순종보다 명예를, 사명보다 성공을, 하나님보다 인간의 능력을 신뢰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계획을 멈추게 하셨다. 오늘의 시대에도 바벨탑은 형태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곳곳에서 세워지고 있다. 거대한 사업, 대규모 인수합병, 화려한 비전과 원대한 청사진은 결코 잘못이 아니다. 핵심은 그것을 받치고 있는 ‘기초 체력’과 ‘절차적 정당성’에 있다. 사업의 성패를 가르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은 정교한 자금 조달 구조와 엄밀한 설계 명세다. 이는 재무적 가시성과 실행 가능성을 담보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라 할 수 있다. 엄정한 자기 책임성, 견고한 재정적 자립도, 투명한 행정 절차, 그리고 냉철한 현실 인식이 부재한 목표 추구는 신앙이나 신의의 기념비가 아닌, 단순한 사적 탐욕의 구조물로 전락할 뿐이다. 자기자본 투입이 전무한 상태에서, 단지 자기자본비율 0%의 극단적인 레버리지(Leverage)에만 의존하여 대규모의 대형 자산을 인수하려는 시도는 경제학적으로 도덕적 해이이자, 실체 없는 사상누각(砂上樓閣)이자 신기루에 불과하다. 이는 최소한의 리스크 관리조차 부재한 상태에서, 명분만을 내세워 막대한 제3자 자본을 동원하려는 비대칭적 위험 추구 행위다. 성경 누가복음 14장 28절부터 30절에는 다음과 같은 경고가 나온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완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정확한 재무적 설계 없이 거창한 과업을 벌이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만용이며 도덕적 해이일 뿐이다. 선한 명분으로 포장된 무한한 탐욕 노인 빈곤층을 돕고, 미자립교회와 해외 선교사를 구제하겠다는 명분은 그럴듯하고 숭고해 보인다. 그러나 목적이 아무리 화려할지라도 과정의 실체와 수단이 정당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선행이 아니라 탐욕을 위장하기 위한 가면일 뿐이다. 불경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서는 마음속의 헛된 욕망과 착각에 대해 이렇게 설한다. “모든 중생이 갖가지 그릇된 집착으로 인하여 헛된 환상을 짓고, 그것을 진실이라 믿으며 스스로 얽매여 괴로움을 자초한다.” 자기자본 없이 남의 돈과 거대한 부채에 의존해 대형 자산을 취득하려는 행위는 불교에서 말하는 ‘아귀욕(餓鬼慾)’의 또 다른 단면이다. 아무리 먹어도 배고픔을 면하지 못하는 아귀처럼, 거룩한 명분을 핑계 삼아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거대한 욕망을 채우려 하는 것은 종교적 자비나 사랑의 정신에 정면으로 반한다. 수단이 정당하지 않은 목적은 유죄다 원래 자본 시장에서는 돈이 벌리면 지옥이라도 찾아가는 게 기업이다. 침착하고 냉혹한 수익 계산 없이는 단 1원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자본의 생리다. 하물며 금융에 대한 전문적 식견이나 최소한의 자기자본조차 갖추지 못한 채, 원로 성직자라는 고유의 지위와 권위에 의존하여 대형 자산 인수를 추진하는 것은 자본 시장의 기본 질서를 무시한 무모한 도박에 지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8절에서 “선(善)을 이루기 위하여 악(惡)을 행하자”고 말하는 자들의 부당함을 강하게 지적하며, 그들이 받을 심판이 정당하다고 짚었다. 좋은 목적이 과정의 무책임함이나 기만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인생 팔십(산수(傘壽, 80세)의 연배는 치기 어린 객기를 부릴 시기가 결코 아니다. 내실 없는 욕망으로 무모한 사업을 벌이는 것은 미완의 집착인 노욕(老慾)이자 노추(老醜)일 뿐이다. 탄자니아 응고롱고로(Ngorongoro) 분지의 사자들은 고립된 생태계에서 근친교배를 거듭하다 결국 유전적 열성화와 면역력 결핍으로 집단적 위기를 맞이했다. 마찬가지로 비판적 검증과 건전한 견제가 부재한 조직 역시 폐쇄성과 자만 속에 자멸의 길을 걷게 된다. 이처럼 생물학적으로 예견된 자멸의 과정에서, 직언을 포기하고 침묵으로 일관한 참모들의 ‘한선(寒蟬, 추운 가을의 매미처럼 입을 다무는) 현상’ 역시 리더의 독주와 파멸을 방조한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는 직언을 통한 리더십 견제라는 참모 본연의 책무를 저버린 ‘직언 없는 공범’으로 형사법상 ‘부작위(不作爲)에 의한 공범 행위’이다. 진정한 선행은 스스로를 비우는 것에서 시작된다 진정한 구제와 선교는 거대한 건물이나 외형적인 세력 확장에서 나오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을 행할 때 스스로를 낮추셨고, 과부의 두 엽전을 가장 큰 헌금이라 칭찬하셨다. 외형의 거대함이 아니라 진실한 희생과 책임감이 핵심이라는 뜻이다. 부처님 역시 《금강경(金剛經)》을 통해 “상(相)에 사로잡혀 보시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내가 선한 일을 한다’는 자랑과 거창한 명분에 사로잡힌 순간, 그 보시는 공덕이 아니라 사사로운 집착으로 변질된다. 이는 법정 스님이 강조한 무소유(無所有)의 가르침과도 궤를 같이한다. 자기자본 1원도 없이 천문학적 자산을 탐내는 것은 신앙의 이름으로 행하는 거대한 착각이자 위험한 과욕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거창한 인수 계획이 아니라, 자신의 무모함을 직시하고 스스로를 비워내는 참회와 솔직함이다. 바벨탑은 지금도 우리에게 묻고 있다. “네가 쌓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면 자신의 이름인가.”